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있다"는 기본적 사실을 이해하십시오
외국에서 오는 거의 모든 방문객들은 그의 책 [아이 엠 뎃(I am that)을 읽고서 깊은 감명을 받은 후,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그를 찾은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들 중에는 수년간 영적 추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보면, 그들의 첫번째 방문은 대체로 이렇다.
그들의 마하리지를 방문하여 보이는 최초의 방문은, 어렵게 얻은 연차 휴가를 써서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 이곳에 온 것이 과연 올바른 판단이었는가 하는 의심이다.
마하리지 집의 불결한 환경, 비좁은 다락방, 별로 성스러운 특징이 없어 보이는 그의 외모, 보잘 것 없는 옷차림 등도 그들의 그러한 의심을 한 몫 거든다.
그러다가 몇번 대화에 참석하고 나면 그들은 완전히 변한다.
그리고 돌아갈 때 쯤이면 그들은 다음 번 방문을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외국인 방문객들이 처음 그를 찾았을 때 그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또 다른 요소가 하나 있다.
그것은 마하리지의 행동이 일상의 보통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관념이 모호하기는 하지만, 깨달은 성인은 이러이러하게 행동해야 할 것이라는 그들의 관념에 마하라지의 행동이 맞지 않아 보이는 것이다.
그의 좁은 방벽에는 많은 신들과 성인들의 그림으로 어지러져 있고, 하루에 네 번씩 바쟌(기도)의 찬송을 올리며, 담배를 피워댄다. 또한 때때로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는 그저 이웃집 아저씨마냥 쾌활하게 답한다.
외국인 방문객들은 이러한 모든 것에 당황해 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성자란, 자신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앉아 엄숙하게 이야기하고, 때로는 한 두 가지 이적을 행하는 멋들어진 수염을 한 한 선황색 법복의 도사이리라.
그러나 그들은 아주 평범한 촌부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화에 참석해 본 사람이 아니라면, 어째서 깨달은 사람이 하루 네 번씩 바쟌을 행하느냐고 묻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때로는 실제로 그러한 질문들이 나온다.
어째서 담배를 피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그때 마하리지의 대답은 간단하다.
"왜 안되지요?"
마하리지는 이 같은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이 몸과 나는 89여년 동안을 함께 해왔습니다.
왜 이 몸이 이미 익숙해진 몇 개의 하찮은 부스러기를 받아 들이면 안되는 가요?
또한 하루에 몇 번씩 하는 바잔의 경우, 그건 내 스승이 계시던 시절부터 해오던 일과 중의 하나였습니다.
내가 소위 '깨달음'이라는 것은 그때부터 얻고 있었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해왔고 별로 해(害)도 되지 않는 것을 굳이 그만 두어야겠다고 생각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요?
꼭 그렇게 해야 한다고 느꼈어야만 합니까?
사람은 누구나 주어진 생을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그 자신이 알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그가 무엇을 하는지가 문제가 되겠어요?
만약 사람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통각(統覺)한다면,
개인의 이분된 마음이 아니라 완전한 마음으로 전체적 현시를 이해한다면,
그 사람은 깨어남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 그가 무엇을 하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이지 한 개별적 존재가 독립적으로 뭔가를 행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의식의 껍대기가 아니라 의식의 현존(現存) 그 자체입니다.
또한 우리는 시현된 것들을 인식하는 정신적 기관일 뿐인 몸도 아닙니다.
정신적 기관이라 하는 것은 시-공간 개념에 불과하고 따라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뭔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독립된 것처럼 보이는 외양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삶이란 무엇일까요?
이 우주에서의 삶이란 개개인이 무어라고 생각하든 "현시의 작용함"일 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수 있다면, 홍수라든가 지진이라든가 하는 파괴적 현시의 것들은 고통을 줄만한 아무런 아픔의 도구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개개의 몸들은 서로 다른 것들의 먹이가 될 뿐입니다.
쥐는 고양이에게 먹히고, 양이나 닭은 사람에게 먹히며, 사람이나 여타의 동물들은 사자의 먹이가 되는 것입니다. 손익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렇듯 누군가에 이익이 되는 것은 다른 것에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실 일어난 것같은 그 어떠한 일일지라도 그것은 현시가 일어나는 작용일 뿐입니다.
각각의 개체들에게는 그 모든 것이 그 자신의 행위나 경험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사실은 어떠한 현상적 대상(그것들은 지각하는 존재가 상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도 모를 것이다)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개체적 개념이나 행동 따위는 개념에 불과한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일단 이것이 명백해지면 책임감이라든지 죄의식이라는 것은, 지각있는 존재가 자신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자율적인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는 그릇된 관념에서 비롯된 상상의 개념이라는 것이 자동적으로 이해될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활동의 다양한 영역 - 예술, 과학, 운동 걍기 등- 에서 두드러진 본보기는 어떤 것일까요?
그것들은 이렇게 다양한 물질적 형태를 통해 의식에 의해 만들어진 위대한 작품으로, 경탄해야 할 것들입니다.
하지만 개념적 현상에 불과한 개별적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명백히 이해해 봅시다.
아마도 이러한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그것들을 개개인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그 일을 이루는 것일까?
대답은 이렇습니다. " 개별적으로는 결코 아무도 아니다."
시현의 작용은 의식 안에서 프라즈마(순수의식)를 통해 일어납니다.
이 프라즈마가 현시라는 위대한 꿈의 드라마에서 모든 역활을 담당하고 있으며,
이 전체적 꿈의 쇼의 배우이자 연출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의식의 현존의 근원이 바로 실재인 것입니다.
지각하는 존재가 작용하고 반작용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의 작용은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푸른 창공, 매혹적인 달, 반짝이는 별을 경탄합시다.
자연의 이 아름다음을 시로 읊조려 봅시다.
수세기에 걸쳐 지구상에 내려왔던 화신(化身,아바타)들을 사랑합시다.
하루에 네 번 바쟌을 노래 합시다.
그러나 이것만은 잊지 맙시다.
진리의 참모습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 - -
실체인 나는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용함"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묻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루종일 무엇을 하는가?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인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
우리가 삶이라고 알고 있는 것에 대해 깊히 생각해 볼 수 있다면,
하루 하루 생활 속에서 하는 일이라는 것이 모두 "대상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현시란 연속적인 대상화 일 뿐입니다.
깊은 꿈 속에서 의식이 휴식을 들게 되면 모든 대상화가 멈춘다는 사실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그때 대상화된 모든 우주 역시 멈춤니다.
깊은 잠 속에서는 어떠한 자아도, 어떠한 세상도 어떠한 신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함"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대상화 일 뿐입니다.
의식이 있는 한은 현시의 작용이 일어나게 되는데,
쓸데 없이 자신을 행위자와 동일시함으로써 책임과 죄를 끌어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식의 내용물이 되는 마음이 비어 있을 때,
즉 의식이 휴식하여 멈춰지면,
실타래를 풀어 온갖 것을 엮어내는 마음의 작용 또한 고요히 가라앉습니다.
마음이 "행함"을 멈추게 되면 그것은 그저 있을 뿐입니다.
대상화가 사라지면 우리의 절대적 존재가 "있고",시현된 세계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존재합니다. " 또는 "나는 존재합니다" 최소한 이러한 기본적 사실은 이해해야 합니다.
-라메쉬 발세카 지음, 이명규 역<담배가계의 성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