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참의식이 말하다(50)

무한진인 2021. 6. 4. 20:44

-- 계획하기 -- 

 

질문자: 계획하는 것이 쓸모가 있기나 한가요? 

 

라메쉬: 쓸모 있다마다요! 당연히 계획하는 일은 쓸모가 있죠. 사실, 계획하는 일이 돈을 잘 버는 직업이 되지요. (웃음) 

 

질문자: 돈 버는 것 말고요. 

 

라메쉬: 만일 우리가 비행기를 타려고 어떤 정해진 시간에 공항에 가야 한다면,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계획도 행위의 일부지요. 아무것도 안 하면서 앉아있는 사람은 전혀 없죠. 그래서, 행위가 일어나며 계획도 행위의 일부가 되지요. 생각하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을 때, 즉 "내"가 존재하지 않을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관한 걱정과 근심이 없습니다. "내"가 있는 곳에는 계획이 성공할지 못할지에 관한 걱정과 근심이 있습니다. 계획은 꼭 필요하죠. 뭘 하려면 계획이 필요합니다. 

 

질문자: 그래서 계획은 하지만 결과는 통제하려 하지 않는군요. 

 

라메쉬: 결과를 통제하지 않으려는 게 아닙니다. 통제할 수 없다고 이해하는 겁니다. 

 

질문자: 내가 계획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계획하는 자는 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군요? 

 

라메쉬: 맞아요. 맞고 말고요. 바로 그 말입니다. 

 

-- 숙명 -- 

 

질문자: 자유의지가 환상이라는 말씀입니까? 제 말은 선택한다는 것 자체가 환상이며 아예 존재하지도 않고, 이 모두가 운명이라는 말씀입니까? 

 

라메쉬: 그렇습니다. 그럼요. 

 

질문자: 우리가 숙명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어떻게 다릅니까? 

 

라메쉬: 그것이 숙명입니다. 하지만 숙명은 숙명도 자연 법칙의 일부라는 사실을 따릅니다. 그리고 또한 라마나 마하리쉬께서 말씀하셨듯이 "창조도 없고 파괴도 없고 길도 없고 목표도 없고 자유도 없으며 숙명도 없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라는 본연의 진리를 따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영적 진화, 과학의 진화, 예술과 과학에서의 진화라는 개념, 현상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시공간 안의 모든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따릅니다. 모든 것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이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따라야만 합니다. 이것이 받아들여지면 다른 어떤 개념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질문자: 이해하는 것과 일상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죠. 

 

라메쉬: 아, 물론 그렇지요. 그래서 답은 간단합니다. 당신은 지능 수준에서 조차 "그래 맞아. 그럼 난 뭘 해야 하지? 생활에서 뭘 바꿔야 하지?"라고 말하는데, 아니죠! 해왔던 그대로 계속 해나가요. 따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요점입니다. 따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정말로 아무 문제없습니다. 누구에게 문제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 본성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 -- 

 

질문자: 일들이 참의식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면 어떤 일도 자신의 공이라고 할 까닭이 없고, 또한 어떤 일에도 속상할 까닭이 없군요. 왜냐면 기본적으로 그냥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맞습니까? 

 

라메쉬: 맞다 마다요. 이 때문에 제가 엄청난 좌절감이 아니라 엄청난 해방감이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 모두가 그냥 일어나고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걱정을 왜 합니까? 그냥 편안히 앉아서 일이 일어나게 놔두고 그냥 지켜보는 건 어떻습니까? 

 

질문자: 쇼를 즐기는 거죠. 

 

라메쉬: 쇼를 즐기세요. 바로 그겁니다. 

 

질문자: 그런 분석 방법을 하나의 철학으로 사회적 책임들을 팽개치는데도 적용할 수 있을까요? 제가 어떤 사람을 죽이고서 그냥 "내게는 책임 없다."라고 해도 됩니까? 

 

라메쉬: 당신이 하는 말을 다른 말로 하자면, 오직 잡혀서 벌받을까 두려워서 누군가를 죽이지 않는다는 말인데, 그런 말입니까? 

 

질문자: 그냥 제가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태도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하죠. 그냥 제 생활을 계속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전혀 상관 하지 않고, 그냥... 

 

라메쉬: 제가 묻고 있는 것은, 신이 당신에게 "좋아, 네게 하고 싶은 것은 뭐든지 해도 좋고 이번 세상에서도 다음 세상에서도 벌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기관총을 들고 나가서 다른 사람들을 죽이시겠습니까? 

질문자: 물론 안 그러죠. 

 

라메쉬: 정말로 제가 하는 말은, 당신은 자신의 일반적인 본성에 반하는 어떤 행동도 할 수가 없다는 말인데, 일반적인 본성이란 자신 유기체의 특징을 말합니다. 모든 유기체는 어떤 특징들을 가지고 창조되고 그런 유기체는 특정한 부모아래서 태어납니다. 자신의 특징도 정해졌고 부모도 정해졌고 환경도 정해졌습니다. 그렇게 자라나는 조건도 정해집니다. 당신의 본성도 정해지고 양육도 정해집니다. 그러니 이렇게 꽉 조여진 상황에서 진정한 선택권이 당신에게 얼마나 있겠습니까? 타고난 특징들에 의해서 제한되고 환경 속에서 길들여지면서 제한되고, 당신은 특정한 행동을 강제로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행동은 할 수가 없지요. 이 때문에 당신이 비록 벌을 받지 않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 해도 나가서 어떤 끔찍한 일을 저지르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런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선천적으로 끔직한 일을 병적으로 저지르는 성향을 가진 누군가는,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 위해서 이런 가르침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어찌됐든 일을 저지를 겁니다. 그 유기체는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창조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끔찍한 일들은 모두 참전체성이 하는 작용의 일부입니다. 성자와 죄인을 창조하는 것이 같은 참의식, 같은 신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질문자: "악마가 내가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다."가 아니군요. "신이 내가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다."군요. 

 

라메쉬: 그럼요. 물론이죠. 

 

질문자: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크리슈나무르티께서도 선생님처럼 여행하면서 대담을 열곤하셨는데, 히틀러에 관한 이야기에는 시간을 할애하지 않으셔서 비난을 많이 받으셨죠. 하지만 크리슈나무르티께서 히틀러에 관해 한 말씀이 오늘 밤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아주 비슷한데, 개인은 세상이 더 낫게 변할 수 있는지 보다 자신을 먼저 찾아야 하고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먼저 알아봐야 한다는 말씀이었죠. 

 

라메쉬: 맞는 말입니다. 자, 크리슈나무르티를 언급했죠. 똑 같은 사건을 크리슈나무르티가 봤을 때와 다른 한 사람이 봤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드리죠. 크리슈나무르티의 책에서 읽었는데, 크리슈나무르티가 한 번은 텔레비전을 보다가 모피를 얻으려고 바다표범 새끼를 몽둥이로 두들겨 패서 죽이는 장면을 봤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그 장면이 끔찍해서 참고 볼 수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럼 크리슈나무르티는 어떻게 했겠습니까? 텔레비전을 꺼버렸죠. 왜냐하면 크리슈나무르티라고 이름 지어진 몸-마음 유기체를 통해서 일어날 일은 정확히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반응은 거기서 멈췄습니다. 하지만 여배우 브리짓 바르도는 똑 같은 장면을 봤고 너무나도 가슴이 아파서 며칠 날 밤을 잠 못 이루었습니다. 브리짓 바르도는 사회 운동을 시작했고 이 운동은 국제적으로 커지고 커져서 그런 행위가 공식적으로 중단될 때까지 계속됐습니다. 그럼, 크리슈나무르티는 개의치 않는데 브리짓 바르도는 걱정을 한다는 뜻일까요? 보시면, 몸-마음이 다르면 반응도 다릅니다. 여러 다른 몸-마음들은 여러 다른 일이 일어나게 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은 참전체성이 하는 작용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전혀 없죠. 이게 다입니다. 

 

질문자: 그게 다 라고요? 

 

라메쉬: 그게 다죠. (웃음) 

 

질문자: 만일 저희가 본성은 본성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이해하고 더 자주 지켜본다면 이 자체로 삶에서 "나"의 영향을 줄여서 뭔가 다른 어떤 것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하지 않을 까요? 

 

라메쉬: 그렇죠. 그럼요. 

 

질문자: 그럼, 삶은 목적이 없다고 해도 공허하지 않군요? 

 

라메쉬: 맞는 말입니다. 목적을 생각하는 것이 실수죠. 삶은 나아갑니다. 삶은 계속됩니다. 

 

질문자: 삶은 즐겁죠! (웃음) 

 

라메쉬: 그렇죠. 그럼요. 맞서 싸우지 않으면 삶은 아주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질문자: 삶이 이 모두를 하고 있다면 스스로 즐기고 있음에 틀림없군요. 그리고 자신을 위한 것임이 틀림없군요. 

 

라메쉬: 그래서 힌두 철학에서는 현상세계 전체와 그 작용을 릴라로 여기지요. 릴라는 놀이 또는 춤입니다. 그냥 일어나는 일이죠. 만일 여기서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는데 어떤 외계인이 와서 이것을 보면 아마 "이것의 의미가 뭐지?"라고 묻겠죠. "사람들이 뭘 하고 있지? 이것의 의미와 목적이 뭐지?"라고 의아해 하겠죠. 

이것은 그냥 사람들이 즐기면서 추는 춤일 뿐이고,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그냥 춤을 즐기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기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28jung)

 

                               - 리만 편집,김영진(관음)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