성인들 가르침/기타 비이원론 가르침

완전함과 불완전함에 대하여

무한진인 2023. 8. 16. 21:57

 

완전함과 불완전함

 

생명체의 수는 무한하고, 마음도 방대합니다.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의 오대 원소, 세 가지 속성(라자스, 타마스, 사트바), 내면 진아,

그리고 원초 환상은 모두 광대하고 전체에 펼쳐져 있습니다.

 

속성이 없는 브라만 역시 광대하며 전체에 펼쳐져 있습니다.

따라서 "완전하게 차별이 없는 하나의 광대함이 있는가,

혹은 그 성질과 넓이에 약간의 차별이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진아는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진아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속성이 없이 순수한 것인가?"

 

듣는 사람은 이러한 의심을 지니게 되고, 의심이 지속되며,

"진아는 무엇인가?", "진아는 어떤 것인가?"에 대해 추측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첫 번째 의심에 대한 답을 들어보십시요.

주의 깊게 생각하고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만들지 마십시요.

분별의 힘에 의한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직접 보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생명체는 육체의 능력, 활동하고 결정하는 능력에 따라 작용하는데,

우리는 마음보다 더 빠른 것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신속함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 범위가 무한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조사해 본다면,지구의 광대한 넓이도 또한 제한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슷하게 우리는 물(水)과 빛(火)이 그 범위에 있어서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습니다.

바람(風)의 속도도 그 범위에 한계가 있음을 이해하십시오.

 

공간과 파라브라만은 둘 다, 그 광대함, 보이지 않음, 밀도 면에서 완전합니다.

여기에서는 상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세 가지 속성(라자스, 타마스, 사트바), 세 가지 속성의 파동성 움직임,전체 환상 자체가 모두 끝이 납니다.

그들의 작용 범위은 불완전하고 제한적입니다.

그것들이 그들의 영역에서 완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자아(Atman)와 실재(Brahman, Niranjan)는 개아(지바)와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의식(시바)의 형태로 자아의 양면을 나타내는 데 항상 사용되는 두 가지 이름입니다.

이것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무언가를 말해야 합니다.

 

자아와 마음이 함께 움직이면 매우 빠르고, 그들의 범위는 매우 광대하지만,

무한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맑고 평온한 마음으로 관찰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주의가 위쪽 공간으로 향하면, 마음과 자아는 아래쪽 공간에는 없으며,

만약 주의가 아래 쪽 공간으로 향하면, 위쪽 공간에는 마음과 자아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항상 모든 곳에 퍼져 있지 않습니다.

 

만약 앞 쪽을 볼 때는 뒤 쪽은 보지 않고, 뒤 쪽을 보게 되면 앞 쪽은 보지 않습니다.

만약 왼쪽을 보게 되면 오른쪽은 보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아와 마음은 모든 방향에 퍼져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의 주변 사방에 깃발이 꽂혀 있다면,

어떻게 동시에 모든 깃발을 만질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이해한 후에, 마음과 자아는 그 범위에서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체험하십시오.

 

어떤 때는 해가 떠서 물에 반사된 모습이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비유는 '속성없는 절대 실재'(Nirguna Parabrahman)라고 불리우는 것에 완전히 적합하지 않습니다.

 

"항아리 속의 공간"과 "방 안의 공간"의 직유법도 사용되지만,

파라브라만의 유사성을 어떤 것의 광대함과 확연하게 비유해 줄 수 있는 정확한 직유는 없습니다.

 

공간(空大) 원소는 브라만(Brahman)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며,

마찬가지로 마음은 진아(Self)의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이에 대한 경험과 깨달음은 여기서 보여준 것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공간과 마음이 비슷할 수 있습니까?

이것에 대해 미묘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완전히 이해하는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마음의 주의가 앞을 바라보면 뒤에 있는 것은 없습니다.

마음의 범위와 완전한 공간의 범위를 비교하기 위해 어떤 비유를 사용할 수 있습니까?

 

절대 실재인 파라브라만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산도 움직이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지식, 무지, 잘못된 지식이 같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반조해 보고, 자신의 경험 속에서 찾아 보십시오.

 

지식은 "아는 것"을 의미하고, 무지는 "모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잘못된 지식은 어떤 것을 보고 그것을 다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옆으로 제껴두고 남는 것은 오직 오대 원소 뿐입니다.

이 오대 원소의 유희를 실재(實在)라고 착각하면 이것이 바로 '중생의 잘못된 앎'입니다.

 

내면의 자아는 주시자이자 관찰자입니다.

개별적 자아(Jivatma)인 것이 순수 자아(Shivatma)가 되며,

더 나아가 개인 자아로 태어나는 것은 순수 진아입니다.

 

개인의 자아는 탄생과 죽음의 지배를 받으며, 탄생과 죽음의 순환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내가 매 시대마다 탄생해서 올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개인의 자아는 제한된 존재입니다.

탐구와 분별의 힘을 통해 "우주적 자아" 또는 신이 온 우주를 채우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우주적 자아는 세속적 존재의 모습을 피할 수 없습니다.

 

지혜(Jnana)와 무지(Ajnana)는 둘 다 어떤 태도 또는 어떤 상태(vritti)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순수한 지혜(Vijnana)는 그러한 어떤 상태로부터의 철수 또는 상태의 부재(nivritti)를 말합니다.

이 궁극의 지혜는 즉각 인식될 수 있습니다.

 

우주는 지식으로부터 창조되었습니다.

지식은 크게 확장되었으며 많은 변화의 형태를 취했습니다.

이것이 냐나(Jnana,지혜)의 특성입니다.

 

여덟 번째 몸, 즉 대원인체(Great Causal Body)는 보편적 자각의 수준에서, 원초적 환상(Primal Illusion)입니다.

이것은 지혜(Jnana)의 최고 수준입니다.

"궁극의 지혜" 또는 Vijnana는 육체가 없는(그리고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스승과 제자 간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