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상을 가지고 나타나는 어떤 것이든 우주가 해체될 때에는 모두 파괴됩니다.
오직 진아의 참된 모습(스와루파,진아성품)만이 영원히 존재합니다.
모든 것의 본질이며, 영원한 것은 거짓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구적으로 변함이 없고, 모든 것에 골고루 펼쳐져 있습니다.
"신(神)의 성품"은, 또한 "진아의 참성품"이라고도 부릅니다.
이것 외에도 수많은 다른 이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어진 설명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그 이름이 임시로 사용되지만,
진아의 상태나 본질은 항상 그 이름을 너머서 있습니다.
진아는 모든 사물의 내부와 외부에 전체적으로 충만해 있지만,
이 눈에 보이는 현시세계에서는 내면 속에 숨겨져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과 너무나 가깝게 있어서,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신(神)에 대하여 들으면, 신을 보고 싶은 열망이 생깁니다.
하지만 신을 보려고 하면, 모든 곳에서 눈에 보이는 현상들만 보입니다.
그것을 보려고 할 때는 오직 눈에 들어오는 대상들만 나타납니다.
이런 식으로 보이는 것은 사람이 어느 정도의 만족감을 느끼겠지만,
이것이 신(神)의 진실한 시야(視野)가 아닙니다.
눈으로 보여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파괴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파니샤드에서는 눈으로 보여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신의 참성품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진아 성품은 형태가 없고,상상할 수도 없으며,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나 나타난 것들은 모두가 환상이며 비실재(非實在)입니다.
베단타 과학에서는 모양을 가진 것은 무엇이든지 파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눈으로 보려고 할 때는 무엇이든 외양(外樣)만 보입니다.
실재(實在)는 보이는 것 그 너머에 있습니다.
진아 체험을 통해서 보면,
눈에 보이는 모든 대상들의 내면과 그것을 너머서,
전체에 두루 편재(遍在)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상상할 수 없고, 보이지도 않으며, 속성이 없는 것에 대해 어떤 묘사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진정한 성품은 그 자체가 여러분과 가장 가까운 것임을 이해하십시오.
만물이 공간 안에서 나타나고, 공간이 만물 안에 스며 들듯이,
마찬가지로 우주의 신(神)은 모든 것의 안과 밖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신의 참성품은 물 속에 있어도 젖지 않고,
땅 속에 있어도 낡아지지 않으며,
불 속에 있어도 타지 않습니다.
그것은 수렁 속에 있지만 빠지지 않고,
공중에 있지만 날지 않으며,
황금 속에 있지만 금장식품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 속에 펼쳐져 있지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분리될 수 없는 일체(一體)에서 분리와 차별을 일으키는 것은 자존심 혹은 에고라고 부릅니다.
이제, 이 에고(자존심)의 성질에 대한 어떤 특징들을 쉽게 알아 볼 수 있게 말해 보겠습니다.
이 설명을 주의깊게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에고는 마치 경험의 한 부분인 것처럼 실재(實在) 앞에 다가가서,
그 특별한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말을 하려고 합니다.
에고가 "내가 지금 실재(實在)다"라고 말합니다.
그 자체가 에고(자존심)의 행태입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무형(無形)속에서, 지금까지 없던 '구별'을 만들어 냅니다.
"내가 브라흐만이다"라고 말하는 그런 것이 에고(자존심)의 망상(妄想)입니다.
이것은 가장 미묘한 시각으로 보면 아주 분명해 집니다.
에고의 상상력은 욕망과 의도(목적)를 가져 오지만,
반면에 실재(實在)는 상상력을 초월해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한(無限)한 것에 대한 경계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논리적 순서로 진행되는 설명과 상상적인 추측들은 모두 말의 분별 영역 안에 있습니다.
"말없는 침묵"에 대한 안목(眼目)이 내적으로 추구 되어야 합니다.
먼저 단어의 명백한 의미를 파악한 다음,
단어에 의해서 가리키는 '그것'을 인식합니다.
일단 단어에 의해 표시된 '그것'이 보이면,
겉으로 나타났던 (말의) 의미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브라흐만이다." 와 "순수한 브라흐만"과 같은 문구들은
더 깊은 의미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문구들일 뿐입니다.
그러나 일단 가리키고 있는 '그것'을 발견하게 되면,
말의 의미 그 자체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과 "순수"는 말로만 존재하는 브라흐만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일 뿐입니다.
가리키고 있는 '그것'에 사람의 주의가 집중되면,
두 가지 개념(모든 것이 브라흐만이고, 브라흐만이 순수하며, 어떤 '것'에 의하여 오염되지 않는다는 것)이 사라집니다.
가리키고 있는 '그것'은 반드시 체험해야 합니다.
여기서 가리켜 보이려고 말하는 내용은 아무 소용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 "주된 원리"를 체험하게 될 때에. 말하고 싶은 욕구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네 가지 유형의 말(소리의 내적인 영감, 심장 수준의 소리, 목 수준의 소리, 실제로 큰 목소리의 말)이 모두 사라질 때, 단어를 구사하는 기술과 또렷한 내용의 문장이 있을 어떤 장소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말은 발생하는 순간에 저절로 사라집니다.
언설이 어떤 영구적인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은 실제의 경우이며, 이 사실을 관찰하기 위한 증거가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말은 참으로 사그러지기 쉬우므로, 따라서, 모든 의견과 논쟁은 사라질 것입니다.
"모든 것이 브라흐만이다." 와 "순수한 브라흐만"과 같은 개념은 실제 체험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체험의 징표를 들어 보십시오.
그 체험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의미합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는 "하나됨"의 징표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다른 것(他)이 없음'은 다른 어떤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의미합니다.
자기 순복 속에서는 모든 집착이 깨지고, 진아 그 자체 만이 홀로 남습니다.
진아에게는 분리된 개인이라는 느낌이 없습니다.
이것은 무심(無心)이 그 징표입니다.
이 문장들은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사용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것이 말로 표현될 수 있습니까?
성인들의 위대한 큰 말씀(mahavakvas)에 대한 설명을 들음으로써 쉽게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실재(實在)에 대한 설명을 들음으로써, 속성없는 브라흐만을 찾아내야 합니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참구해 보아야 합니다.
말없이, '그것'에 대한 의미 속에 녹아 있는 동안에,
그 의미에 대하여 몇번이고 반복해서 사고(思顧)하면서 깊게 들어가야 합니다.
따라서 말의 부재(不在)는 위대한 성인들의 장엄(莊嚴)입니다.
말이 침묵이 되었고, 베다 경전은 "이것도 아니다, 이것도 아니다."(neti,neti)라고 하며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이제 실제적인 진아 체험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만약 체험을 얻은 후에도 계속 상상과 추측에 빠져 있다면,
이것은 완고한 자존심이 남아 있다는 징표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나는 무지하다, 나는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신에,
"나는 허상이고, 나의 말은 거짓이며, 나의 행동과 걷는 것도 거짓이다.
'나'와 '내것'이라는 것은 거짓이고, 모든 것도 거짓이다. 모든 것은 상상에 불과하다.
'나'와 '내것'을 위한 장소란 전혀 없으며, 내 모든 언설(言說)은 완전히 무의미하고,
이 모든 것이 환상이라는 현상계의 성질이며, 현시된 모든 만물은 가짜일 뿐이다."
라고 말해야 합니다.
발현(發顯,Prakriti,만물이 나타나게 하는 점)과 발현 이전의 원초적 존재(Purusha)는
둘 다 사라질 수 밖에 없는데 어떻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남지 않고 모든 것이 사라진 곳에, 어떻게 어떤 것이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침묵한다"고 말하는 것은 침묵을 깨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침묵을 깨지 마십시오.
움직이되, 아무 것도 하지 마십시오.
존재하되, 어떤 것으로써 남아있지 마십시오.
이것은 분별력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승과 제자와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