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첸 명상 지침(5)
질문 : 아누요가에서는 기맥(氣脈)과 맥륜(脈輪)을 여는 수행을 하는데, 족체에서는 이 내용이 얼마나 중요한가요?
답변 : 아누요가를 통해서 기맥과 맥륜을 여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이롭습니다. 그러나 아누요가를 하지 않고 족첸수행만으로도 이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족체수행을 할 때 여러분의 마음은 알아차림에 집중합니다. 알아차림이 강해지면 여러분의 깨달음의 에너지,빛, 힘은 점차 기맥(氣脈)과 풍기(風氣), 그리고 신체의 핵심 요소들과 자연적으로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이를 성취하려고 다른 수행을 굳이 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쨌든 아누요가와 마하요가 탄트라에서 말하기를 기맥과 차크라를 여는 것에 집중하는 수행을 할 때, 반드시 마음의 본성에 관한 명상이 결합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누요가 수행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족첸수행이 필요합니다. 이 둘을 묶으면 매우 강력합니다. 그러나 족체수행만으로도 모든 거을 할 수 있습니다.
질문 : '자연스러운 상태에 머문다'라는 문장에 대해 질문하고 싶습니다. '머문다'에 집착이 생기지는 않을까요?
<금강경>에서는 머무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했습니다.
답변 : 맞습니다. 어디에도 머물 곳은 없습니다. <능가경>에서, '본성은 이름과 가명(假名)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통을 위해서 일종의 전문용어를 이용해야만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언어를 사용하셨고, 위대한 스승들도 그렇습니다. <금강경 >자체에 300개의 게송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본성은 언어를 넘어서 있고 머무는 것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필요합니다. 스승들의 의한 언어로 돤 지침은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는데 도움이 됩니다. 이는 물론 언어가 완전히 진리이고 결함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르침에 따르면 본성은 생각, 말, 행위,상징, 그리고 집착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언어가 우리를 생각, 말 ,행위, 상징, 집착을 넘어서게 이끌어 줄 때, 그리고 절대적으로 모든 사람이 이해하게 될 때 언어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모든 종류의 언어가 필요합니다. 언어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상태로 안내해 줍니다.
언어 없이는 오직 상근기 수행자들만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위대한 스승들은 오직 침묵하기만 하면서 가르침을 펼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궁극적으로 머물 곳이 없다는 여러분이 한 말이 맞기는 하지만, '머물다'와 같은 언어는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는 필요합니다.
질문 : 족첸수행이 바르도에서 유용한가요?
답변 : 그렇습니다. 족체수행은 바르도에서 우리에게 확실하게 도움이 됩니다. 만약 현재 여러분의 족첸수행이 강하다면 여러분은 바르도를 거칠 필요가 없습니다.
질문 : 아로 예세 중내의 가르침 안에 사마타 수행을 위한 특별한 설명이 있나요?
답변 :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아로의 가르침 안에는 9개의 지침들이 있지요. 하중근기 수행자들을 위한 가르침에 사마타 수행을 위한 특정한 지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음에 그것을 설명할 것입니다.
질문 : 기맥(氣脈)을 여는 수행에 관정(灌頂)과 지침이 필요한가요?
답변 : 예, 그렇습니다. 기맥을 위한 수행, 그리고 풍(風)과 명점(明點)을 위한 수행도 마찬가지로 관정과 지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 드리지만, 족첸 수행 자체만으로 이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질문 : 만약 우리가 머무름에 대해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원적(二元的)이 아닌가요? 머물지 않음과 머무름은 어떻게 다른가요?
답변 : 맞습니다. 머무름에 대한 생각은 이원적입니다. 그리고 머물지 않음도 이원론이 맞습니다. 이 양극단을 여의기 위해 가르침에서, 마음을 자연스러운 상태 자체에서 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머문다와 머물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하고 사로잡혀서도 안 됩니다. 머문다는 것은 실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우리가 양변(兩邊)에 있을 때는 그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언어가 필요합니다.
질문 : 빼뚤 린포체에 의해 정리된 이 아로의 가르침을 어느 분께서 전해 주셨나요?
답변 : 중국의 침략이 있기 전, 켄뽀 땐진 닥빠로부터 이 가르침을 40년 전에 받았습니다. 그분은 리오체 사원 강원의 강주(講主)였습니다.
질문 : 자연스러운 상태는 이원론을 벗어나 있고 완전히 마음을 넘어선 것이라 하셨습니다. 선불교에서는 이를 무문(無門)이라고 부릅니다.
답변 : 무문이 어디에 있죠? 문이 열렸나요? 닫혔나요? 이 무문의 방법은 어디인가요? 북쪽? 남쪽? 동쪽? 서쪽? 아니면 중간에 있나요? 달마대사께 물어보세요. 누가 이 무문을 만들었는지요?
(켄포 체왕 된갈 린포체께서 박수를 두번 치면서) 여기 두 번의 박수소리가 나네요. 봤나요? 들었나요? 제가 박수를 쳤어요. 여러분은 이를 보았고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어디에 무문이 있을까요?
질문 : 마음을 완전히 넘어선 거죠, 맞나요?
답변 : 만약 말장난을 한다면 오랫동안 할 수 있습니다.
질문 : 전 장난치는 것이 아닙니다. 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셨군요.
답변 : 당신을 이해합니다. 무문(無門) 저도 이해해요. 무문이라고 말할 때, 전 '비이원론(非二元論)이라고 했지요. 이들이 비슷한가요, 아닌가요? 우리는 다른 용어를 사용했지만 의미는 비슷합니다. 아닌가요?
질문 : 모든 사람의 이해를 위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상근기 + 중근기 + 하근기에 대하여 설명하셨는데, 이는 무척 이론적인 설명입니다. 색(色)이고요. 이것들로 어떻게 우리를 공성(空性)으로 이끌어 주실수 있나요?
답변 : 색(色)과 공성(空性)은 무엇이 다릅니까? 이 단어들은 철자와 발음이 더르군요. 여러분의 마음에서 이들의 의미는 어떻게 다르죠?
질문 : 색과 공의 차이는, 여러분이 저에게 좋은 것을 말할 때 제가 그 의미는 들을 수 없고 오직 소리만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제게 언짢은 말을 할 때도 저는 역시 소리만을 듣습니다.
답변 그래서 지금 여러분의 질문은 무엇입니까?
질문 : 만약 제가 이원론 너머에 있다면, 여러분이 무언가를 이야기할 때 저는 의미를 듣지 않고 소리만을 듣습니다.
답변 : 저는 이해가 안되는군요.
질문 : 어떻게 이원론(二元論)이 마음의 본성의 일부가 될 수 있나요?
답변 : 이원론도 마음의 본성의 일부가 맞습니다. 이원론은 어디에서 왔나요? 이는 공성(空性)으로부터 입니다. 바로 지금 이원론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어요. 그러나 이원론의 본질도 공합니다. 공에는 견고한 존재가 없어요. 그러니 이원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비록 이것이 진리라 하더라도 우리는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니 구분을 짓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깨달음의 부족함을 넘어서기 위해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했을 뿐입니다.
질문 : 제 생각에 이해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원(二元)을 넘어 원초의식(릭빠)에 가야 하고, 이는 첫 단계입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가 원초의식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모든 마음을 아우를 수도 있고 여기에는 이원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답변 : 그렇지 않습니다. 족체 가르침에서 견고한 근원의 마음과 같이,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원초의식'은 의식(意識)을 말합니다. 이는 견고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질문 : 죄송합니다만, 저는 티벳트 불교를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답변 : 모두 괜찮습니다. 티베트 사원에서 논쟁은 흔한 일입니다. 서로 묻기도 하고 답하기도 하지요. 우리들은 가르침의 주제들을 서로 논박합니다. 여러분이 말한 내용과 제가 답변한 내용으로 우리도 작으나마 논쟁을 한 것입니다. 티베트 인들은 이를 많이 하는데, 보기엔 싸우는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고 농담도 합니다.
질문 : 린포체님은 법사이고 저는 학생입니다. 법사와 논쟁하면 안되겠지요.
답변 :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스승과 학생들이 논쟁을 많이 합니다. 특히 불학원(佛學院)에서요. 이것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선불교(禪佛敎) 전통에선 논쟁을 많이 하지 않고 보다 직접적이죠. 스승은 단순하고 심오한 지침을 주고 학생듫은 그것을 수행합니다. 그런 다음, 만약 학생이 명상 중에 졸게되면 스승은 죽비로 학생의 어깨를 내리쳐 졸음을 쫓습니다. 이 쎈터의 몇몇 학생들이 졸릴 때 이렇게 해달라고 저희에게 말했답니다.
- 깨달음을 얻는 티베트 수행 요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