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각(自覺)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도 필요 없다(2)
슈리 푼자 :
안경을 바라보고자 하는 저의 의도는 더 이상 없습니다.
이제 자각만이 있습니다. 이제, 안경을 바라보는 눈만이 있습니다.
저의 눈이 있습니다. 눈이 사물을 바라보고 있지요.
아무런 욕망이 없이 바라보기 위하여 무슨 명상이 필요합니까?
무슨 명상이? 무슨 집중이?
만일 보고싶은 어떤 것을 상상하고 싶다면, 그때는 어떤 집중이 필요할 것입니다.
당신은 눈을 감고, 마음의 모든 에너지를 당신이 집중하고 있는 것의 이미지로 모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직접적인 봄을 위해서는 이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냥 보는 것이지요.
이 자각은 볼 필요조차 없습니다.
당신은 그 방향으로 눈을 돌릴 팔요도 없습니다.
이 자각은 보는 행위 이전에도 있습니다.
사실 보고 싶은 경우에는, 그 자각이 눈을 활성화시켜 그 눈으로 하여금 대상들을 등록하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눈을 통해 보기 위해서는 자각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바라봄은 마음과 감각의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감각들 사이에는, '나'와 대상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어떤 작은 미묘한 노력이 요구되지만,
그저 지각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전혀 요구되지 않습니다.
이 자각을 알거나 찾기 위해서는 조금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당신은 말합니다.
"나는 이 자각에 집중함으로써 그것을 알 것이다." 라고 당신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각이라고 부르는 이것에 집중하고 싶다면, 집중을 하기 위해 이용해야 할 것은 자각 그 자체입니다.
자각은 마음을 활성화시켜 그것을 특정방향으로,
당신이 명상하고 있는 대상 쪽으로 향하게 할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서 모든 활동을 이해하고 있다." 고 당신은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모든 활동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자각입니다.
이 모든 것이 자각 속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자각에 의해 지탱된다는 것을 이해되기만 하면,
당신은 이 세상의 모든 활동에서 자유로워집니다.
마치 당신이 일들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당신은 하고 있지 않으며 당신도 그것을 압니다.
모든 것을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자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지요.
모든 활동을 행하는 것이 바로 자각이며, '당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 때,
당신의 기억 속에는 아무런 발자국이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쁘라랍다를 축적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다른 탄생을 일으킬 수 있는 더 이상의 까르마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삼사라를 끝내는 방식입니다.
집중과 명상의 활동은 발자국을 남깁니다.
당신은 그것들로 기억을 만들며, 이 기억들이 삼사라입니다.
당신은 까르마를 축적할 것이며, 이 까르마는 당신의 재탄생으로 귀결될 것입나다.
그것은 결코 끝나지 않는 순환이며, 그것 모두는 당신이 창조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각하고 있다면 어느때든 저지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각속에서는 모든 것이 불처럼 타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당신으로 되돌아와야 합니다.
"나는 자각이다."로 돌아 간다면, 모든 것이 와해됩니다.
현상계와 삼사라의 모든 게임이 와해되지요.
이것이 일어날 때, 이것을 자유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고 저는 말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하거나 말하는 모든 것을 지탱하면서 내내 거기 있습니다.
예리한 이해력, 아주 날카로운 이해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해할 것이며, 어떤 사람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1초의 60분의 1도 아닌, 시간을 벗어나 있는 한 찰나일 것입니다.
그 자각은 항상 거기에 있지만, 누가 그것을 보겠습니까?
이것을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각을 알게 위해 왜 시간이 필요합니까?
어떤 사람은 그것을 한 순간에 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러 해가 걸릴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평생 걸릴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3천 5백만 년 동안 노력해 오고 있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스승에게서 한 마디만 듣고서 단박에 보고 이해합니다.
스승이 주는 한 마디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지요.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에 달려 있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아무런 전제조건들을 정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저는 당신에게 도덕적인 규칙들을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종교들이 하지 않습니까?
저는 "아무 수련도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요가도 필요없다"고 말합니다.
아무데도 갈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에 가거나 성자들을 순례하거나 성수에 몸을 담글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에 가거나 성자들을 순례하거나 성수에 몸을 담글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 중 그 무엇도 당신을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히말리아에 갈 수도 있습니다.
어떤 성지든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 가운데 그 무엇도 당신을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것에 대해 매우 확신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참나를 대면해야 합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싶다면, 그 대신애 머리 넷 달린 하늘의 브라마를 보러 갈 수도 있습니다만,
그 자신이 구속되기 때문에 그는 당신을 도와줄 수 있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 스스로가 해방을 기다라고 있습니다.
모든 신들은 그들 자신의 해방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최고의 신, 최고의 장소, 최고의 교회, 최고의 사원, 이 모든 것은 당신에게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어려움은 그것들이 너무 가까이 있어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그것들이 너무 가깝기 때문에 당신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당신에게는 너무 쉬운 것이지요.
당신은 그것이 문제가 되기를 원합니다.
당신은 탐구하면서 어떤 어려움을 바라지만,
당신이 찾고 있는 것은 내내 거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호흡 뒤에 숨어 있습니다.
그것을 지금 바라보십시오.
호흡이 어디에 자리하고 있습니까?
당신 자신의 호흡은 당신에게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까?
그것은 망막 뒤에 숨어 있습니다.
그냥 안으로 돌아서서 망막 뒤를 바라보면서, 눈에 빛을 주고,
눈에 볼 수 있는 힘을 주는 그곳을 보십시오.
그 누구도 결코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전에 어느 누구도 당신에게 이것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망막이 현상계 전체를 볼 수 있는 힘을 얻는, 망막 뒤의 한 장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이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입니다.
그냥 거기를 바라보십시오.
요가, 얏나(yajna), 기도, 자선, 성지순례, 성수 목욕 등으로는 결코 그것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곳이 성스러운 곳들 중에서 가장 성스로운 곳입니다.
그 안에서 한 번 목욕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목욕이 무엇일까요?
바로 이 성스러운 목욕은, 생각이 없어 더 이상 오염시키지 않을 때 이루어집니다.
이 갠지스강에서, 이 성스러운 물에서, 생각이 들어오지 못하는 이곳에서 목욕하십시오.
- 빠빠지와의 삿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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