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지금 자각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시오.
질문자 : 저는 막 슈리 라마나 아쉬람에서 왔습니다. 저는 거기서 7개월을 보냈습니다.
마하리지 : 아쉬람에서는 어떤 수행을 따랐습니까?
질 : 제가 할 수 있는 한, ;나는 누구인가?'를 집중했습니다.
마 : 어떤 식으로 했습니까? 말로 했습니까?
질 : 하루 중 제가 한가한 때는 그렇게 했습니다. 어떤 때는 제 자신에게 '나는 누구인가?' '내가 있다.
그러나 나는 누구인가?'하고 중얼거렸습니다. 아니면 마음 속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때로는 어떤 좋은 느낌이 있거나, 고요한 행복의 상태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대체로 저는 체험을 얻으려고 애쓰기 보다는 고요하고 수용적인 상태로 있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마 : 올바른 기분 상태에 있을 때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질 : 내적인 고요함, 평안, 그리고 침묵의 느낌입니다.
마 : 자신이 무의식상태가 되는 것을 알아차렸습니까?
질 : 예, 가끔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 동안요, 그렇지 않을 때는 안팎으로 그냥 고요하기만 했습니다.
마 : 그것은 어떤 종류의 고요였습니까? 깊은 잠과 비슷하지만, 그러면서도 의식하고 있는 상태라든가, 일종의 깨어있는 잠이었습니까?
질 : 예, 깨어 있는 상태로 잠들어 있습니다.
마 : 중요한 것은 부정적인 감정들- 욕망, 두려움 따위의 마음의 "여섯가지 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마음이 일단 그런 것에서 벗어나면, 나머지는 쉽게 됩니다.
비눗물에 담가놓은 천이 깨끗해지듯이, 마음도 순수한 느낌의 흐름 안에서 정화됩니다.
고요히 앉아서 그대 자신을 지켜보면, 온갓 것들이 표면 위에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해 어떻게 하려고 하지 말고, 그것들에 반응하지 마십시오.
그것들은 올 때처럼 저절로 사라집니다.
중요한 것은 주의를 놓치지 않는 것,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아니 그보다 자기 마음에 대한 완전한 자각입니다.
질 : '자기 자신'이란 일상적인 자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마 : 예, 그 사람 말입니다. 그 사람만이 객관적으로 관찰 가능하지요.
관찰자는 관찰을 넘어서 있습니다. 관찰 가능한 것은 진정한 자아가 아닙니다.
질 : 저는 항상 관찰자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끝없이 뒤로 물러나면서 말입니다.
마 : 관찰을 관찰할 수는 있지만, 관찰자는 관찰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긍극적인 관찰자라는 것은 직접적인 통찰에 의해서 알지, 관찰에 기초한 논리적 과정에 의해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는 '본래 있는 그대로 그대'이지만 '그대가 아닌 것'을 압니다.
자기(진아)는 '있음(존재)'으로서 알려지며, 자기 아닌 것(비진아)은 찰나적인 것으로서 알려집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것이 마음 안에 있습니다.
관찰되는 것, 관찰, 그리고 관찰자는 마음의 구성물입니다.
진아만이 있습니다.
질 : 마음은 왜 이런 온갖 구분들을 창조합니까?
마 : 구분하고 특수화하는 것은 마음의 본성에 속합니다. 구분한다고 해서 아무 해로운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리는 사실에 거역합니다. 사물과 사람들은 서로 다르지만, 그것들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연은 하나이고, 실재는 하나입니다. 상대물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립은 없습니다.
질 : 저는 성품상 아주 활동적인 사람입니다. 여기서 저는 활동을 삼가하라는 조언을 듣습니다. 제가 활동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뭔가를 하려는 충동이 더욱 커집니다. 이것은 저를 외부적으로 더 활동적으로 만들 뿐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성품상 제가 아닌 어떤 것'이 되려고 분투하게 만듭니다.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성향에 대한 어떤 치유책이 있습니까?
마 : 일과 단순한 활동 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모든 자연은 일을 합니다. 일은 자연이며, 자연이 일입니다.
반면에 활동은 욕망과 두려움, 소유하고 향유하려는 바람, 고통과 절멸에 대한 공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일은 전체에 의한 전체를 위한 것이며, 활동은 자기 자신에 의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질 : 활동에 대한 어떤 치유책이 있습니까?
마 : 그것을 지켜보십시오. 그러면 그칩니다.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그대 자신에게, 그대는 속박되어 있다는 것, 그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그대가 육신의 삶(육체를 자기라고 동일시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상기하십시오.
욕망, 두려움, 문제,기쁨, 이런 것은 그것이 나타날 수 있는 그대가 없다면 나타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지각하는 한 중심으로서의 그대가 존재함을 가리켜 줍니다.
그 가리키는 것(대상)들을 무시하고, 그것들이 가리키는 그것(보는 주체)을 자각하십시오,
상당히 쉬운 일이지만 실제로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계속 그대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집요함입니다.
질 : 저는 저 자신 속으로 깊히 몰입하는 특이한 상태에 들어가기는 하지만, 느닷없이 일시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저 자신이 그런 상태들을 제어한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마 : 육체는 하나의 물질적 사물이고 변하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마음은 심적인 습관들의 한 묶음, 생각과 감정의 방식들이 한데 모인 것에 불과하고, 그것을 바꾸려면 표면으로 끄집어 올려서 조사해야 합니다. 이 역시 시간이 걸립니다.
그저 확고한 결의로 꾸준히 밀고 나가십시오.
그러면 그 나머지는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질 : 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자신이 지치고 풀이 죽어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하고, 그러면서 시간을 낭비한다고 생각합니다. 홀로 있으면서 명상에 투입해야 하는 시간을 말입니다.
마 :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스스로 들볶지 마십시오.
폭력(억지로 강제하는 것)은 그대를 단단하고 경직되게 만듭니다.
수행상의 장애라고 생각되는 것들과 싸우지 마십시오.
그냥 관심을 가지고 그것들을 지켜보고, 관찰하고, 탐구하십시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것이 일어나게 내버려두십시오. 그러나 일어나는 일에 의해 그대 자신이 침몰되지 않게 하십시오,
질 : 자기 자신에게 자신은 '지켜보는 자'라는 것을 항상 상기시키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마 : 마음은 그 움직이는 너머에 자각이라는 배경이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 자각은 변치 않습니다.
마음은 참된 자아를 알고 그것을 존중하며, 마치 일식 때 달이 해를 가리듯이 그것을 은폐하지 않게 되어야 합니다. 그저, 관찰가능하거나 경험 가능한 그 어떤 것도 그대가 아니며, 그대를 속박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그대 자신이 아닌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질 : 당신께서 저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을 하려면 제가 부단히 자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마 : 자각하는 것이 깨어있는 것입니다.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은 잠들어 있는 것을 뜻합니다.
그대는 어떻든 존재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자각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자각하면서, 그 자각의 장(場)을 확대하고 심화(深化)하십시오,
그대는 마음을 항상 자각하고는 있지만 , 의식하고 있는 그대 자신을 자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질 : 제가 이해하기로, 당신께서는 '마음', '의식', '자각' 이라는 말들에 상이한 의미를 부여하십니다.
마 : 그것을 이런 식으로 보십시오, 마음은 생각들을 부단히 산출합니다. 그대가 그 생각들을 바라보지 않을 때도 말입니다. 그대가 자신의 마음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때, 그것을 의식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대의 생시의 상태인데, 그대의 의식은 감각에서 감각으로, 지각에서 지각으로, 관념에서 관념으로, 끝없이 연속되며 이동합니다. 그런 다음 자각, 즉 의식 전체, 마음의 총체에 대한 직접적인 통찰이 옵니다. 마음은 강처럼 육체의 하상(河床)을 부단히 흘러가는데, 그대는 한 순간 어떤 특정한 물결과 그대 자신을 동일시하여 그것을 '내 생각'이라고 부릅니다. 그대가 의식하는 것은 모두 그대의 마음입니다. 자각은 전체로서의 의식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질 : 누구나 의식하고 있지만, 누구나 자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마 : '누구나 의식하고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그 안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의식이 있다'라고 말하십시오.
우리의 마음은 의식의 바다 위에 있는 파도에 불과합니다.
파도로서 그것들은 오고 갑니다. 바다로서 그것들은 무한하고 영원합니다.
그대 자신을 존재의 바다, 모든 존재의 자궁으로 아십시오. 이것은 물론 모두 비유입니다.
실재는 묘사할 수 없습니다. 그대가 그것이 되어야만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질 : 그것을 탐색하는 것은 그만한 수고의 값어치가 있습니까?
마 : 그것 없이는 모든 것이 수고롭습니다. 만약 그대가 건전하게, 창조적으로, 그리고 행복하게 살면서, 함께 나눌 수 있는 무한한 부(富)를 가지고 싶다면 그대가 무엇인지를 탐색하십시오.
마음은 몸 안에 집중되어 있고, 의식은 마음 안에 집중되어 있으며, 자각은 자유롭습니다.
몸은 충동들을 가지고 있고, 마음은 고통과 쾌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각은 초연하며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명징(明澄)하고, 평화로우며, 깨어있고, 두려워하지 않고, 욕망과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것을 자신의 참된 존재로서 명상하면서 그대의 일상적 삶 속에서 존재하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완전한 개화된 상태를 깨달을 것입니다.
마음은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있지만, 자각은 마음 자체에 관심이 있습니다.
아이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만, 엄마는 장난감이 아니라 아이를 지켜봅니다.
지칠줄 모르고 (내면을) 바라봄으로써 저는 아주 텅 비워졌고,
그 텅 빔과 더불어 마음을 제외한 모든 것이 저에게 돌아 왔습니다.
저는 마음을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이 잃어버렸다는 것을 압니다.
질문자 : 바로 지금 저희들에게 말씀하실 때, 당신께서는 무의식상태 아니십니까?
마하리지 : 저는 의식도 아니고 무의식도 아닙니다.
저는 마음과 그 다양한 상태 및 조건들을 넘어서 있습니다.
분별은 마음이 만들어 내며, 마음에게만 해당이 됩니다.
저는 순수한 의식 그 자체,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부단한 자각입니다.
저는 그대의 상태보다 더 실재적인 상태에 있습니다.
저는 한 사람을 구성하는 분별과 분리들에 의해 주의가 흩어지지 않습니다.
육신이 지속하는 한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의식주를 필요로 하겠지만, 저의 심적 과정은 끝나 있습니다.
질문자 : 당신께서는 생각하는 사람처럼 행동하십니다.
마하리지 : 왜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저의 생각은 저의 소화작용과 마찬가지로, 무의식적이면서도 목적이 있습니다.
질문자 : 만일 당신의 사고과정이 무의식적이라면, 그 생각이 올바르다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마하리지 : 아무 욕망도 없고, 그것을 위축시킬 아무 두려움도 없습니다.
무엇이 그 생각을 그르칠 수 있습니까?
저 자신과 제가 대표하는 것(실재)를 알고 있으니, 저 자신을 늘 점검하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시계가 정확한 시간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면, 우리는 시계를 볼 때마다 긴가 민가하지 않습니다.
질문자 : 바로 이순간, 마음이 아니라면 누가 이야기합니까?
마하리지 : 질문을 듣는 그것이 그에 답변합니다.
질문자 : 그러나 그것이 누구입니까?
마하리지 : '누구'가 아니라 '무엇'이지요. 저는 그대에게 한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대가 이해하는 의미에서의 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그 안에서 모든 일이 일어나는 의식의 저 무한한 바다입니다.
저는 또한 모든 존재와 인식을 넘어선, 순수한 존재의 지복입니다.
제가 그것과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따라서 저는 모든 것입니다.
어떤 것도 제가 아니고, 그래서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불이 붙고 물이 흐르며, 씨앗이 싹트고 나무가 자라도록 하는 것과 동일한 힘이 저로 하여금 그대의 질문들에 답변하게 합니다. 저에게 개인적인 것이 전혀 없습니다. 언어와 스타일은 개인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사람이란 욕망과 생각, 그리고 그 결과로 나오는 행위들의 어떤 정해진 유형입니다.
저의 경우는 그런 유형이 없습니다.
제가 욕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이 전혀 없는데, 어떻게 한 유형이 있을 수 있습니가?
질문자 : 분명히 당신께서도 돌아가실 것입니다.
마하리지 : 생명은 빠져 나갈 것이고, 육신은 죽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저에게 조금도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있는 저는 원인이 없고, 원인이 되지도 않지만, 그러면서도 존재의 바로 그 모태입니다.
질문자 : 당신의 현재의 상태에 어떻게 도달하셨는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마하리지 : 제 스승이 저에게 '내가 있다'는 느낌을 집요하게 착파하고, 한 순간도 거기서 벗어나지 말라고 말씀하셨자요. 저는 그 분의 조언을 따르려고 최선을 다 했고, 비교적 짫은 시간에 저 자신의 내면에서 그분이 가르치신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제가 한 일이란 그분의 가르침, 그분의 얼굴, 그분의 말씀들을 부단히 기억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마음을 종식시켰고, 마음의 고요 속에서 저는 있는 그대로의 - 속박되지 않은 - 저 자신을 보았습니다.
질문자 : 당신의 깨달음은 돌연적이었습니까, 아니면 점진적이었습니까?
마하리지 : 어느 쪽도 아닙니다. 우리는 무시간으로 본래의 우리일 뿐입니다.
욕망과 두려움이 사라졌을 때 (소위) 깨달음을 얻는 것은 마음이지요.
질문자 : 깨달음을 얻겠다는 욕망도 말입니까?
마하리지 : 모든 욕망을 종식시키겠다는 욕망은 가장 특이한 욕망입니다.
마치 두려워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가장 특이한 두려움이듯이 말입니다.
전자는 그대가 움켜쥐는 것을 그만두게 하고, 후자는 그대가 도망치는 것을 그만두게 합니다.
같은 단어들을 사용할 수는 있겠지만, 그 상태들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은 욕망에 애착하지 않습니다.
그는 욕망을 거역하는 추구자(구도자)이지, 그것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해탈에 대한 일반적인 열망은 시작일 뿐입니다.
적합한 수단(수행법)을 발견하여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그 다음 단계입니다.
추구자는 오직 하나의 목표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참된 존재를 발견하는 것이지요.
모든 욕망 중에서 그것이 가장 야심적인 욕망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그것을 충족시켜 줄 수 없으니까요.
(여기서는) 추구자와 추구대상이 하나이며, 추구야 말로 중요합니다.
질문자 : 탐색이 끝날 때가 있겠지요. 추구자는 그대로 남겠지만 말입니다.
마하리지 : 아닙니다. 추구자가 해소되고, 탐색이 그대로 남습니다.
탐색은 바로 궁극적이고 무시간적인 실재입니다.
질문자 : 탐색은 결여, 부족, 불충분, 그리고 불완전을 뜻합니다.
마하리지 : 아닙니다. 그것은 불충분한 것과 불완전한 것에 대한 거부와 배척을 뜻합니다.
실재에 대한 탐색은 그 자체가 실재의 운동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탐색은 실재하는 지복, 혹은 실재의 지복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탐색이라고 할 때는 '의식하고 있음'의 뿌리인 자기 자신, 마음을 넘어선 빛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탐색을 의미합니다. 이 탐색은 결코 끝나지 않겠지만, 다른 모든 것에 대한 들뜬 갈망은 끝이 나야 합니다. 그래야 실질적인 진보가 이루어질 수 있으니까요.
그대는 실재 혹은 신이나 스승에 대한 탐색과 자기에 대한 탐색이 동일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를 발견하면 모두가 발견됩니다.
'내가 있다'와 '신이 있다'가 그대의 마음 안에서 구분할 수 없게 될 때,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때는 그대가 있기 때문에 신이 있고, 신이 있기 때문에 그대가 있다는 것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알게 됩니다.
그 둘은 하나입니다.
질문자 :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다면, 우리의 진아 깨달음도 예정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는 최소한 거기서는 자유롭습니까?
마하리지 : 운명은 이름과 형상만을 지칭합니다.
그대는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기 때문에 운명은 그대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대는 완전히 자유롭습니다. 컵은 그 형태와 물질적 용도 등에 의해 조건 지워집니다.
그러나 컵 안의 공간은 자유롭습니다. 그것은 컵과 연관 지워 볼 때만 우연히 컵 안에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냥 공간일 따름입니다. 하나의 육체가 있는 한, 그대는 육체를 입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육체가 없다해도 그대는 육체를 상실한 것이 아닙니다. (본래 그러했듯이) 그냥 있을 뿐이지요.
운명조차도 하나의 관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언어란 너무나 많은 방식으로 결합될 수 있지요 !
진술들은 서로 다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재에 어떤 변화가 생깁니까?
사물들을 설명하게 위해 너무나 많은 이론들이 고안되었는데, 모두 그럴 듯하기는 하나 그 어느 것도 참되지 않습니다. 그대가 자동차를 몰고 갈 때는 역학과 화학의 법칙에 지배됩니다.
그러나 자동차에서 내리면 생리학과 생화학의 법칙에 지배되지요.
질문자 : 명상이란 무엇이며, 그 효용은 무엇입니까?
마하리지 : 그대가 초심자인 동안은 어떤 공식화된 명상이나 기도를 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러나 실재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오직 한 가지 명상법이 있습니다.
즉, 생각을 마음에 담아 두기를 준엄히 거부하는 것입니다.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가 명상입니다.
질문자 : 그것을 어떻게 합니까?
마하리지 : 생각들이 흐르게 내버려 두면서 그것을 지켜보는 것으로써 시작합니다.
그 관찰 자체가 마음이 흐르는 속도를 늦추는데, 그러다가 마침내 마음이 아주 멈추어 버립니다.
일단 마음이 고요해지면 그것을 고요하게 유지하십시요.
평안에 지루해 하지 말고, 그 안에 머무르고, 그 속으로 더 깊히 들어가십시오.
질문자 : 저는 다른 생각들을 몰아내기 위해서 한 생각을 착파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모든 생각을 몰아낼 수 있습니까? 그 관념 자체가 하나의 생각입니다.
마하리지 : 새롭게 실험해 볼 것이지 과거의 경험에 의존하지 마십시오.
그대의 생각들을 지켜보고, 생각들을 지켜보는 그대 자신을 지켜 보십시오.
모든 생각으로부터 벗어난 상태가 갑작스럽게 일어날 것이고,
그 지복에 의해 그대는 그것을 인지하게 될 것입니다.
질문자 : 당신께서는 세계의 상태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으십니까?
동파키스탄(지금의 방글라데시)의 공포스런 사태를 보십시오,
그런 것을 보시고도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십니까?
마하리지 : 저도 신문을 읽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요. 그대의 반응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대는 어떤 치유책을 찾지만, 저는 예방에 관심이 있습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도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나누고 분리하는데 열중해 있는 한, 이기적이고 공격적인 한,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대가 세계에 평화와 조화가 있기를 바란다면, 그대의 심장과 마음 속에 평화와 조화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변화는 밖에서 강제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면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전쟁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체제에서 전쟁을 몰아내야 합니다.
평화로운 사람들 없이 어떻게 세상에 평화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지금과 같은 한, 세계도 지금과 같은 상태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이 자기 불행의 유일한 원인이라는 것을 알도록 도와주려고 노력하는 것으로써 제 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그런대로 유용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저 자신 속에 있는 본래의 저, 저의 정상적인 상태인 그 실체를 사회적 의식과 유용성의 견지에서 표현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그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비유나 우화를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저는 예리하게 자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체험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자체를 체험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알기 위해서는 (대상을) 분리하고 대립시켜야 하는 마음의 견지에서는 그것을 묘사할 수 없습니다. 세계는 어떤 내용이 타자되는 한 장의 종이와 같습니다.
사람에 따라 그것을 읽는 방식과 이해하는 의미가 다르겠지요.
그러나 종이는 공통인자로서 항상 존재하며, 거의 잘 지각되지 않습니다.
(타자기의) 리본을 제거하면 타자를 해도 종이에 아무 흔적이 남지 않습니다.
마음도 그와 같아서, 인상들이 계속 다가오지만 아무 흔적이 남지 않습니다.
질문자 : 왜 당신께서는 여기 앉아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당신의 진정한 동기는 무엇입니까?
마하리지 : 아무 동기도 없습니다. 그대는 제가 어떤 동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저는 여기 앉아 있지도 않고, 말을 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동기를 추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를 이 육신과 동일시하지 마십시오. 저는 할 일이 없고, 수행해야 할 임무도 없습니다.
그대가 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저의 한 부분이 세계를 돌 볼 것입니다.
그토록 많은 돌봄을 요하는 그대의 이 세계는 그대의 마음 안에서 살아가며 움직입니다.
그 속으로 천착해 들어 가십시오. 그러면 거기서, 그리고 오직 거기서만, 그대의 답변들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 답변들이 어디 다른 데서 오리라고 기대합니까?
그대의 의식 밖에 어떤 것이 존재합니까?
질문자 : 제가 전혀 모르는 가운데 어떤 것이 존재할지도 모릅니다.
마하리지 : 그것은 어떤 종류의 존재가 될까요? 존재가 앎과 결별할 수 있습니까?
모든 존재는 모든 앎과 마찬가지로 그대와 관계됩니다.
한 사물은 그대가 그것이 있다는 것을 - 그대의 경험 안에 있든, 그대의 존재 안에 있든 - 알기 때문에 있습니다.
그대의 몸과 마음은, 그대가 존재한다고 믿는 한에서 존재합니다.
그것들이 그대의 것이라고 생각하기를 그만 두십시오,
그러면 그것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대의 몸과 마음이 움직이게 하되, 그것들이 그대를 제한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만약 (마음과 몸의) 결함들을 보게 되면, 그것을 계속 그냥 지켜보십시오,
그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자체가 그대의 가슴과 마음과 몸을 바로 잡아 줄 것입니다.
질문자 : 단지 그것을 인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제가 중병을 고칠 수 있습니까?
마하리지 : 외부적인 징후들 뿐 아니라 그 병 전체를 인지 하십시오.
모든 질병은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먼저 마음을 돌보면서, 모든 그릇된 관념과 감정들을 추적하여 제거하십시오,
그런 다음 질병에 상관하지 말고 살아가며 일을 하고,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마십시오.
원인을 제거하면 결과는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어떤 사람이라고 믿는 그런 사람이 됩니다.
그대 자신에 대한 모든 관념을 내버리십시오,
그러면 그대 자신이, 몸과 마음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을 넘어선, 순수한 주시자라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질문자 : 설사 제가 저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된다 하더라도 제가 (깨닫지도 못한 채) '나는 지고의 실재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저의 지고의 실재는 단지 하나의 관념으로 남지 않습니까?
마하리지 : 먼저 그 상태에 도달하고 나서 그런 질문을 하십시오.
- I am Tha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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