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롱하러 왔다가 기도하게 되었다.
- 눈 먼 젊은이의 진정한 눈 -
한 번은 꽤나 길었던 강연 겸 대화의 말미에 마하리지가 질문을 던졌다.
강연 중간 중간 그의 기본적인 가르침 - "나는 존재한다"라는 현존의식이 바로 모든 것이 나타나는 근본개념이며,
이러한 개념자체도 단지 환상일 뿐이다 -을 환기시키던 마하리지는 이렇게 물었다.
"여러분들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했습니까?"
모두 조용했으나 한 사람이 대답했다.
"예, 선생님 이해합니다. 하지만 - - -."
그 대답을 듣고는 마하리지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사람은 대답은 그렇게 했으나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안 것이다.
마하리지는 요점을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항목별로 나누어 다시 설명했다.
1. "나는 존재한다(I am)"라는 사실 혹은 의식은 지각이 있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자산"이다.
사실 의식이 없으면 지각이 있을 수 없다.
2. "나는 존재한다(I am)"가 없을 때, 즉 깊은 잠 속에서와 같을 때는 몸도 없고 바깥의 세계도 없고 신도 없다.
따라서 이 한 점의 의식이 전 우주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은 육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육체라는 존재는 일시적인 것이고 따라서 거기에 의지하고 있는 의식도 일시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4. 의식이 영속적이지 못한 일시적인 것이니 의식이라는 매체를 통해 얻어지는 일체의 것들은 진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버려야 하거나 브라만에게 돌려줘야 할 것들이다.
브라만이란 의식 있음, 존재, "나는 존재한다(I am)", 또는 이슈와라, 신 등으로 불리우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는 정반대의 개념인 안다는 것과 무지는 모두 앎의 영역에 속하며
따라서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오로지 인지할 수 없는 영역에 존재한다.
일단 이러한 사실들이 이해되면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다.
사실 무엇인가를 한다는 "실재(entity)"는 없다.
마하리지는 이렇게 말을 하고는 눈을 감고 깊히 침묵했다.
작은 방안이 눈부신 평화 속에 빠져 드는 것 같았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얼마 후 마하리지가 눈을 떴고 모두 원래의 상태로 돌아 왔다.
그때 누군가가 마하리지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얼마 전 가난한 눈 먼 젊은이가 마하리지의 아침 강연과 그날 저녁 강연 단 두 번을 참석하고 나서는
"자유로워졌다"고.
자리가 끝날 무렵 그 젊은이가 마하리지에게 다가와 작별인사를 올렸다.
마하리지는 그를 보더니 모든 것을 다 이해했느냐고 물었다.
젊은이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네"하고 대답했다.
다시 마하리지가 무엇을 이해했느냐고 묻자 젊은이는 잠시 조용히 앉아 있더니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진리가 무엇인지 이처럼 너무나 명확하게, 이처럼 간단하게, 이렇게도 빨리 보여주신 것에 대해 무어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이 몸 이전의, 또한 '나는 존재한다(I am)'를 인식하기 이전의 내가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 보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즉, '태어나기 이전'을 참구해 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둘째, 이 몸과 함께 있는 의식은 내가 알지 못한 채 제게 주어졌고 '참나'는 '태어난'적이 없었다고 제게 일러 주셨습니다.
셋째, 이 몸과 함께 있는 의식은 '태어난' 것이고 또한 일시적인 것이며 시간이 지나면 원래의 상태 즉, 항상 존재하지만 나타나지 않는 몸과 의식 이전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넷쩨, 그러므로 나는 의식이 아니며 또한 의식을 깃들이게 하는 몸도 아닙니다.
다섯째, 결론적으로 오직 '참나'만이 존재할 뿐이며, 나라든가 내 것, 너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해합니다.
즉 존재하는 '그것'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이해합니다"
눈 먼 젊은이로부터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이같은 답변을 다 듣고 난 마하리지는 이해와 사랑이 가득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선생님, 진실로 선생님의 말씀을 확연히 알았습니다. 이제 할일이라곤 없습니다. 계속 '살아 나가게' 되겠지요"
그리고는 마하리지에게 지극한 예를 올렸다.
그가 떠난 후 마하리지는 말했다..
"그 젊은이는 사실 눈 먼 사람이 아니야 정말로 진정한 눈을 가졌어. 그와 같은 사람은 거의 보기 드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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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롱하러 왔다가-
마하리지와 방문객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들어보면 우선 갖가지 질문의 다양성에 놀라게 되고 (때론 장난스러운 질문들도 많다), 그러한 질문들에 대한 마하리지의 자연스럽고도 쉬운 대답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질문과 대답들은 가급적 정확하게 통역되는데, 질문은 그가 유창하게 사용할 수 있는 마라디(Marathi)어로 번역되고 마하리지는 번역된 마라디 단어들을 사용해서 질문에 대답한다.
그런데 그는 종종 번역에 사용된 마라디 말들을 동음이의어를 사용하거나 말을 약간 바꾸든다 하여 교묘히 대답하기 때문에, 통역하게 되면 보통 사용하는 말 뜻과는 완전히 다르게 되기도 한다.
사실 그런 식의 대답에 대한 정확한 의미는 어떻게 번역하더라도 완전하게 옮겨질 수 없다.
질문하는 사람의 정신적 수준이나 질문에 숨어 있는 의도를 들추어 내기 위해 마하리지가 굳이 그런 식으로 마라디어를 구사하는 이유는 대개 질문하는 사람의 가슴에 불을 붙이려는 심정에서라고 솔직히 인정한다.
만일 질문하는 사람이 이러한 모임을 재미로 여기면, 더 좋은 주제나 말 상대가 없을 경우 마하리지는 기꺼이 그 장난에 응한다.
때로 그를 찾아 오는 사람들 중에는 매우 예리한 지성을 지녔지만 황량한 허무주의로 단단히 무장된 이례적 유형의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열린 마음과 꿰뚫을 듯한 지적 호기심을 지녔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종교적 가르침을 주는 사람들의 모호하고 선명치 않는 듯한 말은 쉽게 따르지 않고 확실하고 분명함만을 고집하며 그런 식으로 납득하고자 한다.
물론 마하리지는 그런 타잎의 사람을 알아채고 대화를 명쾌하게 끌고 나가 그런사람을 어리벙벙하게 해 놓는다.
마하리지의 말 속에 깔려 있는 직관적 인식이 그런 지식인들이 내놓는 형이상학적인 말장난을 일축하는 것이다.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마하리지가, 결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굳게 믿고 있는 그러한 회의적 불가지론자와 현학적인 학자들의 상대 이상이 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놀라워한다.
마하리지의 말은 항상 충격적이고 기지가 번뜩인다.
그는 결코 산스크리트어나 기타 다른 언어로 쓰여진 경전들의 권위있는 말을 인용하는 법이 없다.
누군가가 꽤 유명한 구절을 인용할라치면 마하리지는 그것을 마라디어로 통역해 줄 것을 원한다.
그의 직관적 인식은 경전을 인용한다든가 하는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
사실 그는 한계가 없어 보인다.
마하리지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그 어느 것의 도움도 없이 홀로 서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말한 것은 진리라는 뜻이다.
한번은 자주 찾아오는 사람 중 하나가 자기 친구를 한 사람 데리고 와서 마하리지에게 소개했다.
소개하기를, 이 사람은 어떠한 것일지라도 그것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기 전에는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질문해 보는 아주 날카로운 사람이라고 했다.
마하리지는 그러한 그를 만나게 되어 기쁘다고 했다.
그 사람은 수학 교수였다.
마하리지는 그 사람에게 일체의 가정들은 제쳐두고 실제적인 문제로 바로 들어가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마하리지의 이같은 제안에 그 사람은 몹시 놀란 표정을 하였다가, 곧 그 제안에 아주 기쁘다고 대답했다.
마하리지 : 자, 지금 당신은 여기 내 앞에 앉아 있습니다. "당신"이 정확히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수학교수 : 나는 육체를 가지고 있으며, 희망과 야망을 지닌 49세의 남자입니다.
마하리지 : 십년 전 당신의 모습은 어땠나요? 지금과 같았습니까? 열 살 때는 어땠어요? 갓난아기였을 때는요?
또 그 이전은? 당신이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상은 그때 그때마다 변하지 않았나요?
수학교수 : 예, 나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항상 변해 왔습니다.
마하리지 : 하지만 당신 자신에 대해 깊히 들어가 보면 변하지 않는게 있지 않습니까?
수학교수 : 예, 있습니다. 무어라 규정지을 수는 없지만.
마하리지 : 그것은 존재의 단순한 느낌,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 현존의 느낌이 아닌가요? 의식이 없다면 몸이 존재할까요? 세상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또, 신이라든가 창조주라는 개념이 과연 있을까요?
수학교수 : 생각해 볼 점이군요. 그러면 선생님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마하리지 : 나는 "이 내 존재(this - I - am)" 혹은 "존재 바로 그것"입니다.
수학교수 :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마하리지 : 당신이 "알 것 같다"라고 말했다면 그게 그른 것입니다.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좀 더 간단하게 말해 볼까요? 나는 의식있는 개인이 아니라 소위 "의식 있는 존재 그 자체"입니다.
수학교수 : 이제 알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제가 지금 말하는 것처럼 "알 것 같다"라는 식으로 말하면 잘못된 것이라고 좀 전에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의도적으로 저를 혼란시키려고 하시는 건 아니시죠?
마하리지 : 그 반대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정확한 위치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객관적으로서의 나는 의식의 거울에 나타나는 "모든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나는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세계가 그 안에서 나타나는 "의식"이라는 말입니다.
수학교수 : 저는 그것을 보지 못하겠는데요. 네게 보이는 거라곤 내 앞에 나타난 것 뿐입니다.
마하리지 : 당신이 의식하지 않는다면 당신 앞에 나타나는 것들을 과연 볼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당신이 내 의식 속에서만 존재하고 내가 당신 의식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순수하게 객관적이지 않겠어요? 우리가 경험한 것이 의식이 인식하는 것에 국한 된다는 것이 명백하지 않나요? 달리 말하면 우리가 자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만 존재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개념에 불과할 뿐이지요. 잘 생각해 보세요.
수학교수 : 우리가 의식 속의 현상에 불과하고 세계 속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세계는 어떻지요?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요?
마하리지 : 내가 말한 것을 잘 생각해 보세요. 내가 말한 것에 잘못된 것이라도 있어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육체는 프라나(생명력)와 의식의 물리적 구조체에 불과합니다. 프라나-의식이 없다면 육체란 뭐겠어요? 죽은 시체일 뿐이잖아요? 개인이 존재하는 이유는 자신을 육체라고 잘못 동일시했기 때문입니다.
수학교수 : 선생님과 저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살며 일해야 하는 각각의 개인입니다. 선생님은 저를 어떻게 보십니까?
마하리지 : 나는 당신이 꿈 속에서 당신을 보듯이 이 세상에서 당신을 봅니다. 그러면 대답이 되겠어요?
당신이 침대에 누워 꿈을 꾸는 동안에도, 당신은 소위 "실제" 세계에 대응하여 당신 자신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존재하는 완벽한 세계를 창조해 놓습니다. 당신은 꿈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봅니까? 당신이 꿈에서 깨어나면, 내가 "깨어 있는 꿈"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인도됩니다. 그러나 꿈 속에서도 당신이 만들어 놓은 세계는 아주 실제적이지 않은가요? 그렇다면 실재한다고 하는 이 세상이 꿈이 아니라고 고집만 피울 수 있겠어요? 당신이 말하는 세상이라는 것은 거짓을 거짓으로, 비실제적인 것을 비실제적인 것으로, 덧없는 것을 덧없는 것으로 봄으로써 깨어나게 해야할 꿈일 뿐입니다. 당신이 그 꿈으로부터 깨어나야만 "실재"가 존재하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당신은 그저 세상을 현상적인 꿈으로, 말하자면 상상의 의지적 자유를 가지고 시간과 공간에 대한 현상적인 꿈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당신이 개별적인 존재라고 하는 것에 대해 말해보도록 합시다. 이 현상을 정신적 전제조건이나 선입견없이 열린 마음으로 분석 검토해 보는 것이 어떻겠어요? 그렇게 하면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몸이란 생명력과 의지를 위한 물리적인 구조체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몸-마음의 상관구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 개별적인 존재는 외부 자극에 반응해서 환영을 만들고 그에 따른 해석을 할 뿐입니다. 이러한 개별적 존재는 의식 속에서 투영된 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환영이라는 말입니다.
수학교수 : 꿈 속의 꿈과 제가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마하리지 : 지금까지 말한 것만으로도 당신은 많이 생각하고 명상을 해 봐야 합니다. 내가 더 말해 주길 바래요?
수학교수 : 저는 이러한 심각한 주제에 대해서 익숙합니다. 선생님께서도 그러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토론은 계속해서 논리적 결론을 내릴 수 있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마하리지 : 좋습니다. 당신이 깊히 잠들었을 때 현상적인 이 세상이 당신에게 존재합니까? 몸-마음의 상태가 끼어들기 전에 당신의 본래적 존재 그 자체를 직관적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떠올리 순 없겠어요?
과연 몸-마음의 상태에서 당신의 "존재"를 의식할 수 있겠어요? 그건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모든 현시는 의식 속에서만 있는 겁니다. 그러나 각성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절대 속의 관조 중심 속에 있습니다.
당신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의 존재자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순수존재의 원래 상태에서 의식이 물결처럼 일어나고 그 의식 속에서 세상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겁니다.
파도는 일어났다 가라앉았다 하지만 물은 여전히 그대로이며 의식도 그러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시작되기 이전에도 "나"는 존재하고 모든 종말 이후에도 '나'는 있습니다.
무엇이 일어나든 그 너머에는 '나'가 있습니다. 세상은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의식 속에서의 현시로서, 나타난 모든 것은 일려지지 않은 무한성 속으로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나타난 것은 또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어느 정도나 머무는가는 상대적이긴 하지만 시간에 제약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에 제약을 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끝이 있게 마련이고 따라서 실제적이지 못합니다.
자, 당신이 살아 있는 이 꿈 속에서 아직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알겠어요?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단지 투영일 뿐이라는 것을 알수 있겠어요?
현상화된 이 세계를 인식하면서, 또한 자신이 인식되어지는 전체성의 독립된 실체라고 생각하는 사람조차 이 가상적인 세계의 한 구성 요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겠나요?
우리 자신의 소원과 희망과 야망에 따라, 그리고 개인적 노력에 의한 계획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것 같겠지만 정말 그럴까요? 아니면 아무런 의지작용도 없이 꿈 속에서처럼 완전히 꼭두각시로 살아가는 걸까요?
생각해 보세요. 투영된 모습으로 세상이 존재하듯 꿈꾸어진 현상 또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꿈의 주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상대적인 별도의 나는 존재하지 않으며 드러난 전우주가 나 자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수학교수 : 이제 전체적인 개념을 이해한 것 같습니다.
마하리지 :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마음 속의 개념이 아닌가요? 생각이라는 것은 사물을 직관적으로 볼 때는 없는 겁니다. 당신이 이해한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이 살아있는 것을 "알" 뿐이지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학교수 : 아, 그렇군요 ! 전혀 새로운 차원을 보여 주시는 것 같습니다!
마하리지 : 나는 새로운 차원이라는 건 잘 몰라요. 하지만 적절히 표현한 것 같습니다. 생각을 멈추고 사물을 직접적으로 자각함으로써 더 이상의 개념화를 멈추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생생한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즉, 직관적으로 전체의 마음으로 보게 되면 보는 자는 사라지고, 보는 행위는 다만 "보여지는 것"이 되는 거죠.
방문객은 일어서서 처음 도착했을 때보다 더 큰 헌신과 순종으로 마하리지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가 마하리지의 눈을 보며 빙긋이 웃자, 마하리지는 왜 웃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조롱하러 왔다가 기도하게 되었다"는 영국 속담이 떠올라서 웃었다며 미소지었다.
-라메쉬 발세카 지음, 이명규 역 <담배가계의 성자> -
<2022년 1월 1일 새벽, 새해의 첫 태양이 떠오르기 1시간 전에, 같은 그 자리에서 새벽 달이 떠오르는 장면-한강변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