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실천(정신수행)에 대하여
영적 실천(정신수행)의 수립에 대하여
만약 우리가 실재(實在)라는 것을 생각하려고 애쓴다면,
그것의 본질이 어떤 상상이나 개념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파라브라만은 어떤 상(相)도 없습니다.
상상을 하려고 계속 노력을 할지라도 상상력으로는 알려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각 속에서 찾을 수도 없고, 찾을려고 애쓰면 더욱 더 혼란스러워질 뿐입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거나 마음에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도 않고 마음에 나타나지도 않는 것이 어떻게 인식될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것을 보려고 애쓴다면, 그것은 형태가 없고, 마음에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무(無)를 상상하려고 할 때, 사람들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고 느낍니다.
상상 속에서 수행자는 그것을 검은 색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브라흐만은 검은 색도, 노란 색도, 빨간 색도, 흰색도, 파란 색도 아닙니다.
그것은 무색(無色)입니다.
어떤 색깔도 없고, 모양도 없고,
형태도 없는 것을 어떻게 인식합니까?
그것이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인식될 수 있습니까?
얼마나 오랫동안 그것을 보려고 해야 합니까?
그런 노력에 지쳐버릴 뿐입니다.
궁극의 절대 존재는 속성이 없으며 모든 속성을 초월해 있습니다.
그것은 보이지도 않고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생각의 능력을 넘어서 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생각을 초월해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습니까?
속성이 없는 것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습니까?
눈으로 보여질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마음에 알려질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찾을 수 있습니까?
속성이 없는 것을 어떻게 볼 수가 있겠습니까?
절대 실재(實在)인 파라브라만은 비원성입니다.
그것을 상상하려고 애쓰면 이원성이 생깁니다.
원인과 결과를 가지고 설명을 하려고 한다거나,
현상세계에서 취해온 다양한 직유(直喩)나 예시를 활용하여
그것을 말하려고 하는 동안에는 아무 것도 적용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을 만나려고 애쓰지 않으면, 그것을 만납니다.
만일 그것을 만나려고 애쓰면, 분리감의 느낌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로운 침묵으로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얻을 수 없고,
그것을 벗어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그것은 떠나지 않습니다.
그것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은 결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볼려고 노력하면, 그것은 마치 거기에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을 보려고 노력하지 않고도, 그것은 있는 그대로 모든 곳에서 그대로 빛나고 있습니다.
그것을 성취하려고 의도적으로 하는 어떤 수단도 방해가 되며,
어떤 수단도 시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 성취가 된다면,
어떻게 실제적인 체험없이 알려지고 이해될 수가 있겠습니까?
이해되지 않음에 의해서 이해하게 됩니다.
사람이 이해했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이해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음의 특정 자세가 없으면 마음의 태도나 변성이 없는 '그것'에서 안정되게 자리 잡습니다.
명상 속에서는 그것을 붙들 수가 없고,
생각으로도 그것에 대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절대 실재(實在)는 마음에 담겨질 수가 없습니다.
백조 왕(라이 한사)이 된 비슈누 경은 브라흐마에게 지혜의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 책은 '우주의 제왕'그 자신이 직접 전해준 한사기타라고 부릅니다.
현자 바시슈타는 요가 바시슈타(마하라마나야)에서 라마 경에게 그의 가르침을 전했고.
크리슈나 경은 바가바트 기타에서 아르쥬나에게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은 진인들 설명의 강력한 힘에 기초해서 진아지(眞我知)가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은 착각(오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비이원적인 지혜가 없는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지성을 표현하는 세샤의 능력은 지쳐버렸고,
우파니샤드는 지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진아 모습을 설명하려고 애쓰다가 그만 침묵상태로 빠져버렸습니다.
듣고 있던 제자가 "어떻게 '나'와 '내것'에 대한 자만심을 버릴 수 있습니까?
브라흐만의 체험을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성취감에 도달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나'라는 느낌 속의 자만감을 버리십시오.
브라흐만이 되면 그것을 체험합니다.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면 성취감에 도달합니다.
덧붙여서, '나'라는 어떤 개인적 느낌없이 정신수행에 임한다면 성취감을 얻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진실로 성취로 인한 축복을 받습니다.
브라흐만에게는 그러한 개념들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만일 사람이 어떤 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개념에 그대로 집착하고 유지하려는 습관이 있습니다.
따라서 수행자는 그런 개념이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려서, 그 개념을 보자마자 바로 내버릴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현자인 것입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에 따라 경험하게 됩니다.
아무런 개념도 없는 "그것'을 명상할 때, 개념화 그 자체가 사라집니다.
자신이 육체로 존재한다고 생각할 때에만, 정신수행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육체가 아니라면, 정신수행을 포기한다는 문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정신수행도 없고 육체도 없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브라흐만이 육체 속에 깃들어 있긴 하지만, 몸이 없이 있습니다.
정신수행을 계속 하지 않고, 브라흐만에 대한 지식만을 가질 때,
육체에 대한 애착과 게으름이 브라흐만의 깨달음이라는 이름으로 발전합니다.
영성(靈性)이라는 이름으로 이기심에 빠지기도 하고,
명상이라는 이름으로 실재(實在) 속에 잠드는 것으로 선전하며,
해탈이라는 이름으로 통제할 수 없는 악행과 방종으로 가득찬 행동을 합니다.
해설이라는 이름으로 비판이 일어나고,
대화라는 이름으로 논쟁이 일어나며,
자기 이름에다 부제(副題,지위,계급등))를 덧붙여서 스스로 자만심을 크게 키읍니다.
그런 사람은 " 무엇을 해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하며,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하며, 무엇을 떠나야 합니까? 공간은 어디에나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나의 진아로 가득차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만을 그대로 들여다 보자면, 마치 자신의 무기로 자신을 때리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치유는 해를 끼치게 되고,
정신수행의 실천을 게을리 함으로써 자신에게 최선의 관심사는 고통을 주게 됩니다.
모든 정신수행을 포기하게 되면 자유라는 이름에게 속박됩니다.
그런 사람은 정신수행을 실천하면, 자신이 스스로 성취한 영적인 단계의 지위를 잃게 될까봐 두려워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런 사람은 어떤 규칙적인 정신수행의 실천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정신수행을 하는 사람은 단지 초기 열망자일 뿐이라고 말할까봐 두려워하며,
이에 대하여 수치심을 느낍니다.
그는 브라흐마와 다른 신들도 정신수행을 한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이제 그런 무지(無知)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 하겠습니다.
깨달음은 규칙적인 탐구와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공부를 함으로써, 우리는 원초적이고 완전한 브라흐만을 깨달을 수가 있게 됩니다.
- <스승과 제자와의 대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