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뿌리 안에 안정된다는 것은 정확히 현재 순간에 있는 것을 뜻한다.
만약 여러분이 여기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을 정맗 이해했다면, 여러분은 무엇입니까?
참된 지(知)가 있으면 여러분의 고통과 쾌락이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여느 습(習)의 경우도 그렇지만, 몸과의 동일시는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떠나면 여러분의 할일은 끝납니다.
다양한 장면들이 나타나고 이내 사라집니다.
지속되지 않는 것을 마야라고 합니다.
불이 연료를 필요로 하듯이, 여러분의 의식은 음식 즙(汁)을 필요로 합니다.
불이 바로 그 자리에서 꺼지는 것과 비슷하게,
의식도 바로 의식이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죽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불이 천당이나 지옥으로 갈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모든 개념과 현재 상태는 여러분이 몸과 연관되고,
몸에 집착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진아 깨달음을 얻고 나면 우리가 운마니(oonmani) 상태(무심 또는 무념의 의미)에 있게 되는데,
거기서는 생시도 없고 잠도 없습니다.
꿈의 상태와 운마니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전자에서는 여러분이 활동하지만,
후자에서는 여러분이 하나의 주시자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고요해지지 않으면 운마니 상태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마음의 변상(變相)들이 그치면 남는 것은 순수한 존재입니다.
그것은 기름램프의 안정된 불길과 같습니다.
그때는 어떤 생각도, 어떤 마음도 없고, 순수한 존재만 있습니다.
대부분의 영적 수행은 마음의 변상들을 훈련하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몸이 더 이상 여러분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이닐 때, 다른 사소한 어려움들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상태를 이스와라 혹은 브라먄이라고 합니다.
의식은 하나의 성질인데, 그것이 어디로 갈 수 있습니까?
우리가 노력으로 빠라마뜨마를 성취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참으로 있는 그대로 있으십시오.
5대 원소로 인한 여러분의 존재성은 궁극적으로 그 원소들 속으로 합일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몸-마음을 의식하지 않을 때 어떤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 생각들이 여러분의 것입니까, 여러분의 마음의 것입니까?
그것들은 여러분의 마음에서 옵니다.
설사 (남들과) 어떤 다툼이 있다 해도,
그것 역시 마음의 것이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이 초연하게 있으면 그 다툼에 상관하지 않게 됩니다.
브라만의 지(知)는 브라만에게만 일어날 수 있지,
인간에게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 있습니다.
여러분이 브라만과 하나가 되면 언어가 그칩니다.
분리가 없으면 언어가 시작될 수 없습니다.
이 분리 자체가 마음의 변상입니다.
소용돌이에 말려든 인간은 익사합니다.
극소수만이 더 깊히 잠수한 뒤 옆으로 헤엄쳐서 소용돌이를 빠져 나옵니다.
여러분도 몸-마음이라는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 속에서 더 깊히 잠수하여 스스로 벗어나야 합니다.
이제 '존재성', '마음의 변상들', '관념작용에서 벗어나서'라는 단어들을 성찰해 보십시오.
'존재성'은 브라만이고, '마음의 변상들'은 마야이며,
'관념작용에서 벗어나서'는 전혀 어떤 주시하기도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예들은 마음을 납득시키기 위한 것일 뿐, 절대자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빠라마뜨마는 모든 묘사와 예들을 넘어서 있습니다.
마야는 자기 사랑의 출현을 뜻하며, 거기서 5대 원소와 모든 존재가 출현합니다.
모든 예들은 5대 원소에 해당하는데, 그것 없이는 우리가 자신의 존재를 알수 없습니다.
절대자는 원초적으로 순수합니다.
의식은 몸 안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고,
우리는 의식하게 되는 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의식은 그 스스로 몸과 동일시합니다.
위대한 실재가 자기사랑으로 현현합니다.
우리는 누가 자기사랑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 사랑과 함께 전 우주가 출현합니다.
자기사랑은 우리의 의식을 뜻하며, 그것이 전 우주를 점하고 있습니다.
그것의 모든 성장은 독자적입니다.
원래의 사뜨와 안에 있던 작은 점 하나가 아는 자가 됩니다.
극소수만이 의식의 근원을 들여다 보고,
그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 지를 볼 수 있습니다.
진지한 구도자는 자신의 삶과 존재가 얼마나 빛나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봅니다.
여러분은, 한 단어조차 경험하는 일이 없는 그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없을 때, 여러분은 신적인 것 안에 흡수되어 운마니 상태에 있습니다.
그것을 알면 천치들조차도 위대한 인간으로 숭배받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위대한 실재를 안 것입니다.
진인은 감각기관으로 지각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감각대상들을 좋아하고 거기에 몰입합니다.
그 결과, 여러분은 모든 것을 아는 자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세계와 모든 존재는 참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들은 꿈 만큼만 실재합니다.
그것들은 모두 일시적이기 때문에 실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지각하는 것들에 끌리지만,
진리는 지각될 수 없고 , 그것에 대한 어떤 경험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자기사랑은 의식 때문인데, 그것을 아는 자는 모든 성질을 넘어서 있습니다.
"자야 구루" 만트라의 염송은 그것을 기쁘게 하여, 의식의 비밀을 열어줍니다.
의식에 대한 참된 지(知)가 있으면 속성없는 여러분 자신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음은 마야, 곧 환(幻)을 뜻하며, 그것이 마음의 변상들을 가져 옵니다.
존재의 삶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스승의 참된 헌신자를 거드리지 못합니다.
그는 도처에서 도움을 받습니다.
의식의 힘은 그것을 아는 자에게 봉사합니다.
의식의 근원을 아는 것이 그것을 진정으로 기쁘게 하는 것인데,
그것이 우리의 존재 목적을 완성합니다.
진아지가 없으면 지속적 고요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 명상을 해야 하며, 그에 필요한 도구들은 무엇입니까?
명상을 위해 사용되는 것은 여러분의 아이 의식이고,
그 목적은 의식의 기원을 아는 것 아닙니까?
의식은 현재 순간에 늘 느껴지는데, 그것과 함께 여러분의 삶이 매 순간 시작됩니다.
의식은 순간순간 항상 새롭습니다.
명상은 의식 안에서 안정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정확히 현재 순간에 있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걱정들이 여러분을 고문합니다.
의식와 함께 있다는 것은 생각들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의식은 그것이 떠올랐던 곳으로 집니다.
그것은 어디로도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광대한 무변제(無邊際) 안의 도처에 이미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스승을 기억하고 그의 이름을 찬송할 때,
내적인 스승이 기뻐하고,
바로 뿌리에서부터 모든 비밀스러운 지(知)를 열어주어,
어떤 무지의 여지도 남지 않게 합니다.
-대성 번역 <자기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