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다왕문경] 아는 주체가 존재하는가?
[본문]
밀린다왕 : '아는 주체'가 존재합니까?
나가세나 : 그게 무엇입니까?
밀린다왕 : 보고, 듣고, 맛보고,냄새 맡고, 느끼고, 사물을 구분하는 우리 내면의 주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 앉아서 원하는 대로 창문을 통해서 밖을 내다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보는 주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가세나 : 데왕께서 말씀하셨듯이 내면의 주체가 보고, 듣고, 사물을 지각한다면 귀나 다른 것을 통해서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해설]
"귀나 다른 것을 통해서 볼 수 있지 않은가?"하는 물음은 다소 생뚱맞게 들리겠지만,
뒤에 가면 그 말의 본의를 알게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본다'는 현상은 보는 기능(眼根)과 보이는 대상(眼境)이 있을 때 보는 의식(眼識)이 일어나는 것일 뿐, 달리 '보는 주체'는 없다. "만약 이러한 세 가지 요소 외에 '보는 주체'가 따로 있다면 귀나 코로 볼 수 있지 않은가? " 하는 물음이다.
[본문]
밀린다왕 :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나가세나 : 그렇다면 대왕의 말씀과 같이 내면의 주체가 마음대로 감각을 사용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은 이렇습니다. 눈(眼根)과 형태(色境)로 인해서 시각(眼識)이 일어나고, 다른 것들(접촉, 느낌, 지각, 의도, 주의집중)이 연이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조건들은 원인에 따라 저절로 일어나는 것일 뿐 그 속에 달리 '아는 자'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해설]
우리는 보통 무엇을 보면서 '내가 본다'고 말하고, 또 그렇게 생각하는데, 실제로 '보는 자'는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 눈과 형상이 있으면 눈의 인식작용이 생긴다. ( 그 반대는 아니다) 그것은 두 손바닥이 부딪칠 때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 소리는 두 손바닥에 의존하는 것이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식도 그와 같다. 보는 작용은 손뼉소리와 같이 눈과 형상에 의존해서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뿐 불변의 실체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미망은 '보는 작용'으로부터 '보는 작용을 하는 나'로 점프하는 것이다. 또 다른 장(5/6)에서는 같은 질문에 대해 짤막하게 답한다.
[본문]
말린다왕 : 나가세나 스님, '아는 주체'가 존재합니까?
나가세나 : 궁극적인 의미에서 아는 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해설]
'아는 주체'란 인격적 주체, 혹은 윤회의 주체를 가리킨다.
바람이 불든, 강물이 흐르든 그 움직임과 흐름을 이끄는 주체는 없다.
주체가 없이 움직이고 흘러간다.
사람의 심리현상과 육체적 기능은 바람이나 강물보다 좀 더 복잡하긴 하지만
주체가 없다는 점에서는 역시 마찬가지이다.
물론 현생과 내생을 이어주는 의식의 흐름은 존재한다.
그러나 의식의 흐름도 실체적으로 연속되는 것은 아니다.
앞 찰나의 의식이 뒤 찰나에 영향을 미칠 뿐 옮겨가는 것은 아니다.
단절도 아니고(不斷), 연속도 아닌(不常) 것이다.
이것이 윤회의 실상이다.
여기서 " '참된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참된 의미라는 것은 곧 진제(眞諦 = 勝義諦 =第一義諦)를 가리킨다.
'아는 주체(vedagu)'를 '아는 자'로 번역하든 '영혼'으로 번역하든
진제의 차원에서는 공적(空寂)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할 것이 없다.
그러나 동시에 통념적 차원(世諦)에서는 영혼도 있고, 아는 자도 있는 것이다.
예컨대 천도제를 주관하는 승려에게 천도할 영혼이 있느냐고 물으면 '있다"라고 답할 것이다.
그런데 천도제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물으면 "영혼은 없다"고 할 것이다.
둘 다 틀렸거나 둘 다 맞다.
천도랑 영혼은 내가 존재하듯이, 중음신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제일의제(第一義諦), 즉 진제(眞諦)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의식의 흐름(+중음신의 변화)일 뿐이기 때문이다.
영혼이 없다고 하는 것도 반쪽의 진실이다.
통념적 차원에서 천도할 영혼은 내가 존재하는 것과 같은 실재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다.
비슷한 질문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 밀린다 왕에게 (다시 말해서 원저자나 편집자에게)
'아는 자'의 존재는 매우 중요한 주제였던 것 같다.
-서정형 역해 <밀린다 왕의 물음> 공간과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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