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자아 탐구 실제 수행방법 및 이론 정리 (64)

무한진인 2022. 5. 25. 22:39

그 사람은 햇빛의 반사광이 나오는 근원을 추구한 것만으로도 이제 어두운 방을 나와, 

그 반사광이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생겨난 공(空)의 상태에서 그 열린 공간에 서 있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구도자가 단순한 자기 주시를 통해 에고 '나'가 없어짐으로써 생겨난 대공(大空)의 상태에서 심장 공간 안에 머무르는 상태이다. 

방을 나와 열린 공간에 나선 그 사람은 눈부셔 하면서 탄식한다.

"아아! 이제까지 나를 인도한 해(반사된 해)가 이제 사라졌다!" 

 

이 순간, 열린 공간에 서 있던 그의 친구가 다가와서 이런 위안의 말을 건넨다. 

"자네 그 동안 어디 있었나? 어두운 방안에 있지 않았나! 지금은 어디 있나? 열린 공간에 있지 않나! 자네가 어두운 방에 있을 때 자네를 밖으로 인도한 것은 단 한 줄기의 빛 뿐이었지만, 

여기서는 (이 광대한 열린 공간에서는) 빛살이 무수하고 무한한 양 아닌가? 자네가 앞서 본 것은 직접 비치는 햇살도 아니고 하나의 반사광일 뿐이었네 ! 

그러나 자네가 지금 경험하는 것은 직접적인 햇빛이네. 

자네가 지금 있는 곳이 무한한 빛의 공간일 뿐일 때, 

그 반사광이 사라짐으로써 생겨난 공(空) 때문에 어둠이 생겨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사라진 것이 상실일 수 있겠는가? 

그것의 사라짐 자체가 참된 빛이라는 것을 알게. 그것은 어둠이 아니네

 

그와 마찬가지로, 

에고의 절멸에 의해 생겨난 대공을 체험하면 구도자는 다소 놀란다. 

"아아! 지금까지 내 수행에서 하나의 등댓불로 주의를 기울였던 '나'의식(에고) 마저 잃어버렸구나!

그러면 실제로 '진아' 같은 것도 없단 말인가?" 

바로 그 순간, 그의 심장으로서 늘 빛나고 있는 참스승이 그에게 이와 같이 지적해 준다. 

" 하나의 극미한 반사광에 불과한 에고가 소멸되는 것이 정말 상상일 수 있겠는가? 

그대는 이전에 그것이 존재했다는 것 뿐만 아니라, 그것이 사라짐으로써 생겨난 지금의 대공(大空)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 공(空)조차도 '이것은 하나의 공이다'리고

아는 그대야말로 참된 지(知)라는 것을 알라. 그대는 하나의 공(空)이 아니다!" 

 

참스승은 심장 안에서 심장으로서 ( 그 구도자와) 접촉함(스프라나로서 반뜩임)으로써 그 자신의 존재-의식의 빛남이라는 직접적인 체험으로 일순간에 그것을 지적한다! 

'나는 어디서 오는가? 나 '나는 누구인가?' 하는 탐색을 시작했던 구도자는 이제 비이원론적인 진아 지(知), 

곧 특정한 장소나 시간의 한계가 없는 '나는 내가 있다는 것이다'라는 참된 지(知)를 성취한다. 

 

'나'라는 의식을 곽 붙들고 그럼으로써 그것에 대한 점점 저 강력한 집중을 얻는 것이 

 내면으로 뛰어 드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와 같이 내면으로 뛰어드는 대신, 자신들이 자기 탐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여러 시간 앉아서 "나는 누구인가?" 나 "나는 어디서 오는가?" 하고 단순히 마음 속으로 또는 소리 내어 염하기만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탐구를 하려고 앉으면 자신들의 생각과 대면하여 마음 속으로 끝없이 스리 바가반이 가르친 다음의 질문을 되풀이 한다. 

"이 생각들은 누구에게 오는가? 나에게, 나는 누구인가?" 

아니면 어떤 때는 심지어 다음 생각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가 그 생각에 이런 질문을 던지기까지 한다! 

이것도 부질없는 것이다. 

우리가 무슨 사문회(査問會) 석상에 앉아서 생각을 하나 하나 호출하는 것이던가? 

이것이 내면으로 뛰어드는 수행인가? 

따라서 우리는 '다음 생각은 뭘까?'하고 지켜보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런 식으로 계속 질문하기만 하는 것은 자기 주시가 아니다. 

 

이처럼 생각의 파도 위 표면을 떠다니기만 하는 사람들, 

즉 예리한 마음으로 존재-의식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내면으로 뛰어들어 마음, 호흡 및 몸과 감각 기관들의 모든 활동을 제어하지는 않고, 그런 질문들에만 마음을 쓰는 마음을 쓰는 사람들에 대해서 스리 바가반은, 

 

그 자신이 항상 진아로 존재하는데도,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느 곳에서 오는가?" 하고 묻는 사람은, 

술에 취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있나?"하고 묻는 사람에 비견되네. 

                                        -<진아에 대한 오연시, 제 2연>-

 

라고 하였고, 나아가 이렇게 묻는다. 

 

(- - -) (이와 같이 떠다니는 대신) 우리가 그 '나'가 일어나는 곳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나'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인 에고 없음의 상태를 어떻게 성취하겠는가? 

그리고 그것(에고 없음)을 성취하지 않는다면, 

말해 보라, '우리가 그것'(soham)인 진아의 상태 안에 어떻게 안주하겠는지? 

 

그러므로 우리가 수행해야 하는 것은 '나'라는 느낌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고요히 있는 것이다.  

자기 주시를 하는 동안 자각이 느슨해질 때에만 그것의 한 징표인 생각들이 일어날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만약 생각들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우리가 자기 주시를 놓쳤음을 의미한다. 

스리 바가반이 우리에게 "이런 생각들은 누구에게 나타나는가?"라고 물으라고 조언한 것은 

생각-주시에서 자기주시를 회복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일 뿐이다. 

그 답인 "나에게"는 '나'의 여격(與格)형태에 불과하므로, 

그것은 주격(主格) 형태인 '나'라는 느낌을 쉽게 상기시켜줄 것이다. 

 

그러나 (질문 형태를 약간 달리 하여) "이런 생각들을 누가 하는가?"라고 물으면,

주격 형태인 '나'라는 느낌이 하나의 답으로서 얻어지므로 

자신도 모르게 놓쳤던 자기 주시가 곧바로 회복되지 않겠는가? 

자기 주시의 이 회복은 실은 자기로 있음(즉, 자기로서 머무르거나 안주하기)이다! 

그러한 '있음'이야말로 올바른 수행이다 

수행은 함이 아니라 있음이다! 

                                      

                                                    -스리 라마나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