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은 사람은 어떻게 세상을 보는가?
ㅇ, 깨달은 사람은 어떻게 세상을 보는가?
봄베이에 머무는 동안 늘 마하리지를 찾았던 한 여자 방문객이 봅베이 일정의 마지막 날 용기를 내어 스스로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하며 그런 질문도 괜찮겠느냐며 마하리지에게 허락을 구했다.
마하리지 : 모든 생각이나 욕망, 또는 성스러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등의 구분은 모두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댁이 말하는 "어리석은"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그게 다 행복해지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오는 것이며 "나는 존재한다" 생각에 기초하는 것이지요.
그것들의 질은 개인의 영혼(Antahkarana)과 세 가지의 구나 (속성)의 우세한 정도에 의존합니다.
세 가지 구나라는 것은 이런 것을 말합니다.
첫째 사트바로서 조화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려는 충동의 속성입니다.
둘째는 라자스로 힘과 열정을 만들어 내며,
셋째 타마스는 구속과 타락을 만들어 내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 댁의 질문이 뭔가요?
방문자 : 봄베이에 머물면서 선생님의 말씀을 듣던 시간들이 너무 소중하여 이렇게 빨리 흘러가 버린 것이 안타깝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기간동안, 저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런 사전 계획도 없었는데도 그 말씀들은 마치 그것들 스스로에 의한 것처럼 제 가슴에 깊히 스며들었습니다. 저는 줄곧, 선생님께서는 눈 앞의 대상이나 여기 모인 사람들이 어떻게 보이는지 궁금했습니다. 오늘이 제 여행이 끝나는 마지막 날이기에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오늘은 꼭 여쭤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하리지 : 내가 언제 댁을 대상으로 본다고 하던가요?
대체 무엇이 내가 댁을 대상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게 했나요?
댁은 내가 사물을 볼 때, 잘 알 수는 없지만 특별한 작용으로 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댁의 질문은 내가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고,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깨달은 사람(Jnani)들에게 사물들은 어떻게 느껴질까? 라는 것입니다. 이 점을 기억하도록 해요.
사물이나 대상은 그것들을 인지하는 사람들이 인지에 의해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어떠한 대상이 존재하려면 그것을 대상으로 보는 주체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이 뭔가를 지각하고 인지한다 할 때에는 주체도 없고 보이는 객체도 없습니다.
오직 "봄"이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깨달은 사람의 인지라는 것은 감각기능에 의지해서 느끼는 것보다 훨씬 우위의 직관력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바로 그 자리에서 거짓은 거짓으로 바로 보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이원성이 없습니다.
그는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 모두를 의식 그 자체의 단순한 작용인 물리적 현상으로 인지할 따름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도록 하십시오.
간단히 말해서 깨달은 사람의 바라봄은 총체적인 바라봄이요, 내면적 바라봄이며,
직관적인 바람봄이자 객관이 없는 바라봄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바라봄이야말로 속박없는 자유로움인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보되 보지 않는다."
이것이 어리석은 댁의 질문에 대한 나의 어리석은 대답입니다.
ㅇ. 진리의 증거
"진리에 증거가 있을 수 있을까?"
"과연 예리한 지성으로 진리를 붙잡을 수 있을까?"
때때로 마하리지는 자기 자신에게 묻듯,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예리한 지성은 별 문제로 하고,
구도자는 진리의 핵심을 깨닫기 위해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스승의 말을 진리로 받아들일 정도의 믿음이어야 한다.
믿음은 구도의 첫 걸음이다.
첫 발자국을 떼지 않고서는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다.
예리한 지성을 갖지 못했을지라도 믿음이 깊고 우직할 정도로 단순한 마음을 가진 성실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만트라를 주어 찬트(chant)하게 하여
그들의 영혼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정화되도록 돕는다.
그러나 지적인 사람을 다르게 다루어야 한다.
그들은 여러 종교에서 말하는 바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경전들,
또 거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
그가 진정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진리 - 어떠한 변화에도 좌우되지 않는 불변의 것-이다.
더 나아가 진리의 증거를 찾고자 한다.
그러나 어떠한 종류의 증거가 자신을 만족시켜 줄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그러한 증거들이란 그 자체가 시간과 공간에 종속되는 것들이고
지적인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잘 알고 있다.
진리란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시공에 제약받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도 시공 안에서 진리를 구하는 것이다.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직접 시공을 초월해야 한다.
마하리지는 말한다.
어떠한 지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의식과 존재의 느낌인 "나는 존재한다(I am)"가 그들이 아는 유일한 진리이고,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증거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그러나 단순히 "존재:한다는 것은 '실재(實在)'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리와 동일시될 수 없다."
어떤 질문자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질문하면서 진리의 증거를 요구한다 :
"눈 먼 사람은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겁니다. '색깔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라. 만약 그렇게 한다면 당신이 말하는 무지개에 대한 온갖 아름다운 묘사를 믿겠다.'
저 역시 선생님께 이렇게 묻고자 합니다.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
마하리지 : 그건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진리는 어떤 대상이 아닙니다.
선생이 실재한다고 믿고 있는 봄베이, 런던, 뉴욕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나에게 증명해 보세요.
그게 가능합니까? 그런 것은 당신의 생각에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모든 곳은 같은 지구이며 똑같은 공기와 물과 불과 하늘입니다.
대상으로서는 결코 진리를 구할 수도 없으며 묘사할 수도 없습니다.
진리란 이해되는 어떤 것이 아니며, 이해되는 것은 대상이 되겠지만,
진리는 대상이 아닙니다.
진리라고 증명되고 날인된 어떤 것으로서 진리를 "살"수는 없습니다.
진리의 증거를 보고자 하는 시도 자체에 주관과 객관의 이원성을 품고 있는 것이며,
설사 그렇게 하여 뭔가 답을 얻었다 해도 그것이 진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인 순수 독존(獨存)인 진리에는 객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든 시도가 마치 자신의 꼬리를 잡으려고 맴도는 개와 같다고
마하리지는 말했다.
이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문제를 제기한 자의 문제 쪽으로 되돌아 와야만 한다.
진리나 실체의 증거를 원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우리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과연 명확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모든 존재는 개관적이다.
한정된 우리가 우리를 인식하는 의식 안에 나타난다는 것은 우리가 개체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다른 사람들의 지각대상으로서가 아닌 실체의 증거를 찾고자 하는 "나"(근본이 아닌)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어떠한 증거가 과연 있을까?
근본의 증거를 찾고자 하는 시도란 것은
마치 그림자로서 실체의 모습을 찾고자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마하리지는 거짓은 거짓으로 볼 것을 역설했다.
그는 이렇게 물었다.
"내가 이야기한 것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당신이 찾고자 하는 것은 찾고자 하는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그러나 눈이 눈을 볼 수는 없습니다.
부디 이해하기 바랍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참나는 감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각되는 나라는 것은 모두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의식의 산물일 뿐입니다.
당신이 육체라는 형태를 얻기 전에는,
당신이 태어나기 전에는 어떠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밖에 또 다른 증거가 필요합니까?
증거를 찾는 질문을 단지 상대적 존재 안에서만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얻어지는 모든 증거란 상대적 존재의 파생물일 뿐 결코 진리가 아닙니다. "
- 라메쉬 발세카 지음,이명규 번역 <담배가계의 성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