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속박이라는 생각은 오직 무지한 상태에서만 존재한다(총합)
- 싯따르메쉬와르 마하리지의 다스보드 제 9강
제9강 주제 : 자유와 속박이라는 생각은 오직 무지한 상태에서만 존재한다.
본성은 따로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자유나 속박이 아니다.
- [다스보드 7장 6절 52문장]
해방과 속박에 대한 생각은 무지한 상태일 때만 존재합니다.
본래의 자성은 따로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구속도 자유도 아닙니다.
속박과 해방의 문제는 오직 무지에 싸인 인간이 육체를 자신으로 여기고
자신의 모든 행동에 대해서 행위자라고 가정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진아 깨달음은 "활동없음(無活動)"을 의미합니까?
그렇다면 자나카왕이 깨달은 뒤에도 왕국을 다스렸을 때 모든 것을 버렸습니까?
슈카(위대한 성자)와 다른 사람들도 진아를 깨달았다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철학 서적을 썼을까요?
우리가 "해탈" 또는 '자유롭다'는 것은 움직임없는 것(不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가정해 봅시다.
통나무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이 브라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면,
슈카와 바마데바(또 다른 성자)는 시체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슈카가 바그와트를 빠리크시타 왕에게 가르칠 수 있었겠습니까?
스승이 설교할 때는 다양한 논거를 제시하고 명료한 설명이 필요하게 됩니다.
만약 그렇다면 움직임 없이 어떻게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설교한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는 뜻입니까?
그가 궁극의 실재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움직임 없는 사람은 자동적인 자각(自覺)이 되지 않습니다.
궁극의 실재에 대한 지혜는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 얻어집니다.
깨달은 사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누가 이 지혜를 남들에게 전해 주겠습니까?
깨달은 이들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해탈의 세 가지 범주,
즉 (1) 지반묵타(Jeevan Mukta )(2) 비데하 묵타(Videha Mukta) (3) 니타바 묵타(Nitya Mukta)가 있습니다.
지반묵타(Jeevan mukta)는 자신이 누구인지 완전히 의식하면서도 세속적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비데하 묵타(Videha mukta()는 브라만을 이해하고 동일시하여 그대로 보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쓰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 외에도 니트야 묵타(Nitya mukta,Nitya - 영원한)가 있으며,
이들은 절대진아(Parabrahman)가 된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갑자기 '체험'을 하게되면 그냥 조용해집니다.
움직이지 않거나 의식이 없다는 것은 몸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브라만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의식이 일어나게 되면 다시 육체의식을 얻습니다.
그는 '이것이 참나다, 나는 브라만이다'를 이해하고 그렇게 머뭅니다.
아트만은 속박이나 해방 너머에 있습니다.
육체 의식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결코 해탈할 수 없습니다.
브라흐마 신이나 다른 신들도 육체 의식 속에 남아 있으면 결코 해방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잠시 자유롭다가 다음 순간에 묶인다."
이것이 브라만(Brahman)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 사람의 상태입니다.
속박과 해방을 말하는 사람들은 프라크리티(환상의 성질)만을 이야기합니다
진리나 진아의 본성은 스스로 자명(自明)합니다.
그곳에서 속박과 해방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속박 당했다고 말하는 이는 이 세속의 바다 속에 사는 물고기이고,
해방됐다고 말하는 이는 세속의 바다 속의 악어입니다.
자신이 해방되었다는 생각의 형태로, 돌로 자신을 묶은 사람은 지옥으로 갈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는 여러 가지 죄와 행실을 범하여 구속되어 있었으나,
이제 나는 자유로워졌다"고 말하는 이는 세속존재의 바다 깊숙한 곳까지 바로 갑니다.
그는 큰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실재'에 대한 지혜를 가진 사람들 - 깨달은 이들(Dnyanis)은 그런 사람들을 바보로 취급합니다
죄를 지을 때조차도 그는 진아가 되어 있었지만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이제 자기를 안다고 말한다면 뭐가 그리 대단합니까.
이 이원성이 그대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는 예전에도 그랬듯이 여전히 찾고 있는 것입니다.
나'와 '너'의 개념에서 자유로운 사람만이 진정으로 해방됩니다.
라우(Rahu)와 Ketu(케투)에서 "후(hu)는 '나(I)'이고 '투(Tu)'는 '너(you)'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개념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여전히 어두운 상태입니다.
자신의 본성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저 육체를 초월해 있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 외의 사람은 몸과 동일시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속박 당하고 있는 것은 몸입니다.
만약 자기가 육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속박이 어디 있겠습니까?
'진리'에 대한 가장 순수한 지식을 깨달은 사람은 속박되고 자유로워지는 것이 모두 농담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라크리티(환상)가 사라지거나 이름과 형태가 끝나면 모든 단어가 침묵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방'과 같은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해방'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지 말하는 방식일 뿐입니다.
모든 속박은 자신이 몸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있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나'라는 느낌에서 자유롭습니다.
그에게 속박과 해방은 망상일 뿐이고, '구속'과 '해탈'은 개념일 뿐입니다.
개념은 결코 실재하지 않으며, 마야(환상)를 이해한 사람은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납니다.
"나는 브라만이 된 후에 요가를 수련할 것이다 - 즉 나는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신기루에서 물을 찾으러 가는 사람과 똑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기루 속을 들어갔다 나왔다 합니다.
신기루를 실재한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것에 속박됩니다.
깨어난 사람에게는 꿈이 사라집니다.
같은 방식으로 깨달은 사람은 환상의 형태인 이 신기루가 사라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자신의 본성에 관한 한, 육체와의 관계는 그 자체가 실재하지 않습니다.
생각 너머에 있는 상태를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브라만에 관한 한, 명상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무언가를 보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만약 참나를 보거나 생각할 수 없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만약 사물에 대하여 사색하면 그 사물을 알 수 있습니다.
진아의 본성은 마음의 수준까지 끌어내리고 싶어도 불가능합니다.
자각의 본질을 버리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감각으로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진리는 개념을 초월해 있습니다.
명상을 시작할 때, 삼요소(보는 자, 보는 대상,보는 작용)가 만들어집니다.
다른 모든 대상과 감각은 우리에게 낯설지만 우리가 진리 자체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명상은 불가능합니다.
더군다나 명상을 포기하면 큰 의심이 우리를 압도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무엇이 영원하고 무엇이 일시적인 것인지,
무엇이 참나이고 무엇이 참나가 아닌지에 대해 생각하고 숙고한다면, 진리가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또한 몸도 아닙니다.
베다, 경전, 달, 태양 - 우리는 이들 중 어느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우리가 누구인지 찾아내야 합니다.
'그대가 그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당신'이 누구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나'라는 말은 '내면에서'에서 나온 말이므로,
당신은 그 내면 안에 있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원인체라 하고, 무지(無知)라고도 합니다.
물질적 육체보다는 미묘체에 더 많은 행복이 있습니다.
물론 원인체에도 행복이 있습니다.
만약 모든 것을 버리면 모든 것을 버린 자만이 남습니다.
남은 자가 주시자입니다.
이것은 오직 각성(아는 능력).
즉 절대자각의 징표만이 남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존재-의식-지복'(Sat-chit-ananda)입니다.
잠자는 동안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경험하거나 본 사람은 누구입니까?
정답은 진정한 '나'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잠자는 동안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경험을 했습니다.
존재-의식-지복은 네 번째 몸입니다. 그가 신입니다.
잠자는 동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마음의 도움 없이도 알 수 있습니다.
그 "내가 있다" 에 홀로 그대로 있으면 ,
'내가 있다' 라고 말하는 마음의 변상도 휴식 속에 가라앉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변형되는지는 볼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그것을 잊으면 그때만 기억하면 됩니다.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불가능한데,
그래서 그것에 대하여 개념적으로 사색(생각)하는 수행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수행자는 마음에 아무 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조언대로 명상해야 합니다.
마음에서 가져오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야 하고,
마음에서 알려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에는 두 가지가 나타나는데,
하나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에 떠오르는 내용물입니다.
우리가 어떤 다른 대상을 경험해야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대상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이기 때문에 본래부터 '그것일 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나머지 모든 대상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있는 그대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따로 기억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잊은 경우에만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래 성품은 기억과 망각을 초월해 있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치 밤에 잠을 자는 것과 같습니다.
기억에 떠오르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라져 버립니다.
즉 금방 잊어지기 마련입니다.
이 몸과 의식 덕분에 존재의 바다가 휘저어져서 열네 번째 보석인 베단타가 추출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생명의 감로입니다.
파라브라만은 자연상태, 즉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없이 처음부터 존재합니다.
이것은 자명합니다.
그 자연상태에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합니다.
생각(개념)이 생기자마자 이원성이 생깁니다.
우리 자신이 진리 자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인가를 상상하는 즉시 분열됩니다.
어릴 때에 구슬놀이를 하던 시절에 앎(아는 힘)이었던 것은 무엇이든지 지금과 똑같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 기억(생각) 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잊는 것이 그것을 기억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내가 브라만이다' 역시 잊어버리면 아주 좋습니다'
그것을 경험함 없이 경험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목표가 되고, 여러분에게 적합하다고 생각되면 사다나(수행)로 노력을 하십시오.
-싯따르메쉬와르 마하리지 강의집 <Amrut Laya (The Stateless st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