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자아탐구 실제수행방법 및 이론 정리(76)

무한진인 2023. 1. 2. 22:41

우리가 세 벽이 세 장소, 곧 1인팅, 2인칭, 3인칭을 대표한다고 설명했듯이,

그것이 현재, 과거, 미래의 세 시간을 대표한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현재에 대한 진리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 과거와 미래에 대한 모든 생각을 피하면서 - 현재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통해서도 모든 생각이 가라앉고 '현재'자체가 사라질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지금 이전의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을 우리는 과거로 간주하고,

지금 이후의 한 순간에 일어날 일을 우리는 미래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지금 이전이나 이후의 어느 시간에도 한 순간의 주의를 기울임이 없이

지금 존재하는 그 한 순간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노력하면,

이른바 현재 순간의 백만 분의 1조차도 과거 아니면 미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그러한 극히 미세한 과거와 미래의 순간들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 둘, 곧 과거와 미래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려고 노력하면, 정확한 현재로서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래서 현재라는 시간의 관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 사라질 것이고,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는 자기 존재(Self- existence)만이 뒤에 남게 될 것이다.

 

과거와 미래는 매일 경험되는 현재와 관련해서만 존재할 수 있네.

그것들도 일어날 때는 현재였고, 현재일 것이네.

따라서 (세 가지 시간 중에서) 현재만이 존재하네.

현재의 진리(즉, 그것의 비존재) 를 모르면서 과거와 미래를 알려고 하는 것은

하나(라는 단위의 가치에 대한 인식)없이 숫자를 세려는 것과 같네

- 실재사십송 제15연-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 항상 알려지는 존재자 - 만이 있는데,

시간이 어디 있고 공간이 어디 있는가?

우리가 몸이라면 (몸으로 착각된다면) 시간과 공간에 말려 들겠지만,

우리가 몸인가?

우리는 지금, 그때, 늘 하나이고 여기, 저기, 도처에서 하나이므로,

무시간 무공간의 진아인 우리만이 있다네 !

- 실재사십송 제16연-

 

라자 요가에서는 호흡제어의 압력으로 생긴 힘을 통해, 모든 나디에 편재하는 나'의식을 그 확산의 출발점으로 강제로 되밀어 낸다.

그러나 이것은 폭력적인 방법이다.

다음은 스리 바가반이 가끔 말씀하신 것이다.

"라자 요가에서 하듯이 호흡제어로써 '나'-의식을 강제로 되밀어 내는 것은,

도망간 소를 쫓아가서 때리고 붙들어 외양간까지 강제로 끌고 가 결국 거기에 매어두는 것과 같은 푝력적 방법입니다. 반면에 탐구로써 '나'-의식을 그 근원으로 도로 데려가는 것은, 한 줌의 푸른 풀을 보여주며 소를 꾄 다음, 소를 어르고 어루만지면서 소가 제발로 따라와 외양간으로 들어가게 하여 결국 거기에 매어두는 것과 같이 부드럽고 평화로운 방법입니다. "

이것은 안전하고 즐거운 길이다.

 

라자요가의 호흡제어 방법을 통해 이루어 내는 나다의 휘젖음을 견뎌 내려면 그 몸이 젊고 튼튼해야 한다.

만일 그런 휘저음이 약하거나 늙은 몸 안에서 일어나게 되면, 그 몸이 그것을 견뎌낼 힘이 없어 신경장애, 질병이상 등과 같은 많은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탐구를 통해 그 휘저음이 일어나게 되면 그런 어떠한 위험을 여지도 없다.

 

'진아, 곧 의식에 대한 주의를 붙들고 그 안에 안주하는 수행을 하더니 정신이상이 되었다' 고 말하는 것은 '불멸의 감로를 마시고 그는 죽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네.

- 진어화만 제745연 -

 

탐구의 길에서는 나디에서의 철수가 아무런 긴장없이, 마치 잠이 찾아오듯이 평화롭게 일어난다.

따라서 일부 경전에서 그 목표에는 서른 살 이전에 도달해야 한다고 하는 규칙은 라자요가의 길에만 해당될 수 있고, 스리 라마나의 길인 탐구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심장에서 일어나 전신으로 확산된 '나'의식이 철수할 때 체험되는 그 통로로는 수슘나 나디(sushumna nadi)라고 불린다. 부수적인 사지에 불과한 필과 다리를 고려하지 않을 때, 몸통 안의 척추 기저부(muladhara)에서 머리 정수부(sahasrara)에 이르는, '나'의식이 체험되는 그 통로야말로 수숨나이다.

 

'나'의식이 수슘날을 통해 철수할 때 구도자는 그 경로상의 여섯 차크라가 있는 곳들을 체험할 수 있고,

그런 체험 없이 바로 심장에 도달할 수도 있다.

기차를 타고 델리로 여행할 때 도중에 역들과 경치들을 보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고 즐겁게 잠을 자도 델리에 도착할 수 있지 않는가?

 

그러나 시간과 공간에 속박되는 신들의 여러 이름과 형상들에 대한 과거의 헌신 습으로 인해,

어떤 구도자들은 여섯 차크라와 거기서 나타나는 신들의 환영(幻影), 소리 등을 체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습의 형태를 한 그런 장애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 여행이 즐겁고 어던 별다른 특징도 없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 그런 체험들은 자기 주시 안에서의 놓침에 기인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거기서 일어나는 하나의 2인칭 주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

이것 자체가 진아에 대한 주시를 놓쳤음을 드러낸다!

자기 주시 안에서 놓침이 일어날 여지를 전혀 주지 않는 엄청나게 진지한 구도자들에게는 그런 대상적 체험들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스리 라마크리슈나가 한 다음 답변들은 유념할 가치가 있다.

스와미 비베카난다가 그에게 "다들 환영을 보았다고 말하는데, 저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고 하자,

스승은 "그건 좋지!"라고 말했다.

또 한 번은 스와미 비베카난다가 자신이 수행과정에서 투시력같은 어떤 초능력들을 얻은 것 같다고 말하자, 스승은 그에게 " 한 동안 수행을 중단하라. 그런 것들이 너를 떠나게 하라 !" 고 경고했다.

따라서 이것으로 비치어 볼 때, 그런 체험들은 깨어있음의 부족으로 자기 주시가 방해받은 탓에 도중에 종종 멈추어 진조가 지체되는 사람들만이 갖는 것임이 분명하다.

 

- 스리 사두 옴 지음 <스리 라마나의 길 -

 

                - 2023. 1.1. 새벽,일출 30분전 아차산 정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