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관론(絶觀論)-10
[본문]
또 묻는다.
"만약 사람이 이 이법(理法)을 체달(體達)하지 못하였다면 설법을 할 수도 없고,
중생을 교화할 수도 없는 것입니까? "
답한다.
"자신의 눈이 아직 열리지 않았거늘 어찌 타인의 눈을 치료할 수 있겠는가?"
[해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는 데는 이법(理法)을 체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신만성불(信滿成佛)도 이법(理法)을 제대로 알아야 올바른 믿음이 갖추어져 가능하게 된다.
대승에서의 신(信)이란 공(空), 무상(無相), 무원(無願,無作)의 삼해탈(三解脫)과 우심(唯心)
무생(無生), 불가득(不可得) 등의 리(理)를 요지(了知)하여 흔들림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자리에 이르러야 남도 이끌수 있다.
[본문]
또 묻는다.
"그 지력(智力)에 따라 방편으로 교화하는 것이 어찌 불가(不可)하다 하십니까?"
답한다.
"만약 공(空)의 도리를 체달(體達)하였다면 지력(智力)이라 할 수 있고,
만약 그 도리를 체달하지 못하였다면 무명력(無明力)이라 이름한다.
왜 그러한가. 번뇌를 도와서 그 기력(氣力)을 만들기 때문이다."
[해설]
공(空)의 도리를 알아야 지혜의 빛이 발하여 무명(無明)이 사라진다.
아무리 다른 면의 지력(智歷)이 있다한들 지혜의 빛이 발하지 않으면
무명의 어둠을 밝히는 것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분별의 훈습을 더하게 하여
무명의 힘을 더 키운다. 공의 도리란 곧 분별할 바 없다는 뜻인 끼딝이다.
[본문]
또 묻는다.
"(공의 도리를 체달하지 못하여) 비록 (중생을) 입됴(入道)할 순은 없다 하더라도 중생으로 하여금 오계(五戒)와 십선(十善)을 봉행하도록 하여 인천(人天)에 안처(安處)하도록 하는 것이
어찌 이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
답한다.
"(공의) 도리에 이르게 하는데는 (그러한 행이) 무익(無益)하며 오히려 두 가지 손실을 초래한다.
왜 그러한가, 자신도 빠뜨리고 남도 빠뜨리는 까닭에 생사윤회를 면하지 못한다. 자신을 빠드린다 함은 스스로 도에 나아감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고, 남을 빠뜨린다 함은 생사윤회를 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해설]
오계(五戒)와 십선행(十善行)으로 이끌어 악도(惡道: 축생,아귀,지옥)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인천(人天)에 태어나게 함을 목표로 이끄는 것은 불교의 큰 뜻에 어긋난다. 오계와 십선행을 권장함에는 이미 선악의 분별이 있고, 나는 이와 같은 훌륭한 행을 한다는 증상만(增上慢)의 죄업을 일으키기 쉽다. 대승의 가르침에 의하면 오계와 십선행을 지키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무색계(無色界)의 최상위인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에서 수 많은 겁동안 안락을 누리 ㄹ수 있었으나 아직 생사윤회를 벗어난 자리가 아닌 까닭에 버려 버리고 무생(無生)의 진리(無生法忍)를 깨달아 영원히 생사윤회를 벗어나셨다.
불교는 무생의 진리를 깨달아 생사윤회를 영원히 벗어나게 하는 가르침이다.
인천(人天)의 락(樂)에 향하거나 머무르게 하는 정도의 가르침은 오히려 윤회에 대한 집착심을 증장시켜 남으로 하여금 생사윤회를 면하지 못하게 하고, 자신은 대도에 나아감에 방해 받는다. 과감히 버려야 할 인정(人情)에 걸리었기 때문이다.
[본문]
또 묻는다.
"성인께서는 왜 삼승(三乘)의 차별법을 설하지 않으십니까?"
답한다.
"성인은 무심(無心)으로 설한다. 차별법은 단지 각 중생 자심(自心)의 희망으로 그렇게 인지되는 것이다. 까닭에 경(능가아발다라보경, 일체불어심품)에 설한다.
그 마음 멸진(滅盡)하고 나면
승(乘)도 없고, 승이 있는 자도 없나니
세울 승 없음을
나는 일승(一乘)이라 하느니라."
[해설]
본래 부처님은 무심(無心)으로 설하는지라 설한다고 함도 없고, 설하는 법도 다로 없으며,
법을 듣는 자도 없고, 제도 함도 없다.
그러하니 듣는 대상에 따라 삼승법(三乘法)을 시설(施設)함도 없다.
어떠한 법을 누구를 위해 따로 세울 바도 없다.
부처님이 처벌법을 떠난 원융무애한 가르침이 중생의 그릇에 따라 여러가지로 받아들여 질 뿐이다.
그릇 모양과 크기에 따라 받아지는 물이나 곡식이 다르듯이.
[본문]
또 묻는다.
"세간에 사이비 수행인들은 정리(正理)에 눈뜨지 못하고 겉으로 위의(威儀)를 드러내며 오로지 사업에만 열중하고 이들 대부분이 남녀들(일반세속신도)과 가까이 어울리는 것은 어떠합니까?"
답한다.
"음녀(淫女)가 여러 남자들을 끌어들임과 같고, 악취가 나는 손님이 오니 파리떼들이 모이는 것과 같나니,이는 명상(名相)에 끄달리는 소치(所致)이다."
-박건주 역주 <절관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