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관론(絶觀論)-17
[본문]
"선생께서는 설함없이 설하시고, 저는 듣는 바 없이 들어 설함과 합일되어 있습니다.
종래(從來) 적연(寂然)한지라 앞에서부터 질문한 바를 모르겠으며, 대답한 분은 누구입니까?"
이에 입리 선생이 말하였다.
"무릇 지리(至理)는 유현(幽玄)하고, 문자가 없다. 네가 질문한 것은 모두 헤아리는 마음으로 일어난 것이다.
깨닫고 나면 사물이 없고 모두 가명(假名)이며, 문답은 자취가 없나니 가히 <절관론(絶觀論)>이라 말할 수 있느니라."
[해설]
오직 당처 외엔 아무 것도 없는 까닭에 무엇을 보거나 관할 바가 없다. 그래서 절관(絶觀)이다.
[본문]
묻는다.
"사람들이 모두 마음이 있는데 어떠한 방편으로 무생(無生)의 심(心)을 얻을 수 있습니까?
답한다.
" 하(下), 중(中), 상(上)의 수행으로 능히 자심(自心)이 망상(妄想)임을 보고, 삼중(三衆)의 환(幻)과 같음을 알아 진실한 공(空)을 증득하면 비로소 생멸(生滅)을 면할 수 있다."
[본문]
묻는다.
"일체 중생이 환(幻)과 같고 꿈과 같다 하였는데, 제자가 살인한다면 죄가 됩니까?"
답한다.
"만약 중생이 있다고 본다면, 이 중생이 살인하는 것은 죄가 된다. 중생이 있다고 봄이 없으면 이 중생은 곧 살인한 것이 될 수 없나니, 꿈 속에서 살인하였으나 깨어나서 보면 필경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과 같다."
[본문]
묻는다.
"어떻게 도에 들어 갑니까?"
답한다.
"마음은 있고 없고 하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도에 들어 가겠는가. 도에 들어가는 것을 알고자 하건대 출입함이 없는 마음, 바로 이것이니라."
[해설]
마음은 공적하여 무상(無相)이고, 모든 것이 오직 마음일 뿐인지라
바로 그 처소가 없어서 출입함이 본래 없는 것이다."
[본문]
묻는다.
"어떤 사람이 술과 고기를 먹고, 여러 오욕을 행하면서 불법(佛法)을 이루어 갈 수가 있습니까?
답한다.
"마음에 아무 것도 없다면 누가 시비(是非)를 하겠는가."
[본문]
묻는다.
"무엇이 불법(佛法)입니까?"
답한다.
"심법(心法)이 없음을 아는 것, 바로 이것이 불법(佛法)이다"
[해설]
심법(心法)이 없다 함은 곧 무심(無心)이되, 무심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당처(當處)의 심(心)이 그대로 무심임을 요지(了知) 한지라 무심이라고 함에도 머무름이 없다.
이렇게 이입(理入)하여 증(證)하여야 진정한 무심의 불경계(佛境界)가 된다.
오직 마음일 뿐이니 마음 밖에 다른 것이 없어 마음이라는 법도 인지되지 않는다.
즉 마음을 짝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오직 마음일 뿐임이(唯心) 곧 무심임을 뜻한다.
[본문]
묻는다.
"무엇을 무분별지(無分別智)라고 합니까?"
답한다.
"현식(現識)이 생하지 않고, 각관(覺觀)이 생기지 않는 것, 바로 이것이다."
[해설]
여기서 말하는 현식(現識)은 현행의 분별망상이고, 각관(覺觀)은 관조 내지 관찰함이다.
각(覺)은 거친 관찰, 관(觀)은 각에 비해 미세한 관찰행이다.
각관은 수행 초기의 단계에서 행하는 것이지만 어느 정도 마음이 맑아지면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행이기도 하다.
여기에 깊이 빠지거나 머물면 안 된다. 마음의 행상에서, 마음을 짝함에서 벗어나야 하는 까닭이다.
[본문]
묻는다.
"무엇을 망상(妄想)이라고 합니까?
답한다.
"상념하는 마음, 바로 이것이다."
[해설]
상념(想念)하게 되면 당처에 즉하지 못하게 된다.
[본문]
묻는다.
"어떻게 망상을 멸합니까?"
답한다.
"망상이 본래 생기지 않았고, 멸해야 할 망상이 없음을 알며,
심(心)이 그대로 무심(無心)임을 알면 멸할 수 있나니, 바로 이것이다."
[해설]
본래 생한 바 없는 망상을 없애고자 한다면 또 하나의 망상을 더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망념 그대로 공적(空寂)하고 , 무심(無心)임을 요지(了知)하면 된다.
[본문]
묻는다.
"무엇을 여래장(如來藏)이라 합니까?"
답한다.
" 색진(色塵)이란 자심(自心)의 상념이 나타난 것임을 깨달아 알면,
색진(色塵)이 불생(不生)인 것이며, 그래서 그대로가 바로 여래장(如來藏)이니라."
[해설]
일체의 물질 현상(색진)은 내 마음이 나타난 것이다. (自心所顯)
그래서 색(色)도 오직 마음일 뿐이라 언제 생한 바가 없다.
생한 바가 없이 있음이라 여여(如如)하여 여래(如來)라 한다.
그래서 일체법이 여여하고 여래의 성(性)을 지니기에 그대로 여래장(如來藏)이다.
'生한 바가 없이 있다'는 것은 유무(有無)의 분별이 닿지 않는다.
그래서 여여라 하고 여래라 한다.
- 박건주 역주 <절관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