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두 법륭선사의 심명(心銘) 공부(16)
[본문]
開目見相, 心隨境起,
心處無境, 境處無心,
將心滅境, 彼此由侵,
心寂境如, 不遺不拘
눈을 뜨고 상(相)을 보니
마음이 경계 따라 일어나나
심처(心處)에 경계 없고
경처(境處)에 무심(無心)하다.
마음 가지고 경계 멸하고자 하지만
피차(彼此,서로) 침투(상응) 됨에 말미암은 것,
마음은 공적(空寂)하고 경계는 여여(如如)하나니
버리려 하지도 말고, 구속받지도 말라.
[해설]
마음은 경계따라 일어나나 마음은 본래 공적하여 어떠한 경계도 지님이 없다.(無所有)
그래서 경(境處)에 무심(無心)할 뿐이다.
이때에 경계는 이미 대상이 아니다.
무심하여 능(能, 인식주체)의 자리가 따로 없어 소(所: 인식대상)의 자리도 따로 없는 까닭이다.
마음이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다.
마음은 능소(能所)를 떠나 있고, 대상이 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런데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경계를 멸하려 함은 또 하나의 망상을 더하는 것이 된다.
마음과 경계는 서로 침투(상응)되어 일어나는 것이니 그 실성(實性)이 없다.
경계에 상응하여 염착되는 중생의 생멸심은 환(幻)과 같고,
단지 환과 같음을 요지하여 경계에 염착하지 않을 뿐이다.
마음은 무상(無相)이고 무생(無生)이어서 본래 공적(空寂)하다.
경계 또한 마찬가지여서 일체법이 평등 일여(一如)한지라 언어분별을 떠난 까닭에 여여(如如)라 한다.
따라서 버려야 할 법이 따로 없다.
버리려 함이 있으면 이미 그 법에 구속받고 있는 것이다.
단지 심성(心性)이 본래 어떠한 것도 지니는 바가 없음(無所有)을 요지(了知)하면 돤다.
이렇게 되면 무명이 힘을 잃게 되어 걸림이 없게 된다.
그렇지 아니하고 무엇을 버리려 한다면 이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 되어
모든 존재는 유(有)라 할 수도 없고, 무생(無生)이라는 리(理)에 어긋나게 되어 버린다.
요지(了知)한다는 말은 '깨달아(了) 안다(知);는 뜻과 '뚜렷이(了) 안다(知)'라는 두 가지 뜻을 함께 갖추고 있다.
그래서 일체법이 그러함을 깨달아 뚜렷이 알고 있으면 된다는 뜻이며,
그렇게 요지하고 나면 그 뜻이 익어가면서 현실에서 구현된다.
그리하여 언어도단(言語道斷)이고 심행처멸(心行處滅, 마음 갈곳을 멸함)의 자리에 이른다.
-박건주 역주 <心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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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고 깨어 있으면 모양을 보게 되어
마음이 경계를 따라서 일어난다네.
開目見相 心隨境起
마음의 주의를 경계(대상)에 두지 않으면
경계가 있을지라도 무심할 뿐이니,
心處無境 境處無心
만일 마음을 가지고 경계를 없애려 한다면
마음과 경계가 서로간에 영향을 주고 받게 된다네.
將心滅境 彼此由侵
마음이 고요하면 경계도 그대로 여서
구하려 하지도 않고 버리려고 하지도 않는다네.
心寂境如 不遺不拘
- 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