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자아 탐구 실제 수행방법 및 이론 정리 (62)

무한진인 2022. 4. 22. 23:21

 나는 이다 (I am)

 

15. 파담께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탐구하여 알기 위해서는, 

"나는 이다(I am)"라는 의식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바가반 : 아함 브리티 ('나'-라는 생각)의 실마리를 추적하는 참나탐구는 자신의 후각으로 주인을 추적하는 개와 같습니다. 주인은 어느 먼 알 수 없는 장소에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개가 주인을 추적하는 데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주인의 냄새는 그 동물에게는 절대로 오류가 없는 실마리이며, 주인의 옷, 체격, 신장 등과 같은 다른 것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주인을 찾는 동안에, 개는 주의가 빗나가지 않도록 그 냄새에만 매달립니다. 결국 그 개는 주인을 추적하는데 성공합니다. 

참나를 향한 당신의 탐구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오류도 없는 실마리는 당신의 경험의 1차적인 정보인 "나는 ~이다(아함 브리티)"입니다. 다른 단서는 당신을 참나 깨달음으로 직접적으로 안내 할 수 없습니다. 

 

질문 : 제가 슈리 바가반의 저서들을 읽을 때, 저는 탐구가 깨달음을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바가반 : 그렇습니다. 그것은 비차라입니다. 

 

질문 : 어떻게 그것을 해야 합니까?

 

바가반 : 질문하는 자신의 자기를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이다"라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는 그 실마리를 추적하는 것이 바차라입니다. 탐구와 깨달음은 동일합니다. 

 

질문 : 종잡을 수 없습니다. 무엇을 명상해야 합니까? 

 

바가반 : 명상은 명상해야 할 대상을 필요로 하는 반면에, 비차라에는 대상이 없으며 오로지 주체만이 있습니다. 명상은 이 점에서 탐구와 다릅니다. 

 

질문 : 명상이 없이 탐구가 홀로 가능할까요?

 

바가반 : 탐구는 과정이자 목표입니다. "나는 이다"는 목표이자 마지막 실재입니다. 노력으로 그것을 잡는 것이 탐구입니다.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울 때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바가반 : 수행자가 일어날 수 있는 의심을 일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나는 그에게 '나'임 혹은 '나는 ~이다'임의 '단서'나 실마리를 잡아 그것의 원천까지 그것을 추적하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자신의 '나'라는 개념에 대하여 의심을 받아들이는 것은 누구라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고 있는 수행이 무엇이든 간에, 최종 목표는 당신 경험의 일차적 자료인 '나는 ~이다'임의 근원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아트마 비차라를 한다면, 당신은 참나인 가슴에 이를 것입니다. 

 

16. 당신의 주의의 유일한 피난처로서 바탕 의식인 '나는 이다'를 잡고서, 당신의 삶을 사십시오. 

 

바가반 : "나는 이다"는 모든 사람이게 불변의 그리고 자명한 경험입니다.

'나는 ~이다'만큼 자명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명하다고 부르는 것은, 다시 말해 그들이 감각들로부터 얻는 경험은 자명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참나만이 그것입니다. 자명한 것은 참나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분석을 하여 '나는 이다'가 되는 것이 해야 할 유일한 것입니다. 

'나는 ~이다'는 실재입니다. 나는 이것이다 혹은 저것이라는 것은 실재가 아닙니다. 

"나는 ~이다"는 진리이며 참나의 다른 이름입니다. "나는 신이다"라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바가반 : 비록 '나'임 또는 '나는 이다'임의 상태가 관례상 아함 브리티로 알려져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음의 다른 브리티(마음의 변형이나 활동)들과 같은 브리티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내적인 연관을 지니지 않고 있는 다른 브리티들과는 달리, 아함 브리티는 마음의 모든 브리티들과 본질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함 브리티가 없으면 다른 브리티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함 브리티는 마음의 어느 다른 브리티들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함 브리티는 다른 브리티들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17. 지성의 근원으로 빛나고 있는, '나는 이다(삿-보다)"인 존재의 자각은 고결한 갸나의 성취를 가능케하는 신성한 은총입니다. 

 

[무한진인 주석 : 여기서 "나이다"(I am)은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님의 대담 책자에서는 "내가 있다"로 번역되거나 "존재의식" 또는 "존재앎"으로 번역된 <I am>의 한글 번역을 말하는데, 한글로 번역되는 책자에서는 번역자마다 조금씩 다르게 번역된 것 같습니다. 탐구사의 대성스님은 "내가 있다" 또는 "존재의식"으로 번역하는데, 여기 이 책자에서는 김병채님이 "나이다 "라고 번역해 놨습니다. "나이다"나 "내가 있다"나 의미는 다 같지만, 영어를 단어 그대로 한글로 번역하다보니 독자들은 시실 이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그런데 제가 혼자서 내면적으로 이해하기로는 'I am'은 "나 ~이다 " 또는 "내가 ~ 있다"라고  문장 가운데 (~)가 들어가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말의 뜻을 더 세밀하게 분해해서 길게 해설을 늘여놓자면 , 좀 문장이 길어집니다.

"나는 <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를 줄여서 " 내가 ~ 있다" 즉  영어로 "I am"이라고 한다고 전에도 이 브로그 어디선가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는  "나는 <내가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에서, < > 속은 우리가 보통 인식하는 부분이고, 인식 넘어에 있는 내면에서 안보이는 부분인 '나는 ~ 알고 있다'는 줄여서 "내가 ~있다"인 것 입니다. 

"나는 알고 있다"는 인식 넘어의 (현상계의) 주시자(존재앎)를 말합니다. 

이것이 존재의식인  "내가 있다", 즉 "I am"을 말합니다.  

따라서 <나이다>나 <내가 있다>는 우리의 인식넘어 관찰자 또는 주시자를 말하며, 순수존재의식 또는 마하리쉬 같은 분은 진아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생시 꿈, 깊은 잠의 배면 바탕에 항상 존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나이다> <내가 있다> 또는 <나는 (~ )알고 있다> 입니다. 맨 끝에 <알고 있다>가 붙어 있는 것은 <존재앎> 즉 <있음> 자체가 <앎>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따라서 <I am>은 우리들 일상생활에 항상 마음 너머에 바탕존재 또는 "있음", "앎"으로써 우리의 내면에서 마음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에게는 항상 관심 빆에 있는 모르는 것이죠. 

이 <I am> <내가 있음> <나이다>에 항상 주의를 붙들고  탐구하는 것이 바로 자아탐구입니다.]

 

탐구 방법 

 

18. 찾는 것이 평화라면, '나' 안을 탐구하여 갸냐 사마디 안에 머무르십시오. 

 

질문 : '나'를 깨닫는 방법을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누구인가?'를 자파(만트라의 반복)로 만들어야 합니까? 

 

바가반 : 자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질문 :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합니까?

 

바가반 : 당신은 '나'-생각이 솟아 나오는 곳을 알았습니다. '나'-생각을 붙잡고는 그것의 근원을 찾으십시오.

 

질문 : 제가 그 방법을 알 수 있습니까?

 

바가반 : 방금 들은 대로 해 보십시오. 

 

질문 :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바가반 : 그것이 객관적인 어떤 것이라면 방법을 객관적으로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관적인 것입니다. 

 

질문 : 방법을 일러 주십시오.

 

바가반 : 당신 자신의 집안에 있으면서 그 방법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합니까? 이것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 

 

 

19. 당신의 진리는 탐구로 경험되어야 합니다. 탐구란 진정한 길인 비차라의 길을 붙드는 것입니다. 

 

질문 : 당신은 자기를 탐구함으로서 자기를 깨달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탐구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바가반 : 당신은 마음이거나, 당신을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은 다름 아닌 생각입니다. 각각의 모든 생각 뒤에 당신 자신인, '나'라는 일반적인 생각이 있습니다. 이 "나'를 첫번째 생각이라 합시다. 

이 '나' 생각에 매달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기 위하여 그것에 질문하십시오. 

이 질문이 당신에게 강하게 붙어 있을 때, 다른 생각들을 당신은 할 수 없습니다. 

 

질문 : 제가 이처럼 하고 '나' 생각인 나의 자기에 매달릴 때, 다른 생각들이 들어 오고 갑니다. 그러나 저는 제 자신에게 "나는 누구인가?"라고 말하지만, 대답은 없습니다. 그런 것입니까?

 

바가반 : 종종 사람들이 범하는 실수가 이것입니다. 당신이 참나를 진지하게 탐구하면 

'나'생각이 사라지고, 깊은 곳으로부터 어떤 것이 당신을 붙잡습니다. 

그것은 질문을 시작할 때의 '나'는 아닙니다. 

 

질문 : 이 어떤 것이 무엇입니까? 

 

바가반 : 그것은 '나'의 의미인, 진정한 참나입니다. 그것은 자아는 아닙니다. 그것은 지고의 존재입니다. 

 

 

20. 생각을 멈추고 주의 깊은 탐구로 자신의 본성으로 가슴 안에 있는 실재를 아십시오. 

 

21. 외적 대상들을 놓아 버리고, 그것들에 등을 돌리고, 가슴 안에서 빛나고 있는 찬란한 진리를 예리한 탐구로 깨달으십시오. 

 

 

질문 : 탐구를 시작할 때 다른 생각들을 거부해야 된다고 종종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생각들은 끝이 없습니다. 한 생각을 거부하면 다른 생각이 오고 전혀 끝이 없는 듯 보입니다. 

 

바가반 : 생각들을 계속해서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말하자면 '나'생각에 매달린다면, 그래서 당신의 관심이 그 하나의 생각에 유지된다면, 다른 생각들은 거부되어 자동적으로 사라집니다. 

 

질문 : 그러므로 생각들의 거절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바가반 : 아닙니다. 한 때나 다른 때 동안에는 그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에 매 생각을 거절한다면 끝이 없을 것이라고 당신은 공상합니다. 아닙니다. 끝은 있습니다. 방심하지 않고, 생각들이 일어날 때마다 거절하기 위한 단호한 노력을 한다면, 당신이 당신의 내적 자기 속으로 더욱 깊히 들어 가고 있음을, 그리고 거기에서는 생각들을 거절하려는 아무런 노력이 필요 없다는 점을 곧 발견할 것입니다. 

 

질문 : 그러면 노력없이, 긴장없이 있는 것도 가능하군요?

 

바가반 : 오직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떤 정도의 너머에서는 노력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질문 : 저는 더욱 깨닫기를 원합니다. 제가 전혀 노력을 하지 않아야 합니까?

 

바가반 : 여기에서는 노력없이 있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더욱 깊히 들어가면, 어떤 노력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무루가나르 지음, 데이비드 가드먼 영역, 김병채 옮김 <파다말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