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도 없고,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다-3
방문자 : 그러면 꿈의 상태란 무엇입니까?
슈리 푼자 : 꿈의 상태와 이 생시의 상태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 두 상태 모두 그대가 대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꿈 속에서 그대는 호랑이를 보면 진짜로 두려워합니다. 만약 호랑이가 숲 속에서 그대에게 달려들면 그대는 이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너는 꿈 속의 호랑이이고, 나는 꿈 속의 라마다. 얼마든지 나를 잡아먹어 보라'고. 그대는 그렇게는 말하지 못하고, 가까운 나무 위로 기어올라갑니다.
방문자 : 스승님, 우리의 꿈 속에서의 그 빛은 어디서 옵니까?
슈리 푼자 : 그것은 제가 그대에게 물어보려고 하던 다음 질문입니다. 그대는 홀로 잠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그대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다음 다시 깨어 났습니다. '나'가 일어났습니다. 그녀('나')가 그대 밖에서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대는 그녀를 밖에 남겨두면서 그대 자신을 그녀에게 묶어 두었습니다. 만약 그대가 그 '나'에 그대를 묶은 이 끈을 잘라버리기만 하면, 그대는 다시는 깨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시는 이 생시의 상태로 깨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대는 생시의 상태도 없고, 꿈의 상태와 잠의 상태도 없는 실재의 상태로 깨어날 것입니다. 그것은 좀 다른 상태입니다. 그대는 잠의 상태에서 그것을 경험합니다.
누가 그대에게 '라마, 어떻게 주무셨어요?'하고 물으면, 그대는 '아, 아주 잘 잤습니다. 아무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잊어버렸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이와같이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대가 잠을 자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대가 잠들어 있는 동안 누가 자각하고 있었습니까? 그대가 잠들어 있는 동안 누가 그것을 즐기고 있었습니까? 거기에는 아무런 윤회계(현상계)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대가 잠자고 있을 때 그것을 즐기는 것은 누구입니까? 누가 즐기는 자입니까?
방문자 : 진아, 즉 아뜨만입니다.
슈리 푼자 : 진아는 지금 존재합니다. 그대가 잠에서 깨어날 때, 누가 깨어납니까? 그것이 진아입니까?
방문자 : 진아는 항상 깨어 있습니다.
슈리 푼자 : 깨어나는 것은 '나'입니다. 그러나 그대가 잠자고 있는 동안 거기 존재하고 있던 이 진아는 어떻게 됩니까? 진아는 그대의 잠의 상태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대가 꿈을 꿀 때에는 그대가 꿈꾸고 있는 것을 진아가 자각합니다. 지금 그대는 생시의 상태에 있노라고 말하지만, 진아 없이 그대가 어떤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까?
방문자 : '나'라고 하는 파도가 진아로부터 스스로 떨어져 나와서 자신을 하나의 별개의 파도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슈리 푼자 : 그래서 고통이 - - -
방문자 : 예 그래서 고통이 있습니다.
슈리 푼자 : 그리고 즐기는 자였던 것이 이제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대가 '나는 깨어났다'할 때, 이것은 육체, 마음,지성,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것들이 깨어난 것입니다.
방문자 : 스승님 당신께서는 어느 면담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 자신의 진아를 알라. 이 아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대가 알아아 할 전부이다. 아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제 제 질문은, '아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하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는 동연적(同延的 :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점하고 있는) 이지 않습니다. 수학자들은 예를 들어 54개의 동일한 면을 가진 입체를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하나의 유효한 지식이지만, 현실세계에는 그런 것이 존재할 수 없고, 존재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앎은 하나의 정신적 행위인 것처럼 보입니다만, 반면에 존재함은 정신적인 어떤 것일수 있으되 또한 분명히 그 이상의 어떤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께서는 어떤 의미로 앎, 아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십니까?
슈리 푼자 : 앎과 아는 것은 과거로부터 와야 합니다. 그대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앎도 과거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대가 읽은 책으로부터 혹은 어떤 진인이나 성자, 또는 교사로부터 입니다. 그대는 이것을 '지식'이라 하면서 그것을 계속 축적해 갑니다. 생에 생을 거듭하면서 그대는 그것을 축적해 갑니다. 이 지식이 이제 모여서 그대의 기억 안에 저장됩니다. 자, 이제 그대가 잠이 들면, 이 지식이 어디로 갑니까?
그대가 앎(지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대는 어떤 한정된 주체와 대상을 마음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대가 대학에서 배웠거나 누구한테서 들은 어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직접적인 체험이 아닙니다. 지식은 마음을 통해 얻어지지만, 그것은 직접적인 봄, 즉 직접적인 앎이 아닙니다.
제가 '보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 저는 마음 속에서 축적되고 가공되는 이러한 학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지(知)는 참된 지(知)가 아닙니다. 참된 지(知)는 심적인 지(知)와 학식을 넘어선 그 근원입니다.
방문자 : 마음을 넘어선 것입니다.
슈리 푼자 : 그렇습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자리에서 나옵니다. 발명품, 즉 완전히 새로운 물건이나 관념들조차도 말입니다. 모든 종류의 앎은 공(空)으로부터, 즉 의식으로부터 나옵니다. 존재하는 무엇이든, 그것은 거기서 일어납니다.
방문자 : 이러한 것들을 아는 것이 마음이 아니라면, 이러한 앎은 누구에게 일어납니까?
슈리 푼자 : 무심(無心, no-mind)에게 일어나지요.
방문자 : 알겠습니다. 그것은 주시자를 의미합니까? 이 무심이 주시자입니까?
슈리 푼자 : 맞습니다.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마음이 사라지면 - - -
방문자 : '마음이 사라진다'는 것은 마나스(manas)도 없고 찌따(chitta)도 없고, 아함가라(ahamkara)도 없고 붓디(buddi)도 없다는 뜻입니까?
슈리 푼자 : 없지요, 붓디조차도 없습니다.
방문자 : 기억도 없고 - - -
슈리 푼자 : 그것은 과거가 없다는 것을 뜻하고 - -
방문자 : 그 경우에 우리는 보통 아무런 앎도 없다고 말하게 됩니다.
슈리 푼자 :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마음은 앎을 의미하지만 - -
방문자 : 알기 위해서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만약 마음을 제거해 버리면 어떻게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슈리 푼자 :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무심(無心)에서 나옵니다.
방문자 : 누가 잠을 잡니까? 깊은 잠의 상태에서는 누가 잠을 잡니까? 잠자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잠을 지켜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기에는 마음이면의 어떤 주시자가 있지 않습니까?
슈리 푼자 : 그것은 마음 너머에, 마음 너머에 있습니다.
방문자 : 이 주시자는 무엇입니까? 당신께서는 주시자, 즉 샥시(sakshi)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슈리 푼자 : 그것이 주시자입니다. 만약 제가 그것을 묘사한다면, 그것이 묘사된 것으로 됩니다.
방문자 : 그것은 됐습니다.
슈리 푼자 : 만약 그것이 묘사된 것이 된다면, 어떻게 그것이 여전히 주시자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묘사에 가담해 있을 때, 어떻게 그것이 여전히 주시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한번은 까비르가 강가(갠지스강)에 가서 목욕을 하려고 집을 나오는데, 집 밖에서 두 사람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싸우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싸우던 상대의 손을 끊어 버렸습니다. 두 사람 다 체포되어 판관(判官) 앞에 끌려갔습니다. 상대방의 손을 끊은 사람은 자기가 정당방위로 그랬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 자른 칼이 상대방의 것이며, 그가 그 칼로 자기를 공격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까비르가 목격자로 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싸움이 벌어졌을 때 그가 현장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는 질문을 받자 까비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본 자는 말할 수 없습니다. 눈이 보았지만 눈은 말할 수 없습니다. 혀는 말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은 보지를 못했습니다.'
방문자 : 그 이야기는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빠빠, 당신께서 이렇게 말하실 때 - - -
슈리 푼자 : 이것이 그대의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주시자는 다른 어떤 자입니다. 그것은 그 공격을 한 사람의 내면에 있으며, 그것은 재판을 받지 않은 사람(주변의 목격자)의 내면에 있습니다. 그것이 최선의 목격자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모릅니다. 판사도 몰랐고, 거기 있던 다른 누구도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것이 최선의 목격자이지만, 그것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대가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 때문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방문자 : 그렇다면 우리는 이 주시자를 감추는 이 '나'라는 것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습니까?
슈리 푼자 : 이제 우리가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아까 그대가 이 질문을 했을 때, 저는 그에 대해 답변을 하려고 했습니다. 자, 이제 이 '나'가 어디서 일어납니까? 이 '나'의 근원을 찾아 내십시오.
끝을 내려면 그대는 '나'에게로 가야 합니다. 그대는 그것의 근원으로 가야 합니다. 자,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나'가 사라진 뒤에는 무엇이 납습니까?
방문자 : 왜 제가 어떤 것이 그 다음이라고 생각해야 합니까? 아마 제가 아는 것은 '나'가 전부일 겁니다. 만약 제가 생각 속에 있다면, 생각을 넘어 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슈리 푼자 : 아니, 아니, 그대는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대가 '나는 생각하고 있다'라고 하든, '나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라고 하든, 그대는 같은 '나'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나'의 근원을 발견하십시오.
- 데이비드 가드먼 엮음, 대성 옮김 <빠바지 면담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