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자아 탐구 실제 수행방법 및 이론 정리 (56)

무한진인 2022. 1. 10. 22:21

ㅇ.사마디

사마디는 마음의 의식적인 노력을 통하여 참나에 몰입된 상태이다. 

그러한 몰입은 깊은 잠을 잘 때, 무아지경에 빠졌을 때, 기절했을 때, 

그리고 스트레스와 불안이 극심할 때 일어난다. 

그러나 그와 같이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가라앉는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그런 무의식적인 몰입 이전과 똑같이 무지한 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노력의 결과인 사마디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니르비칼파 사마디(nirvikalpa samadhi)이며, 

다른 하나는 사하자 사마디(sahaja samadhi)이다.

일반적으로 전자를 영적인 경험에서 궁극적인 것으로 보는 반면, 

사하다 사마디 즉 자연스러운 사마디를 강조하는 것은 오직 라마나의 문헌 뿐이다. 

 

이 두 가지 유형의 사마디에서 마음은 그 근원에 닻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니르비칼파 사마디에서는 외부세계에 대한 자각이 없다. 

일단 외부세계에 대한 자각이 되살아 나면 그 사마디상태는 깨어지며, 

이 상태를 다시 되찾으려면 노력을 해야 한다. 

이 유형의 사마디에서는 마음이 여전히 살아 있으며, 

마음을 밖으로 밀어내는 습성들고 남아 있다. 

 

라마나가 언급한 사하지 사마디는 다르다. 

이 상태에서는 대상들과 행위들과의 접촉이 고요함과 평정의 상태를 방해하지 않는다. 

"그대는 그대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참나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마음은 '죽을 '것이다. 

모든 경향성들은 없어질 것이다. 

그것들은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볶은 씨앗들과 같아서 싹을 틔울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수행자가 갑자기 사하자 상태를 깨달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오직 자기 탐구를 통해 반복적으로 근원에 몰입된 결과일 뿐이다. 

수행하는 동안 수행자의 마음은 때로 내면을 향하고 때로는 바깥을 향할 것이다. 

마음은 점점 더 정화됨에 따라 안에 머물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마침내 마음은 필요한 만큼을 제외하고는 밖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꼭 필요한 생각을 하고 나면, 마음은 한낮의 잔잔한 바다와 같을 것이다. 

고요한 마음은 '존재의식'을 영적 심장 속의 끊임없는 고동으로서 경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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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절이나 깊은 잠, 지나친 기쁨이나 슬픔, 두려움과 같은 것들에 의해 생각이 강렬하게 붙잠힐 때, 

마음은 그 근원인 영적 심장으로 돌아간다. 

그런 몰입은 무의식적이며, 그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나 수행자가 의식하며 영적심장으로 들어갈 때, 

그것을 사마디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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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 : 사마디가 무엇입니까? 

 

마하리쉬 : 마음이 무지한 상태로 참나와 교제할 때, 그것을 니드라(nidra,잠) 즉 마음이 무지한 채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마음이 의식하거나 깨어있으면서 본래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사마디이다. 

사마디는 깨어 있는 상태로 끊임없이 참나 안에 있는 것이다. 

니드라 혹은 잠도 역시 참나 안에 있지만,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 

사하지 사마디에서는 그 교제가 끊이지 않는다. 

 

질문자 : 케발라 니르비칼파 사마디와 사하자 니르비칼파 사마디는 무엇입니까? 

 

마하리쉬 : 마음이 참나로 돌아 가지만 파괴되지 않는 것이 케발라 니르비칼파 사마디이다. 

여기에는 네 가지 장애물이 있다. 

즉(1) 마음의 동요, (2) 생명력 즉 프라나, (3) 몸, 그리고 (4) 드리스티(drishti)이다. 

케발라 니르비칼파 사마디에서는 바사나(vasana, 경향성)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따라서 묵티를 얻지 못한다. 

오직 삼스카라들이 파괴된 후에야 수행자는 해방에 이를 수 있다. 

 

질문자 : 언제 사하지 사마디를 수행할 수 있습니까? 

 

마하리쉬 : 처음부터 할 수 있다. 오랜 세월 케발라 니르비칼파 사마디를 수행하더라도 바사나를 뿌리 뽑지 못하면 해방을 얻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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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 : 그렇다면 스승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마디는 무엇입니까? 

 

마하리쉬 : 요가에서 사마디라는 용어는 일종의 무아지경을 지칭하며 다양한 종류가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사마디는 다르다. 그것은 사하지 사마디이다. 이 상태에서는 그대는 사마디 상태에 있지만, 활동하고 있을 때도 고요하고 평온한 채로 있다. 그대는 내면 갚은 곳의 진정한 참나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대는 걱정이 없고, 불안이 없고, 근심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그대에게, 자아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일은 그대가 의식적으로 합일해 있는 어떤 것에 의해서 행해진다. 

 

질문자 : 이것이 사하자 사마디이며 가장 바람직한 상태라면, 니르비칼파 사마디는 필요하지 않습니까? 

 

마하리쉬 : 라자요가의 니르비칼파 사마디는 나름의 쓸모가 있을수 있다. 그러나 갸나(Jnana)에서는 사하지 스티티(sthiti) 또는 사하자 니슈타(nishta) 자체가 바로 니르비칼파 상태이다. 

왜냐하면 이 상태에서 마음은 의심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마음은 진리를 확신한다. 마음은 실재의 현존을 느낀다. 

활동하고 있을 때에도 마음은 실재, 참나, 지고의 존재 안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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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 : 스와미, 어떤 사람들은 몸과 감각, 마음의 변화나 활동이 사마디에 걸림돌이라고 말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어느 족이 옳습니까? 

 

마하리쉬 : 둘 다 옳다. 케발라니르비칼파 사마디에서 마음은 일시적으로 잠들어 활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은 아직 소멸되지 않았다. 그는 나사(nasa)가 아니라 라야(laya)에 있다. 따라서 대상들이 육체와 감각들에 접촉할 때 혹은 마음이 다른 식으로 작용하고 있을 때, 사마디와 연결된 그의 가는 실은 끊긴다. 

그러나 사하자 니르비칼파 사마디로 알려진 완전한 사마디의 경우에는, 사마디 상태가 영원해졌으며 본성의 일부가 되었다. 대상들은 그의 육체와 감각들과 접촉할 수도 있고 그의 마음도 작용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사마디는 방해받지 않고 그대로 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를 설명하는 예화가 있다. 

한 소년이 저녁밥을 먹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한 번 잠이 들면 깊히 잠들어 버리는 까닭에 가족은 온갖 노력을 다한 뒤에야 겨우 소년을 깨워 음식을 조금 먹게 할 수 있었다. 소년은 그때 자신이 밥먹고 있는 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였다. 아침에 일어난 뒤에 그는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우리 주면에 흔한 달구지 꾼을 예로 더 들어보자. 

그들은 달구지에 앉거나 누워서 잠을 잔다. 그러나 소들은 달구지를 목적지로 잘 끌고 간다. 

이러한 두 사례들에서, 잠은 소년이나 달구지꾼으로 하여금 몸의 움직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였다. 

사하지 사마디의 경우, 몸의 소유자로 하여금 몸의 움직임이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의식-희열에 도취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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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 : 이 해방 혹은 깨달음은 즉각적으로 옵니까, 아니면 점진적으로 옵니까? 

 

마하리쉬 : 직관의 토대가 되는 지적인 힘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는 경우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깨달음인 직관은 시간이 적용되지 않는 어떤 것이다. 

참나를 깨닫는 것과 시간에 대한 의식은 왁스와 물의 관계와 같다. 

사마디에서는 시간에 대한 감각이 없다. 

빠른 깨달음 혹은 늦은 깨달음으로 여겨지는 것은 사실은 깨달음 자체가 아니라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준비의 빠름이나 늦음이다.  

 

                                           -나타라잔 편집,김병채 옮김 <그대 자신을 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