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참나상태는 마치 깊은 잠처럼 주체와 대상이 사라져야 한다.

무한진인 2022. 11. 15. 21:31

마두카르 : 명상수련에 관한 질문을 하겠읍니다. '생각'이 떠오릅니다. 자아, 혹은 '나'라는 관념이 그 생각과 자신을 같은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생각이라고 합니다. '나의' 생각은 '나의' 말과 '나의'행동이 됩니다. 그리고 '나의'행동은 '상대방의' 행동이나 그 밖의 다른 사람의 행동과 구분이 됩니다. 나와 다른 사람 사이에 구별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깨어있지 못한 상태에서의 삶'입니다. '깨어있는 삶'은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을 구별할 줄 아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안나말라이 :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찾는 수행을 잘 하고 있다.

 

마두카르 : 제가 이해하는 바를 말해 보겠읍니다.

생각이 떠 오릅니다.이제 '나' 또는 자아가 묻습니다. '누구에게 이 생각이 떠 올랐지?' 대답은, '나에게'입니다.'나'는 다시 묻습니다. '나는 누구지?' '답'은 오지만 언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없고 침묵만이 존재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대답으로 침묵, 혹은 무(無)만이 존재합니다.

 

안나말라이 : 맞다.

 

마두카르 : 제가 계속해서 침묵과 무(無)는 누구에게 나타났는지를 물어야 합니까? 침묵과 무가 나타났을 때, 묻기를 계속해야 합니까?

 

안나말라이 : 밧줄만 있고 뱀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지금 앞에 있는 것이 뱀인지 아닌지를 계속해서 묻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실재하는 것은 밧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마두카르 : 그러니까 누구에게 무(無)가 일어났는지 물을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까?

 

안나말라이 : 그렇다.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다. 침묵과 무에는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없다. 침묵과 무는 그대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그대의 존재이다.

 

마두카르 : 제가 이 질문을 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저의 경우에는 그런 경험을 하는 제가 남아 있읍니다. '나'라는 것이나 '나'라는 관념이 그러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까? 침묵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 경험의 배후에는 여전히 '나'라는 것이 남아 있습니다.

 

안나말라이 : 침묵이나 무에는 '나'라는 관념이 남아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실재하는 삶'이다.

 

마두카르 : 다시 한번 묻겠읍니다. '나'라는 것에 의해 침묵이나 무가 경험될 수 있습니까?

 

안나말라이 : 예를 들어 보겠다. 그대가 자신을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고 해보자. 어느 날 그대는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깨달음은 언제나 그대 곁에 머문다.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그것이 진아이다. 진아를 깨닫는 것은 진아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그대는 마두카르이다. 그러나 자신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이제 그대는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살아 왔다는 것을 깨닫는다.자신이 마두카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전에도 마두카르였다. 그것을 알지 못했을 뿐이다. 그대의 진정한 본성을 알게 되면 더 이상 해야 할 일은 없다. 이제 그대는 자신이 마두카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마두카르는 한 사람만 존재한다. 어떤 식으로 존재하건 그 존재는 단일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단일성 속에서는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없다.

 

마두카르 : 선생님, 저를 위해 한번만 더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고 이러한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나는지를 물으면 아무 것도 없음을 느끼게 되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느끼는 깨어있음만이 있읍니다. 만일 수행을 옳바르게 하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대상으로 느끼는 감각없이 무(無)만 남아야 합니까?

 

안나말라이 : 주체와 객체를 느끼는 자는 누구인가?

 

마두카르 : 접니다. 다음 질문은 '나는 누구냐?'는 것이겠죠. 저의 경우에 그 대답은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무(無)와 침묵입니다. 그 다음에는 '무와 침묵은 누구에게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겠죠. '제가 일어납니다' '나는 누구냐?' '침묵과 무(無)입니다' 저는 마치 자기 꼬리를 물려고 하는 개와 같습니다. 이 악순환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저는 어떻게 수행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까?

 

안나말라이 : 그대는 마두카르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을 깨달았다면 어째서 자신이 마두카르라는 말을 되풀이하는가? 마두카르로 존재하라! 그대는 마두카르이다. 그대가 마두카르라는 것을 안다면 그대는 마두카르이다. 자신의 진아인 침묵과 무를 깨달았다면 그대는 진아이다. 그 순간부터 진아 이외의 모습이 된다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그대는 다름아닌 진아일 뿐이다.

 

마두카르 : 자꾸 잊어버리게 됩니다.

 

안나말라이 : 잊는 것은 누구인가?

 

마두카르 : 접니다! 나는 누구냐는 물음을 통해 '나'라는 것은 사라지고 무와 침묵만이 남습니다. 저는 이제 실제로는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수행은 실제 저의 모습인 침묵과 무로 돌아가게 해 주었읍니다.

동굴 속에 앉아서 가족과 직업을 가진 사람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수행에 쏫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명상가들은 깨달음을 얻을 가능성이 많습니까?

 

안나말라이 : 사람들은 진정한 자신의 본성을 깨닫지 못한다. 진정한 자신의 본성은 이미 존재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노는 동안 어떤 사람은 직장에 다닐 것이다. 그가 무엇을 하건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마치 동굴 속에 사는 것처럼 그대의 진정한 본성 안에 머물라. 외면의 세계와 내면의 세계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마두카르 : 앞서 하던 이야기로 돌아갔으면 합니다. 그러한 무에 촛점을 맞추고 다음의 생각이 떠 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바람직합니까, 아니면 이러한 무가 누구에게 일어났는지 계속 물어야 합니까?

 

안나말라이 : 만일 그대가 그러한 텅빔 속에 영속적으로 머물수 있다면 어떤 생각도 떠 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상태에 머무르려 하지 않으면 어떤 것이 다가와 그대를 잡을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 그대는 묻기를 계속해야 한다. 만일 그대가 밧줄만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언제나 이해하고 있다면 뱀이 생겨날 리가 없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만일 그대가 물로 주전자를 채우고 더 많은 물을 주전자에 부으면 그 물은 주전자에 담기지 않는다. 그처럼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면 더 이상 알아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자신의 진아를 아는 사람은 이미 채워져 있다.

 

마두카르 : 잠에서 깨어나면 '나'라는 관념, '나'라는 느낌이 '나'라는 조용한 감각 뒤에 언제나 존재합니다. '나'라는 의식 같은 것입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나'라는 관념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들어 옵니다. 저는 자신이 육체이며 마음이라고 믿는데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저는 '나'라고 부릅니다. 그 때문에 늘 '나'라는 관념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언제나 의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느낌만은 항상 존재합니다.

 

안나말라이 : 누구에게 '나'라는 관념이 생기는 것인가? 누가 잠자는가? 우리는 모두 졸고 있다. 오직 성자만이 졸지 않고 있다.

 

마두카르 : 알겠습니다. 다르게 물어 보겠읍니다. 정확한 질문을 하기가 어렵습니다만 노력해 보겠읍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제가 느끼는 '나'라는 관념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제가 '나'라는 느낌을 갖게 되는지를 묘사한 것입니다. 잠에서 깨면 마치 '나'라는 느낌이 곧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생각이 듭니다. '나는 커피를 한잔 마시고 싶다.' 마치 '나'라는 생각과 커피 한잔을 원하는 생각이 함께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것이 '나의' 생각이 됩니다. 맞습니까?

 

안나말라이 : 누구에게 이런 모든 일이 생겨나는가? 어떤 생각이 일어나든지 그대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그들의 생각은 그들 자신에게서 비롯된다. 우리는 이런 생각들이 그저 생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에도 같은 종류의 관점을 대입할 수 있다. 어떤 생각이 떠오르든지 그 생각은 나 자신이 아니다. '진정한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진정한 나'는 생각과는 어떤 관련도 없다. 생각으로부터 자유롭니다. 우리는 깊히 잠들었을 때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것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다.

 

마두카르 : 그러한 생각은 '저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입니까? 생각이란 그저 떠올랐다 사라지는 것입니까?

 

안나말라이 : 생각들은 깨어 있을 때나 꿈을 꾸고 있을 때만 나타난다. 그것이 진정한 자신의 것이라면 그것은 깊은 잠이 들었을 때에도 나타날 것이다. 깊은 잠을 잘 때도 생각이 들어 오는가?

 

마두카르 : 그렇지 않습니다.

 

안나말라이 : 잠은 기적이다. 잠 잘 때는 생각이 없다. 마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이 작동하면서 육체도 존재하게 되고 모든 것이 다시 생겨난다. 그렇지만 진정한 그대 존재에 영향을 줄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대는 이 모든 것이 그대의 진아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도 역시 나 자신이다. 모든 것이 나 자신이다.

우리는 금으로 수많은 종류의 장신구를 만든다. 그 장신구들은 모두 다른 모양을 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금이다.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육체가 진정한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진아를 깨달은 사람들은 모든 것이 자신의 진아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사람에게는 탄생과 죽음의 순환도 없고 순환으로부터의 자유도 없다. 환상의 세계도 없으며 자아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진아이다. 이러한 상태가 '완전히 깨어있는 잠'의 상태이다. 모든 것이 진아이다. 진아에는 어떤 문제도 없다. 마치 몸 속에 여러기관이 있지만 그 기관들이 어울려 하나의 육체를 이루는 것과 같다.

 

마두카르 :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저의 질문이 의미없는 것이 되었읍니다.

 

안나말라이 : 모든 자물쇠에는 열쇠가 있다. 나는 네명의 유명한 학자들이 라마나 마하리쉬를 찾아왔던 일을 기억한다. 그들은 예순세가지의 질문 목록을 가지고 왔다. 목록은 매우 길었다. 그들은 그 목록을 마하리쉬에게 넘겼다. 마하리쉬는 목록을 보았다. 모든 질문을 읽은 그는 학자들에게 이 질문이 누구에게서 나온 질문이냐고 물었다. 그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 보앗다. 그러더니 나를 보고 다시 마하리쉬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 이 질문의 답은 무엇입니까?"

마하리쉬는 말햇다. "모든 질문에는 하나의 대답이 있다. 질문과 대답이 일어난 그 사람은 누구인가? 질문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대가 이것을 알면 모든 질문은 한 순간에 대답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 모든 질문이 완전히 풀린다." 라마나 마하리쉬의 말을 들은 학자들은 고요해졌고 평회로워졌다.

마하리쉬의 이러한 가르침은 브라흐마스투라, 즉 최상의 무기라고 불린다. 그러한 무기는 다른 모든 무기를 무찌를 수 있다. 만일 그대가 갑옷을 입고 있다면 어떤 것도 그대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갑옷은 최상의 갑옷, 브라흐마 코삼이라고 한다. 따라서 그대가 자신의 진아라는 갑옷을 입고 진아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면 어떤 고통이나 사념도 그대를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대를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대는 평화로울 것이며 그 평화는 축복의 평화가 될 것이다. 마하리쉬는 특별한 가르침을 되풀이 하곤 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다른 사람은 나를 부러워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나보다 작은 이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것보다 더 못하다."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자아를 전혀 갖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종류의 겸허함을 지닌 사람만이 진아를 깨달을 수 있다. 자아를 갖지 않은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위대하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되므로써 진아만이 남게 된다. 진아가 됨으로써 개인은 전체가 된다.

언젠가 라마나 마하리쉬께서 시킨대로 아슈람의 건물을 짓는 작업을 마치고 돌아 갔을 때, 스승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한 일을 되돌아 보지 말라!" 그 순간 이후로 나는 이러한 태도로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이러한 태도로 모든 일을 했다.

 

슈리 안나말라이 아슈람에서 또 한 차례의 만남을 가졌다.

이번 만남에는 안나말라이 스와미와 순더람만 있었다.

 

마투카르 : 지난번 방문에서 저는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 수행에 대해 지도를 받고자 했습니다. 이번에는 좀 더 여쭙고자 합니다.

 

안나말라이 : 주저말고 물어보라.

 

마두카르 : 지난번의 질문을 되풀이하게 될 것 같습니다. 괜찮습니까?

 

안나말라이 : 질문해라.

 

마두카르 : 제가 아루나찰나에 도착했을 때,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는 저의 수행은 이런 방식을 따르고 있었읍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누구에게 이런 생각이 일어나지?'

대답은, '나에게'

질문은, '나는 누구지?'

대답은,'공(空), 무(無)' 이 대답은 언어로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의 느낌으로 일어납니다.

질문, '누구에게 이런 공이 일어나지?'

대답, '나에게'

질문, '나는 누구지?'

대답은, '공,무'

그리고 다시 질문과 대답이 꼬리를 뭅니다. 빠져나갈 방법이 없습니다. 제가 말한 대로 이 상황은 꼬리를 물려고 맴도는 개의 경우와 비슷합니다.

아루나찰나에서 한 달을 머무른 이제는 '나는 누구냐'는 질문의 대답이 변한 것 같읍니다. '나는 누구냐?'는 질문 속의 '나'라는 것이 고요하며 어디에나 퍼져 있는 '나'로 존재합니다. '나'라는 것은 어디에나 있고 모든 것 속에 있읍니다. 이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읍니까?

 

안나말라이 : 그것이 진정한 '나'이다.

 

마두카르 : 어떤 때는 '나'라는 것이 모든 것 속에 퍼져 나가는 느낌이 다른 때보다 더 강합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안나말라이 : 누구에게 그 느낌이 더하고 덜한가? (웃음) 여기에는 '더'라는 것도, '덜'이라는 것도 없다.

 

마두카르 : 이러한 '나'에게는 선도 악도 없습니다. '나'이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안나말라이 : 마하리쉬와 함께 지내는 동안에 선이나 악이라는 이야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 판단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 판단할 수 없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받아들일 뿐이다.

 

마두카르 : 선생님은 '나'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셨읍니다. 그리고 제가 말씀드린 '모든 것에 퍼져 있는 나'라는 것이 진정한 '나'라고 하셨읍니다. 그것이 진정한 '나'라는 것을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아나말라이 : 진정한 '나'로 머무르지 않으면 자신을 육체나 마음으로 생각하게 된다. 육체나 마음이 진짜처럼 보인다. 그래서 진정한 '나'로 확고하게 자리 잡을 때까지 진정한 '나'에 머무르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명상의 결론은 그대의 진정한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다. 사실은 아무도 명상하고 있지 않다. 모든 것이 진아이다.

 

마두카르 : 그러한 상태는 '상태'가 아닙니다. 따라서 '저의 상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상태는 경험하는 주체가 사라진 상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안나말라이 : 이 상태에서 그대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아무 것도 잊지 못한다. 그대는 자신이 마두카르라는 것을 생각하지도 기억하지도 못한다. 자신이 마두카르라는 것을 느낀다면 그대는 평소의 자신으로 되돌아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진아에 대해 명상해야 한다. 자신의 육체나 마음에 대해 명상해서는 안된다. 진아 속에 자리 잡으면 진아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된다.

뱀과 밧줄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보라. 뱀이라는 착각이 있을 때, 진리는 드러나지 않는다. 밧줄이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는다면 그것을 없앨 필요도 없게 된다. 모든 이념과 방법은 진리가 아니다.

 

마두카르 : 밧줄이 밧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질문할 필요도 없겠지만 밧줄이 벰으로 보이면 질문이 나온다는 뜻입니까?

 

안나말라이 : 마하리쉬의 노래를 인용하겠다.

"나는 사람이다. 내가 사람인 것을 알았는데 내가 사람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어디 있나? 그러나 나를 다른 것으로 생각하면 먼저 내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을 사람으로 생각하여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다른 것이라라고 생각하는 착각을 없애야 한다. 수없이 많은 전생에서 비롯된 잠재된 경향은 깨달음에 녹아드는데 장애물이 된다. 이러한 경향은 진리를 가리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묻는 수행이 필요하다. 이일이 누구에게 생겼는가를 계속 물어야 한다. 그러한 수행이 전생에서 비롯된 잠재된 경향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집안에 빛이 비치면 어둠은 들어올 수 없다. 마찬가지로 명상을 수행하면 전생에서 비롯된 경향은 남아 있을 수 없다. 계속되는 명상은 강물의 흐름과 같다. 강물의 흐름은 모든 장애물을 씻어 버린다. 깨어있음이 끝없이 흘러내리면 과거의 습관은 들어 올 수 없다. 끊임없는 명상이 바로 이와 같다."

 

마두카르 : 어떤 상황, 어떤 순간에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는 수행을 계속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까? 황홀경의 순간에도 이러한 축복과 황홀경이 누구에게 일어나는지 물어야 합니까?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물어야 합니까?

여러 해 동안 저는 영속적인 축복감을 경험하는 것이 곧 진아를 경험하는 것이라고 이해해 왔읍니다. 축복감이든 고통이든 '나'에 의하여 경험됩니다. 그 양쪽은 같은 차원에서 경험됩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행복과 불행을 넘어설 수 있습니까?

 

안나말라이 : 마음 차원에서는 상반되는 것들이 존재한다. 고통과 즐거움, 행복과 불행은 마음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진아에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보자. 눈을 가졌기 때문에 그대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눈을 통해 자신의 눈을 볼 수 없다. 눈을 볼 수 없다고 해서 눈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대는 눈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진아는 그와 같다. 그대는 대상으로서의 진아를 볼 수 없다. 그러나 그대 자신이 진아이다. 진아가 되는 것이 지혜의 길이다.

 

마두카르 : 방금 말씀하신 내용을 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되는 것이 지혜의 길이라고 하셨습니까?

 

안나말라이 : 진아가 되는 것이 진아를 아는 길이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더 이상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때 그대는 언제나 '그것'이다. 그대는 자신이 진아와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착각이다. 그러한 차이를 없애주는 것이 수행이다.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그대와 진아의 구분은 사라진다. 모든 것은 하나이다. 모든 것은 근원의 하나이다. 모든 것은 하나의 진아이다.

 

마두카르 : 축복과 고통은 진아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꿈처럼 지나갑니다. 깨달은 단계에서 축복과 고통이 일어나지만 그저 바라보며 동일시 하지 않습니다. 맞습니까?

 

안나말라이 : 궁극적으로 그대는 어떠한 것도 둘로 나눌 수 없다. 모든 것은 진아이다. 육체를 예로 들어보자. 육체 전체가 그대의 것이다. 두 다리도 그대의 것이고, 두 손과 두 눈도 그대의 것이다. 육체의 생활에서 행복과 고통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 양쪽을 평등하게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갓난 아기는 행복과 고통을 구분하지 않는다.

 

마두카르 : 우리는 마치 카메라의 필름과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합니까? 렌즈가 열리면 필름은 그 앞에 나타나는 것을 기록합니다. 필름에게는 행복과 불행 사이에 차이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같습니다.

 

안나말라이 : 마음은 눈의 카메라를 통해 사진을 찍는다.

 

-마두카루 톰슨 지음 <내가 만난 스승들, 내가 찾은 자유>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