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누구의 관점에서 경전을 읽을 것인가?

무한진인 2021. 12. 3. 22:41

ㅇ. 사랑과 신(神) 

어느 날 저녁 룽기와 얇은 쿠루타를 걸쳐 입은 카나다 출신의 한 청년이 마하리지와 대화를 갖게 되었다. 

그 청년은 자신이 스믈세 살이라고 했으나 이제 겨우 십대를 막 벗어 났을까 말까 하게 보였다. 

목에는 은십자가가 달린 멋진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그는 이삼일 전 봄베이의 한 서점에서 <아이 엠 뎃(I am that)>이라는 책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고, 그 책을 읽은 후 마하리지를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은 충동을 느껴 이렇게 찾아뵙노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책을 잡은 때부터 오후, 저녁, 밤 늦게 까지 계속 읽게 되었고, 바로 몇 시간 전에 두권을 모두 읽었노라고 했다. 

 

마하리지 : 아주 젋구나. 언제부터 영적인 공부에 마음을 두었는지 궁금한데?

 

방문자 : 예, 선생님, 사랑과 신에 대해 깊히 관심을 갖고나서 부터입니다. 사랑과 신, 그 둘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느꼈습니다. 제가 명상하고 앉아 있을 때면 종종 - - - -

 

마하리지 : 잠깐만, 자네가 말하는 명상이란 무슨 뜻이지?

 

방문자 :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다만 가부좌하고 앉아 눈을 감고 조용히 아주 조용히 앉아 있기만 합니다.

그러면 몸이 이완되고 거의 녹아 없어져 마음이, 아니 존재, 아니 그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그 텅 빈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념이 점점 중지됩니다. 

 

마하리지 : 그래, 좋구나, 계속해 봐. 

 

방문자 : 명상 중 자주 지극한 행복감과 함께 억제할 수 없는 황홀한 사랑의 느낌이 가슴 속에서 차 오릅니다. 그것이 뭔지는 모르겠어요. 제가 인도에 오고자 하는 영감을 느낀 것도 그러한 가운데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선생님 앞에 앉게 된 것입니다. 

 

마하리지 : 봄베이에 얼마나 머무를 예정이야?

 

방문자 : 봄베이에 도착했을 때 기분이 이상했어요. 멍한 것 같기도 하고,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왜 내가 그 서점에 가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책을 별로 안 읽거든요. 문득 <아이 엠 뎃> 첫째 권을 집어든 순간 명상 중에 느꼈던 것과 똑같은 강렬한 힘을 느꼈어요. 책을 펼쳐 읽어나가자마자 제 안에 있던 무거운 짐들이 빠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제가 여기 이렇게 앉아 말하고 있는 것이 마치 제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제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느낌 때문에 신성을 모독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저는 사랑은 곧 신이라는 확신을 가졌었어요. 그러나 이제 보니 사랑은 단지 관념이고 사랑이 관념이라면 신도 역시 관념임에 틀림없지 않은가 싶어요. 

 

마하리지 : 그래서 뭐 잘못된 거라도 있나? 

 

방문자 : (웃으며) 그렇게 말씀하시면 신을 하나의 관념으로 생각하는 것에 죄의식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마하리지 : 사랑이 곧 신이라고 말했는데, 자네가 말하는 사랑이란 뭘 의미하는 거지? "사랑"을 "증오"의 반대 개념으로 보나? 아니면 또 다른 의미가 있나? 물론 "신"을 설명할 적절한 단어가 마땅치는 않지만 말야.

 

방문자 :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사랑"이란 마음의 반대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는 겁니다. 

 

마하리지 : 다른 말로 하면 동체대자비(同體大慈悲)?

 

방문자 : 예, 그렇습니다. 그러면 제가 기도드리는 "신"이란 누구입니까? 

 

마하리지 : 기도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하기로 해. 자, 그러면 자네가 말하는 "신"이란 정확히 무언가? 신이란 바로 의식 그 자체 -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존재"의 느낌 - 아닐까?  왜냐하면 자네가 그것에 대해 질문을 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지. "나는 존재한다" 그 자체가 신이야. 자네가 가징 사랑하는 게 무엇인가? 그건 바로 이 "나는 존재한다"라는 것 -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키고자 하는 의식하는 현존 - 이 아닐까? 신을 찾는 자가 바로 신이야. 

신을 찾는 과정 속에서 "자네 자신"이라는 바로 그 자가 몸과 마음의 복합체와는 다른 의지함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바로 그 존재임을 알게 될거야. 만약 자네가 의식이 없었다면 세상이 자네에게 존재할까? 신이라는 생각 자체가 가능했을까? 그리고 그 안에 깃든 의식과 자네 안에 있는 의식이 서로 다를까? 개념이나 관념 상에서만 분리된 것처럼 말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나뉘어진 적이 없는 바로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 

 

방문자 : 이제야 "신은 나 자신보다도 더 가까이 있다"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하리지 : 또한 "실체가 되는 것만큼 실체를 증명해 주는 것은 없다" 라는 말을 명심하게. 자네가 바로 실체이고 언제나 있어 왔네. 의식이라는 것은 몸이 소멸되면 함께 떠나 버리고 말 시간에 제약받는 일시적인 것으로, 육신이 사라질 때 의식과 현시의 기본을 이루게 되는 이원성을 여의는 거야. 

 

방문자 : 그러면 기도는 무엇이며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마하리지 : 흔히 말하는 기도란 단지 뭔가를 구하는 것뿐이야.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기도는 교감의 요가야. 

 

방문자 : 이제 모든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제게서 엄청난 쓰레기가 빠져나가다 소멸된 것 같아요. 

 

마하리지 : 이제 모든 것이 명백히 보이는 것 같다는 예기야?

 

방문자 : 아닙니다. 보이는 것 "같다"가 아닙니다. 명백합니다. 너무도 명백해서 그동안 명백하게 볼 수 없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성경에서 읽었던 소중하지만 그 뜻을 몰랐던 귀절들이 이제 수정처럼 명백합니다. "아브라함 이전에는 내가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하나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마하리지 : 좋군. 이제 실체가 무엇인지 알았으니 속박 속에서 자네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어떤 수행을 하려나?

 

방문자 : 오 ! 마하리지 그 스승님이시어, 지금 저를 놀리시는군요. 아니면 저를 시험해 보시는 건가요? 확실히 저는 "내가 바로 그것(I am that)"임을 깨달았습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늘 있어 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게 될 "바로 그것"을 알며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할일이 뭐가 더 있습니까? 또 행해지지 않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을 하는 자가 누군가요? 무슨 목적으로 그걸 하나요?

 

마하리지 : 아주 훌륭하구나. 그대로 존재 자체로 남도록 해. 

 

방문자 : 진정으로 그리 하겠습니다. 

 

 

그 젊은 카나다 청년은 감사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마하리지에게 엎드렸다. 

마하리지는 다시 오겠느냐고 물었고 그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젊은 이가 떠나자 마하리지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잠시 눈을 감고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마하리지는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아주 작은 목소리로 고즈넉히 말했다. 

"아주 보기 드문 젊은 이야."

 

 

ㅇ. 누구의 관점에서 기타(GITA)를 읽을 것인가?

한번은 아주 품위가 있어 보이는 한 여인이 찾아와서 <바가바트 기타>에 대하여 여쭙기를 원했다. 

그녀가 적절한 말로 질문 하려는 도중 갑자기 마하리지가 물었다. 

 

마하리지 : 어떠한 관점에서 <기타>를 읽습니까?

 

방문자 : <기타>가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마하리지 : 왜 그런 어리석은 대답을 합니까? 물론 <기타>는 영적인 추구자에게 가장 중요한 안내일 것입니다. 허구적인 내용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내 질문은 "누구의 관점에서" 그 책을 읽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때 다른 방문객이 자기 의견을 말했다. 

: 신께서는 아르쥬나를 위해서 대자비의 마음을 베푸시어 진리에 대해서 설해주셨습니다.

저는 이 세상의 아르쥬나의 한 사람으로서 신의 말씀을 듣는 아르쥬나의 자세로 읽고 있습니다. 

 

마하리지가 다른 대답이 또 있는지 둘러 보자 몇몇 사람들이 그 답이 맞노라고 말했다. 

 

마하리지 : 왜 신 크리슈나의 입장에서 읽어보지 않습니까? 

 

마하리지의 파격적인 이 제안에 독특한 반응이 나왔다. 

한 사람은 신성모독이나 다름 없다는 듯한 충격의 외침이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의 반응은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와 같이 손벽을 탁 치는 탄성의 반사 반응이었다. 

두 사람은 부지불식 간에 나온 동시의 반응이 완전히 상반되었다는 사실에 무척 당황했다. 

그러자 마하리지는 손뼉을 친 사람에게 맞다는 싸인을 보내고는 계속해서 말했다. 

 

마하리지 : 대부분의 경전이란 깨달은 사람들의 말을 기록한 겁니다. 그런데 깨달은 사람이라도 자신이 깨달은 바의 어떠한 진리를 전하려고 하면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을 어떠한 개념을 근거로 말해야 합니다. <기타>의 특징은 신 크리슈나가 모든 현시의 근원이라는 입장에서 말했다는 겁니다. 즉, 나타난 현상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본체의 입장에서, "모든 현상은 오직 나 자신일 뿐"이라는 입장에서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타>의 독특한 점입니다. 

 

그러면서 마하리지는 이렇게 계속 말했다.

고대의 어떠한 성구(聖句)가 기록 되기 전에 어떠한 일이 있었겠는가. 생각해 보라.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깨달은 사람은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 어쩔수 없이 말로 표현해야만 했고, 따라서 거기에 사용된 말들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진리에 적절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스승들은 언제나 귀로 듣지 말고 가슴으로 듣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기록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 기록은 스승의 말을 들은 또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쓰여지게 된다. 자신이 이해한 대로 해석하여 글로 옮기는 것이다. 

그러고도 손으로 쓰여진 그 기록들은 후에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치며 등사되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많은 오류도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느 시대의 누군가가 그것을 읽고 이해하고자 할 때, 그 내용은 원래의 스승이 말하고자 했던 것과는 거리가 꽤 멀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수세기를 걸쳐 오면서 여러 종류의 학자들의 무지로 인하거나 또는 의도적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첨가한 것을 감안한다면 내가 말하는 문제점을 이해할 수 잇을 것이다. 

내가 듣기로는 붓다는 오직 "마가디(Maghadi)어"로만 말했는데 그의 가르침은 모두 팔리어나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되어 있다. 그것도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기록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의 가르침이라는 것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온 것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 긴 세월동안을 거쳐 오면서 원래의 가르침에 변경 혹은 첨가된 것이 얼마나 많았을지 한번 상상해 보라. 

이러한 까닭으로 오늘 날 붓다가 말한 것 또는 말하고자 했던 것에 대하여 많은 의견과 논쟁이 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경우를 감안하여 나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기타>를 읽을 때는 신 크리슈나의 관점에서 읽으라.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당신이 몸과 마음의 복합체라는 관념을 즉시 내려놓아야 한다. 나는 여러분이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의식, 즉 크리슈나 의식에서 읽으라는 것이지 크리슈나로부터 지각을 부여 받은 현상적 대상으로서 읽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만일 대상의 입장에서 읽게 된다면 <기타>에 있는 진리는 당신에 의해서 가리워질 것이다. 그리고 신 크리슈나의 입장에서 읽는다면 비쉬바 -루파 - 다르샨에서 신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보여준 것은 크리슈나의 스바루파(참나)만이 아니고 크리슈나와 둘이 아닌 아르주나의 스바루파(참나)요, <기타>를 읽는 모든 사람들의 스바루파(참나) 였음을 알게 될 것이다. 

기타를 신 크리슈나의 관점에서 읽으라. 그러면 현상이란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개 된다. 왜냐하면 현상은 저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환상이요 그림자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마음으로 기타를 읽으면 스스로를 몸과 마음의 복합체라고 느꼈던 의식은 그 본성을 깨닫고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 가게 된다. 

 

                                           - 라메쉬 발세카 지음, 이명규 역 <담배가계의 성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