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진인 2022. 4. 1. 21:10

564. 비구니경(比丘尼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는데, 존자 아난도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 때 어떤 비구니가 존자 아난의 처소에서 지내며 물들어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고는 사람을 보내 존자 아난에게 이런 말을 전하게 하였다.

  제가 몸에 병이 들어 앓고 있습니다. 존자께서 가엾게 여기시어 살펴봐 주십시오.
  존자 아난은 이른 아침에, 옷을 입고 발우를 가지고 그 비구니의 처소로 갔다. 그 비구니는 멀리서 존자 아난이 오는 것을 보고 벌거벗은 채 평상 위에 누워 있었다. 존자 아난은 멀리서 그 비구니의 몸을 보고 곧 모든 감각기관[根]을 추스리고 몸을 돌려 등진 채 서 있었다. 그 비구니는 존자 아난이 모든 감각기관을 추스리고 몸을 돌려 등진 채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만 부끄러워[?愧], 일어나 옷을 입고 자리를 펴고, 존자 아난을 나가 맞아들여 앉기를 청하고,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물러나 서 있었다. 

  그 때 존자 아난이 그를 위해 설법하였다. 
  누이여, 이 따위 몸이라는 것은 더러운 음식으로 자라났고 교만으로 자라났으며, 탐애로 자라났고 음욕으로 자라난 것이오. 누이여, 더러운 음식을 의지해 마땅히 더러운 음식을 끊어야만 하고, 교만을 의지해 교만을 끊어야만 하며, 탐애와 음욕을 의지해 탐애와 음욕8)을 끊어야만 하오. 누이여, '더러운 음식을 의지해 더러운 음식을 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거룩한 제자는 음식에 대해 분수를 헤아리고 생각하면서 먹되, 좋아하여 집착하는 생각이 없고 교만한 생각이 없으며,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없고 예쁘게 꾸미겠다는 생각 없이, 몸을 보존하기 위해서요, 살아가기 위해서요, 굶주리고 목마른 병을 고치기 위해서요, 범행(梵行)을 거두어 닦기 위해서이니, 과거의 모든 감정을 없애고 모든 새 감정을 생기지 않게 해, 숭상하고 익혀 증대시켜 나가야 합니다. 혹은 노력하거나, 안락하거나, 접촉하거나 하는 데 있어서도 이와 같이 머물러야 하는 것이오. 비유하면 마치 상인이 소유(?油:타락 기름)를 그 수레에 칠할 때, 물들어 집착하는 생각이 없고 교만한 생각이 없으며,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없고 예쁘게 꾸미겠다는 생각 없이, 다만 싣고 운반하기 위해서인 것과 같소. 

  또 마치 옴병[瘡病]을 앓는 사람이 소유를 바를 때, 집착하여 좋아하는 생각이 없고 교만한 생각이 없으며, 갈고 닦아내겠다는 생각이 없고 예쁘게 꾸미겠다는 생각 없이, 다만 옴병을 고치기 위해서인 것과 같소. 이와 같이 거룩한 제자는 분수를 헤아려 먹되, 물들어 집착하는 생각이 없고 교만한 생각이 없으며,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없고 예쁘게 꾸미겠다는 생각 없이, 다만 살아가기 위해서요, 굶주리고 목마름을 고치기 위해서요, 범행을 거두어 닦기 위해서이니, 과거의 모든 감정을 떠나고 모든 새 감정을 일으키지 않게 해 혹은 노력하거나, 안락하거나, 죄 없이 접촉함에 있어서도 안온하게 머물러야 하는 것이오. 누이여, 이것이 이른바 '음식을 의지해 음식을 끊는다'는 것이오.

  '교만을 의지해 교만을 끊는다'고 했는데 어떤 것을 교만을 의지해 교만을 끊는 것이라고 하는가? 이른바 거룩한 제자는 '아무 존자와 아무 존자 제자는 모든 번뇌[有漏]가 다하여, 번뇌 없이 심해탈(心解脫)·혜해탈(慧解脫)하고, 현세에서 스스로 자신이 증득한 줄을 알아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라고 스스로 안다'는 말을 들으면, '저 거룩한 제자는 모든 번뇌가 다하여……(내지)……(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라고 스스로 안다고 하는데, 나는 지금 어째서 모든 번뇌를 다하지 못했을까? 어째서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알지 못할까?'라고 생각하게 되오. 그러면 그는 그 때 곧 모든 번뇌를 끊고……(내지)……'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오. 누이여, 이것이 이른바 '교만을 의지해 교만을 끊는다'는 것이오.

  누이여, '탐애를 의지해 탐애를 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거룩한 제자는 '아무 존자와 아무 존자 제자는 모든 번뇌를 다하여……(내지)……(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안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들은 어째서 모든 번뇌를 다하지 못했는가?……(내지)……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알지 못하는가?'라고 하는데, 그는 그 때 모든 번뇌를 끊고……(내지)……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오. 누이여, 이것이 이른바 '탐애를 의지해 탐애를 끊는다'는 것이오. 누이여, 행하는 바가 없으면 음욕과 화합하는 다리[橋樑]도 끊어지는 것이오.

  존자 아난이 이렇게 설법하자, 그 비구니는 티끌과 때를 멀리 여의고 법안(法眼)이 깨끗해졌다. 그 비구니는 법을 보아 법을 얻고 법을 깨달아 법에 들어갔으며, 의심을 벗어나, 남을 의지하지 않고도 바른 법과 율에서 마음에 두려움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존자 아난의 발에 예배하고 존자 아난에게 말했다. 

  저는 이제 잘못을 고백하고 참회합니다. 어리석고 착하지 못해 어쩌다 이와 같은 씻지 못할 종류의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제 존자 아난이 계신 곳에서, 스스로 잘못을 보고 스스로 잘못을 알아 고백하고 참회하오니 가엾게 여겨 주십시오. 

  존자 아난이 비구니에게 말했다. 
  당신은 이제 진실로 스스로 죄를 보고 스스로 죄를 알았구려. 어리석고 착하지 못해 짝할 수 없는 죄를 지었음을 그대는 스스로 알았고, 그대는 이제 스스로 알고 스스로 보고서 잘못을 뉘우쳤으니, 미래 세상에서는 구족계(具足戒)를 받을 것이오. 나는 이제 가엾게 여겨 그대의 잘못에 대한 참회를 받아들이겠소. 그리고 그대로 하여금 착한 법이 더욱 자라나 끝내 물러나거나 멸하지 않게 하겠소. 왜냐하면, 만일 스스로 죄를 보고 스스로 죄를 알아 능히 잘못을 참회하는 사람은 미래 세상에서 구족계를 얻고, 착한 법이 더욱 자라나 끝내 물러나거나 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오.

  존자 아난은 이렇게 그 비구니를 위해 갖가지로 설법하여, 가르쳐 보이고 기뻐하게 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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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고려대장경 본문에는 단지 애욕(愛欲)으로만 되어 있으나, 이것은 앞서 기술한 탐애와 음욕의 줄임말로 보여 앞 내용을 따랐다.
  
  
565. 바두경(婆頭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교지(橋池)9)족 땅에 계시면서 인간 세상을 유행하시다가, 존자 아난과 함께 바두촌[婆頭聚落] 국경 북쪽에 있는 신서림(身恕林)으로 가셨다. 

  그 때 바두촌의 여러 소년들은 존자 아난이 교지 땅에서 그 마을을 유행하다가, 바두촌 북쪽에 있는 신서림에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들은 후 그들은 서로를 불러모았고 존자 아난의 처소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존자 아난의 발에 예배하고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그러자 그 때 존자 아난이 여러 소년들에게 말했다. 

  제종(帝種)10)들이여, 여래·응공·등정각께서는 네 가지 청정함을 말씀하셨으니, 계의 청정[戒淸淨]·마음의 청정[心淸淨]·견해의 청정[見淸淨]·해탈의 청정[解脫淸淨]이다. 

  어떤 것을 계의 청정이라 하는가? 이른바 거룩한 제자는 계, 즉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에 머물러 계가 차츰 자라고 위의(威儀)를 구족하여 조그마한 죄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내며, 학계(學界)를 받아 지닌다. 계가 몸에 완전히 배지 않은[不滿] 사람은 완전히 배게 하고, 이미 완전히 밴 사람은 그대로 지속시켜 정진방편(精進方便)으로 뛰어나고자 하며, 용맹하게 꾸준히 힘써 모든 몸과 마음의 법을 감당하고 늘 능히 받아들인다. 이것을 계가 청정하여 끊는 것[戒淨斷]11)이라 한다.

  고종(苦種)이여, 어떤 것을 마음이 청정하여 끊는 것이라 하는가? 이른바 거룩한 제자는 욕심과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떠나……(내지)……제4선에 구족하게 머문다. 그리고 선정이 몸에 완전히 배지 않은 사람은 선정이 몸에 완전하게 배게 하고, 이미 완전히 밴 사람은 그대로 지속시켜 정진하고자 하며 나아가 항상 받아들인다. 이것을 마음이 청정하여 끊는 것[心淨斷]이라 한다.

  고종이여, 어떤 것을 견해가 청정하여 끊는 것이라 하는가? 이른바 거룩한 제자는 부처님[大師]의 설법을 듣되, 이러이러하다고 설법하면 곧 이러이러함에 들어가 사실 그대로 바르게 관찰하고, 이러이러한 기쁨을 얻고 따라 기뻐하며 부처님을 따르게 된다. 다시 거룩한 제자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지는 못했으나, 다른 지혜가 밝고 존중할 만한 범행자로부터 존중할 만한 범행자의 이러이러하다는 설법을 들으면 곧 이러이러함에 들어가 사실 그대로 관찰하고, 이러이러하다고 관찰하고는 그 법에서 기쁨을 얻고 따라 기뻐하며 바른 법을 믿는다. 

  다시 거룩한 제자는 부처님의 설법도 듣지 못하고 또한 지혜가 밝고 존중할 만한 범행자의 말도 듣지 못하더라도, 이전에 들어 받아 지녔던 것을 거듭 외우고는 이전에 들어 받아 지녔던 것은 이러이러하다고 거듭 외우고 나서는 이러이러하다는 그 법에 들어가며, 나아가 바른 법을 믿는다. 

  다시 거룩한 제자는 부처님의 설법도 듣지 못하고, 지혜가 밝고 존중할 만한 범행자의 말도 듣지 못하며, 또 이전에 들어 받아 지녔던 것을 거듭 외워 익힐 수가 없더라도, 이전에 들었던 법을 남을 위해 널리 설명하고, 이전에 들었던 법은 이러이러하다고 남을 위해 널리 설명하고서는 이러이러하다는 그 법에 들어가 바른 지혜로 관찰하며, 나아가 바른 법을 믿는다.
  
  다시 거룩한 제자는 부처님의 설법도 듣지 못하고, 지혜가 밝고 존중할 만한 범행자의 말도 듣지 못하며, 또 이전에 받아 지녔던 것을 거듭 외워 익힐 수도 없으며, 이전에 들었던 법을 남을 위해 널리 설명할 수도 없더라도, 이전에 들었던 법을 혼자 고요한 곳에서 생각하고 관찰하고, 이러이러하다고 생각하고 관찰하고는 이러이러하다는 바른 법에 들어가며, 나아가 바른 법을 믿는다. 

  이와 같이 남에게서 듣고서 안으로 바르게 생각하면, 이것이 일어나지 않은 바른 소견을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바른 소견은 더욱 넓힌다는 것이요, 또 이것이 계가 몸에 아직 배지 않은 사람은 배게 하고, 이미 밴 사람은 그대로 거두어 받아들이며, 정진방편으로 항상 거두어 받아들이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견해가 청정하여 끊는 것[見淨斷]이라 한다. 

  고종이여, 어떤 것을 해탈함이 청정하여 끊는 것이라 하는가? 이른바 거룩한 제자는 탐하는 마음에 욕망이 없어 해탈하고 성냄과 어리석은 마음에 욕망이 없어 해탈한다. 이와 같이 해탈이 아직 배지 않은 사람은 배게 하고, 이미 밴 사람은 그대로 거두어 받아들이며, 정진하여 항상 거두어 받아들이려 한다. 이것을 해탈함이 청정하여 끊는 것[解脫淨斷]이라 한다. 고종이여. 

  존자 아난이 이 법을 설하자, 바두촌의 여러 소년들은 존자 아난의 말을 듣고, 함께 기뻐하면서 예배하고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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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팔리어로는 Kosiya라고 하며, 종족 이름임.
10) 고려대장경 본문에는 '제종(帝種)' 혹은 '고종(苦種)'이 혼용되어 나타나고 있으나, 팔리본에는 일괄적으로 Vyagghapajja[호로(虎路)에 머무는 자]로 되어 있어 '제(帝)'자를 '호(虎)'자로 해석하고 있다. 팔리본 내용을 참고로 할 경우, '호종'은 바두(婆頭)촌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 외에 송·원·명 3본에는 이 글자가 모두 '고(苦)'자로 되어 있다. 

11) 고려대장경 본문에는 '계정단(戒淨斷)'으로 되어 있으나, 앞 내용에 대한 부연설명이라면 '계청정(戒淸淨)'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이후의 문장 내용도 '청정'이 '정단(淨斷)'으로 대치되었고, 송·원·명 3본에도 '정단'으로 되어 있으므로 이를 따라 해석하였다.
  
  
566. 나가달다경(那伽達多經) ①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암라(菴羅)부락 암라림(菴羅林)12)에서 많은 상좌 비구(上座比丘)13) 들과 함께 계셨다. 
  그 때 질다라(質多羅)14) 장자가 여러 상좌 비구들에게 찾아가 그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한쪽에 물러나 앉았다. 그 때 여러 상좌 비구들은 질다라 장자를 위해 갖가지로 설법하여, 가르쳐 보이고 기뻐하게 하였고, 갖가지로 설법하여 가르쳐 보이고 기뻐하게 한 뒤에 잠자코 앉아 있었다. 그 때 질다라 장자는 여러 상좌 비구들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나가달다(那伽達多) 비구의 방으로 찾아가 나가달다 비구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서 한쪽에 물러나 앉았다. 

  그 때 나가달다 비구는 질다라 장자에게 물었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푸른 틀에 흰 천을 덮고
   한 바퀴로 굴러가는 수레여
   결박을 여의고 관찰하며 오는 자
   흐름을 끊어 다시는 얽매이지 않네.
  
  장자여, 이 게송에는 어떤 뜻이 있습니까?

  질다라 장자가 말했다.
  존자 나가달다여, 세존께서 이 게송을 말씀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질다라 장자가 존자 나가달다에게 말했다.
  존자여, 잠깐만 조용히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지금 그 뜻을 사유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잠깐동안 잠자코 생각한 뒤에, 존자 나가달다에게 말했다.
  '푸르다'는 것은 계를 말함이요, '흰 덮개'는 해탈을 말하며, '한 바퀴'란 몸에 대한 생각[身念]이요, '구른다'는 것은 굴러 나아간다는 뜻이며, '수레'란 지관(止觀)을 말합니다. 여의는 '결박[結]'에 세 가지 결박이 있으니, 이른바 탐욕·성냄·어리석음입니다. 저 아라한은 모든 번뇌[漏]가 이미 다하고 이미 멸하고 이미 알아서, 마치 다라(多羅)나무 밑동을 베어내면 다시는 생기지 않듯 그 근본을 이미 끊어 미래 세상에서도 멸해15) 일어나지 않는 법이게 합니다. '관찰한다'는 것은 본다는 뜻이요, '오는 자[來]'란 그 사람을 가리키며, '흐름을 끊었다'는 것은 애욕으로 나고 죽음에 흐르는데, 저 아라한 비구는 모든 번뇌를 이미 다하고 이미 알아, 마치 다라 나무 밑동을 베어내면 다시는 생기지 않듯 그 근본을 끊어 미래 세상에서도 일어나지 않는 법이 되게 했다는 뜻입니다.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른바 세 가지 얽맴[縛]인 탐욕의 얾맴·성냄의 얽맴·어리석음의 얾맴에서, 저 아라한 비구는 모든 번뇌를 이미 다하고 이미 끊고 이미 알아, 마치 다라 나무 밑동을 베어내면 다시는 생기지 않듯 그 근본을 끊어 미래 세상에서도 일어나지 않는 법이 되게 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존자 나가달다여, 세존께서는 이런 게송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푸른 틀에 흰 천을 덮고
   한 바퀴로 굴러가는 수레여
   결박을 여의고 관찰하며 오는 자
   흐름을 끊어 다시는 얽매이지 않네.
  
  이렇게 세존께서 말씀하신 게송을 나는 이미 분별하였습니다. 
  존자 나가달다가 질다라 장자에게 물었다.
  이 이치를 당신은 이전에 들은 적이 있습니까?
  들은 적이 없습니다.

  존자 나가달다가 말했다.
  장자여, 당신은 좋은 이익을 얻었습니다. 이 매우 깊은 부처님 법에서 성현의 지혜의 눈을 얻어 들어가셨군요. 

  그 때 질다라 장자는 존자 나가달다의 말을 듣고, 함께 기뻐하면서 예배하고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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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암바라녀(菴婆羅女)가 보시한 동산숲을 말함.
13) 상좌(上座)에 앉은 사람이라는 뜻. 승려에 대한 2인칭의 경어. 장로. 교단 중에서 수행을 쌓은 지도적 지위에 있는 사람을 말함. 덕(德)이 뛰어난 수행승으로서 대덕(大德)·존자(尊者)·구수(具壽) 등은 그에 대한 경칭. 10년 이상 수행을 쌓은 승려의 호칭. 일반적으로 수행승의 경칭으로도 쓰여짐. 

14) 팔리어로는 Citta이며, 부처님 재가(在家) 제자 가운데 지혜 제일인 인물임. 
15) 고려대장경 본문에는 '멸(滅)'자로 되어 있으나, 명본(明本)에 의거하면 '성(成)'자로 되어 있고, 이후 본문의 반복되는 문장에도 '성'자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성'자의 오기(誤記)인 듯하다.
  
  
567. 나가달다경 ②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암라 부락 암라림(菴羅林)의 정사에서 많은 상좌 비구들과 함께 계셨다. 
  그 때 질다라 장자는 여러 상좌 비구들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 그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한쪽에 물러나 앉았다. 그 때 여러 상좌 비구들은 질다라 장자를 위해 갖가지로 설법하여, 가르쳐 보이고 기뻐하게 하였고 가르쳐 보이고 기뻐하게 한 뒤에 잠자코 있었다. 
  그 때 질다라 장자는 존자 나가달다 비구의 처소에도 찾아가 그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한쪽에 물러나 앉았다. 존자 나가달다가 질다라 장자에게 말했다. 

  무량심삼매(無量心三昧)·무상심삼매(無相心三昧)·무소유심삼매(無所有心三昧)·공심삼매(空心三昧)16)가 있는데, 어떻습니까? 장자여, 이 법은 여러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이름이 있는 것입니까? 뜻은 하나인데 여러 가지 이름이 있는 것입니까? 

  질다라 장자가 존자 나가달다에게 물었다. 
  이 여러 가지 삼매는 세존의 말씀입니까, 존자께서 자의적으로 하신 말씀입니까?

  존자 나가달다가 대답하였다.
  이것은 세존의 말씀입니다.
  질다라 장자가 존자 나가달다에게 말했다. 
  제가 잠시만 이 뜻을 사유하게 해주십시오. 그런 다음에 대답하겠습니다.
  그리고 잠깐 사유한 뒤에 존자 나가달다에게 말했다. 
  어떤 법은 여러 가지 뜻과 여러 가지 이름과 여러 가지 맛이 있으며, 어떤 법은 뜻은 하나인데 여러 가지 맛이 있습니다. 

  다시 장자에게 물었다.
  어떤 법에 여러 가지 뜻과 여러 가지 이름과 여러 가지 맛이 있습니까?
  장자가 대답하였다. 
  무량(無量)삼매란, 이른바 거룩한 제자는 마음이 자애로움과 함께하여 원망도 없고 미움도 없고 성냄도 없어, 너그럽고 넓고 중후한 마음으로 한량없이 닦아 익히고 두루 인연해 일방(一方)에 충만하게 합니다. 이와 같이 2방·3방·4방·상하의 일체 세간에 마음이 자애로움과 함께하여 원망도 없고 미움도 없고 성냄도 없어, 너그럽고 넓고 중후한 마음으로 한량없이 닦아 익혀 모든 곳에 충만하게 하고, 일체 세간에 두루 인연해 머뭅니다. 이것을 무량삼매라 합니다. 

  어떤 것이 무상(無相)삼매인가? 이른바 거룩한 제자는 일체 모양을 생각하지 않아서 무상심삼매를 몸으로 증득합니다. 이것을 무상심삼매라 합니다. 

  어떤 것이 무소유심(無所有心)삼매인가? 이른바 거룩한 제자는 일체 한량없는 식입처(識入處)를 건너, 소유함 없이 소유함 없는 마음에 머뭅니다. 이것을 무소유심삼매라 합니다. 

  어떤 것이 공(空)삼매인가? 이른바 거룩한 제자는 세상이 공한 것을 세상은 공하다고 사실 그대로 관찰하여, 공함에 항상 머물러 변함 없이 나[我]도 아니요 내 것[我所]도 아니라고 봅니다. 이것을 공심(空心)삼매라 합니다. 이것이 법에 여러 가지 뜻과 여러 가지 이름과 여러 가지 맛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장자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법이 뜻은 하나인데 여러 가지 맛이 있다는 것입니까? 
  존자여, 이른바 탐욕은 한량이 있으나 만일 다툼이 없으면, 이것은 가장 한량없는 것입니다. 이른바 탐욕은 모양[相]이 있고 성냄과 어리석음도 모양이 있으나 만일 다툼이 없으면, 이것은 모양이 없는 것입니다. 탐욕은 곧 소유요 성냄과 어리석음도 소유이나 만일 다툼이 없으면, 곧 소유함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다툼이 없으면 공하여 탐욕에 대해 공하고 성냄과 어리석음에 대해 공하여, 공함에 항상 머물러 변함 없이 나도 아니요 내 것도 아니면, 이것을 법이 뜻은 하나인데 여러 가지 맛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존자 나가달다가 물었다. 
  어떻습니까? 장자여, 당신은 이러한 이치를 이전에 들은 적이 있습니까?
  존자여, 들은 적이 없습니다. 
  다시 장자에게 말했다. 
  당신은 큰 이익을 얻었습니다. 이 매우 깊은 부처님 법에서 현재에 성현의 지혜의 눈을 얻어 들어가게 되었군요.
  질다라 장자는 존자 나가달다 말을 듣고, 함께 기뻐하면서 예배하고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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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팔리본에는 앞의 각 삼매들이 해탈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