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자아 탐구 실제 수행방법 및 이론 정리 (43)

무한진인 2021. 7. 27. 23:41

사람은 '나는 사람이다, 나는 사람이다'라고 명상해야만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따라서 구도자가 다시 '나는 브라만이다'를 명상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그가 일시적으로 머물렀던 그 상태가 진아 깨달음, 곧 진정한 깨어남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아러한 맥락에서 스리 라마크리슈나와 스리 또따뿌리(라마크리슈나에게 비이원론을 가르친 유랑 승려) 간의 대화에 주목해 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스리 또따뿌리가 "이 놋쇠그릇은 매일 닦아야만 반짝 반짝 빛이 날 것이다. 그와 같이 매일 (그런 상념관들을) 명상해야만 우리의 마음이 순수해져서 브라만을 반사하게 될 것이다." 라고 하자, 

스리 라마크리슈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릇이 금이라면 왜 닦습니까?"

 

따라서 '내가 그다', '나는 브라만이다.', '그것이 나다(tat aham)' 등의 명상은 마음활동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진아 깨달음을 위해서는 이 마음이 자취도 없이 소멸되어야 한다. 

그런 명상들을 하면 마음이 한량없는 세월 동안 살아 남을 것이다. 

마음은 활동이라는 음식을 먹고 그것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마음에 영양을 공급하는 것은 2인칭과 3인칭에 대한 주의 뿐이다. 

따라서 '내가 그다'왜 같은 명상으로는 마음이 절멸되지 않으며, 

마음은 이런 명상에 의해서나 그런 활동으로 인해 완전히 지쳤을 때마다 

고요함에 빠지는 것을 통해 영구히 살아 남게 될 것이다. 

이처럼 그것은 마음의 절멸을 가져오지 않기 때문에, 

이런 명상들은 스리 바가반이 가르친 자기 탐구일 수가 없다. 

자기 탐구는 마음을 단번에 완전히 소멸한다. 

 

(...) 그러지 않고 '나는 이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이다'라고 명상하는 것은 (어느 면에서) 

보조 수단일 수는 있으나, 그 자체가 탐구일 수가 있는가? 

                                               -<실재사십송, 29연>-

 

라고 스리 바가반은 묻는다 ! 

어째서 이런 명상들이 보조수단일 수는 있으나 그 자기 탐구일 수는 없는지는 다음에 기회있을 때에 

설명할 것이다. 

 

스리 바가반은 이런 명상을 자기탐구로 여기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 형태의 자기 주시야 말로 스리 라마나의 가르침이다. 

스리 라마나의 탐구법은 '나는 이것이다'나 '나는 저것이다'를 명상하는 것이 아니라. 

1인칭에 강렬히 고정되는 하나의 주의, 곧 '이 나는 무엇인가?'이다. 

 

2인칭과 3인칭에 대한 주의의 형태로 마음에 주어지는 어떤 활동도 그것을 소멸할 수 없을 것임을 잘 아시는 스리 바가반은, 큰 말씀의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나는 누구인가?'라는 당신의 가르침으로 경전들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는다. 이전에 경전을 통해서 밝혀지지 않았지만, 구도자가 자신의 길을 잃지 않고 자기 탐구를 수행할 수 있기 위해 필수적인 하나의 새로운 가르침이, 이제 스리 바가반에 의해 경전들의 세계에 보태진 것이다. 

이 가르침이 무엇인가? 마음은 그것이 1인칭 쪽으로 향할 때에만 소멸된다는 것이다! 

 

신성한 빛, 신성한 소리, 카일라스와 같은 천상계, 시바 등의 형상을 가진 신의 모습을 보는 것, 물라다라 등 몸 안에서 관상하는 여섯군데 차크라 - 이런 것들과 기타 이와 비슷한 모든 감각대상들은 미세한 마음이 미세한 오관을 통해 지각하는 대상들이므로, 이것들은 2인칭과 3인칭 앎(보이는 대상)에 지나지 않으며, 

그 어느 것도 1인칭 앎(보는 자) 이 될 수 없다 !

 

더욱이 생각들의 집합체인 마음 그 자체가 우리의 지각대상인 하나의 2인칭이라면, 

그 마음이 지각하는 대상들은 2인칭이나 3인칭 외에 달리 무엇일 수 잇겠는가? 

그러므로 구도자의 주의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도) 늘 빛나는 진아에만 집중되어야 하고, 

그곳에 그것을 붙들어 두어 어떤 2인칭이나 3인칭 대상 쪽으로 쏠리지 않게 해야 한다. 

 

2인칭과 3인칭을 생각하는 것은순전히 어리석은 짓이네. 

왜냐하면 2인칭과 3인칭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 활동이 증대될 것이기 때문이네 

(반면에) 1인칭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자살하는 것과 마찬가지네. 

왜냐하면 1인칭을 탐구함으로써만 에고 자체가 죽을 것이기 때문이네. 

                                         - <자기 탐구 11연시, 제7연>

 

이것은 결코 범상한 단서가 아니다. 

구도자들이 어떤 해법을 찾지 못하고 헤맬 때는, 

스리 바가반이 주는 1인칭 주시의 이 단서를 마치 가난뱅이의 손에 잔뜩 쥐어준 다이아몬드처럼 덧없이 귀중한 것으로 여길 것이 분명하다. 

(어떤 일을 보살필 때나 강렬한 무욕과 꾸준한 일념집중력을 가지고, 수많은 죽음과 탄생을 거치며 무수한 세월동안 분투해온 사람들조차도 헤메기는 마찬가지다.왜냐하면 노력을 쏟을 올바른 방향을 몰라서 쓸모없는 2인칭과 3인칭에 주의를 기울여 왔기 때문이다.)

 

스리 바가반은 이 단서를 밝혔을 뿐 아니라, 당신의 더없이 귀중하고, 매혹적이고, 단순한 소책자인 < 나는 누구인가?>에서 초심자들조차도 마음이 2인칭과 3인칭 쪽으로 헤메지 않게 하면서 그것을 자기에만 고정할 수 있게 도와주는 자기 탐구의 정확한 실제과정을 제시했다. 이 과정은 뒤에서 설명할 것이다. 

 

보물이 우리 자신의 집 마루 밑에 숨겨져 있다 해도, 우리가 그 사실을 알고 파내어서 그 부를 누리기 전까지는 마치 그것이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의사가 환자의 집뜰에서 발견한 약초처럼 말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그 보물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 우리가 그것을 파내어 부를 누릴 수 있게 해 준다면, 

그는 참으로 우리에게 그것을 새로 안겨준 사람이다. 

사실 그 사람이 우리를 부자로 만들어 준 것이고, 그 전에는 우리가 확실히 가난했다.

 

그러나 우리들 가운데는 경전에 있는 탐구에 대해 읽어 보기는 했으나 진아 체험을 얻지 못한 사람으로서, 스리 바가반이 가르친 자기 탐구의 기법이 가진 더없이 귀중한 도움과 위대함과 새로움을 모른 채 피상적으로 "진아 탐구는 이미 경전에서 이야기한 것인데, 스리 바가반이 무슨 새로운 발견을 했다는 건가?"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이 자기 집에 보물이 묻흰 줄을 몰라 그것을 파내어 누리지 못했음에도 " 이 보물은 이미 우리 집에 있던 것 아닌가?" 하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이 가난한 사람이 한 말과 비슷하다고 우리가 말하는 이유는, 

만약 그가 그 엄청난 보물을 얻고서 그 가치를 알고 그 기쁨을 경험했다면 그는 더 이상 가난뱅이가 아니고, 

따라서 친구의 더없이 귀중한 도움을 그렇게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 경전들의 문자에만 통달했지 거기서 가르치는 진아탐구를 통해 진아지복의 가장자리조차 체험해 보지 못한 빤디뜨들만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참스승 스리 라마나가 발견하여 세상사람들에게 안겨준, 진아탐구의 길을 따르기 위한 그 단서의 독특한 위대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그 모든 세월동안 경전을 공부하여 진아탐구를 닦는 올바른 방법을 발견했다면, 왜 여전히 진아체험을 얻지 못한 채 분투하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이와 뚜렷이 대조되지만, 스리 바가반이 안겨준 그 단서의 큰 도움을 통해 실재를 알게 된 모든 사람들은 고대의 경전들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내가 있다'는 의식이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는 부가물과 함께 느껴질 때는 하나의 생각이 된다. 

모든 생각 중에서 이 생각이 첫번째이다. 

그러나 어떤 부가물도 없이 '나-나'로서만 빛나는 의식은 진아, 곧 절대자이다. 

이것은 하나의 생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즉, 우리의 참된 존재성)이다. 

따라서 경전에서 가르치는 '나는 부라만이다'라는 큰 말씀의 목적은, 

브라만이 우리의 순수한 존재성이라는 최종적 체험에 대한 하나의 사전 정보를 우리에게 주기 위한 것이지,

브라만을 우리의 생각들 중 하나로 바꿔 놓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처럼 '나는 브라만이다'는 우리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우리의 참된 상태에 대한 하나의 사전 정보일 뿐이다. 

생각을 넘어선 우리의 존재성에 생각으로 어떻게 도달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생각으로 알수 없으므로, '나는 누구인가?'하는 탐구를 통해(즉, 자기 주시를 통해) '나'라는 생각의 일어남을 종식하고, 그 뒤에 남는 것으로서 안주하는 것이 참으로 '나는 브라만이다'라는 큰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다. 

 

(...) 실재('나')는 생각을 넘어서 내면에 존재하는데, 

누가 그리고 어떻게, 심장이라고 불리는 그 실재에 대해 명상할 수 있는가? 

심장 속에서 있는 그대로(즉, 생각없이) 안주하는 것이 참으로 (그것에 대해) 명상하는 것이라네!

이와 같이 알아야 하네

                                       -<실재사십송, 기원서 제 1연>

 

참된 브라만 체험을 얻기 전까지는, 우리가 어떤 식으로 브라만에 대해 명상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2인칭 또는 3인칭에 대한 하나의 생각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 단순하게 '나, 나'를 명상하면, 그것은 하나의 1인칭 주시이므로 이렇게 명상하기 시작한 그 '나'라는 생각은 그것의 근원 속으로 빠져들어 자신의 형상과 별개의 존재성을 잃어버릴 것이다. 

마치 화장터의 장작불을 뒤집는데 쓰이는 막대기처럼, 그리고 거울에서 반사되어 다시 해 쪽으로 향하는 햇빛의 반사광처럼 말이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나는 시바다'나 "내가 그대다(soham)' 등을 명상하면 에고가 커지고 강해지는 반면에, 자기, 곧 '나는 누구인가?'를 주시하면 에고가 죽을 것이다. 

그래서 바가반 스리 라마나는 '내가 그다'를 수행법으로서 가르치지 않은 것이다. 

 

만일 우리가 가려고 하는 어떤 도시에 대한 세부적인 정보가 미리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그것은 좋은 보조수단이 될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브라만이다'와 같은 큰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우리의 최종적 실재가 브라만이라는 사전 정보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수행, 즉 탐구 그 자체일 수 있겠는가? 아니, 그럴 수 없다. 

어째서인가? 그 도시에 대한 세부사항을 공부하고, 그것을 거듭 읽어서 암기하고, 그에 대해 명상하는 것은 결코 그 도시로 여행하는 것이 될 수 없다. 큰 말씀들의 경우에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바로 스리 바가반이 지은 다음 가르침이 의미하는 바이다. 

 

(...) '나는 이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이다'라고 명상하는 것은 (어느 면에서) 보조 수단일 수 있으나,  그 자체가 탐구일 수 있겠는가? 

                                                            - <실재사십송,제20연>-

 

(...) '우리가 그것이다'라고 명상하는 것은 우리가 진아로서 안주하기 위한 하나의 좋은 보조수단일 수 있다네.

                                                            - <실재사십송, 제36연>-

 

따라서 탐구의 길, 곧 '나는 누구인가?'는 '내가 그다'와 같은 큰 말씀들에 대한 명상이 아니다. 

 

 

                                                                     -대성 옮김 <스리 라마나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