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의식이 말하다(47)
-- 중도(中道) --
질문자: 여기 서양 문화에 비해서 인도 문화에 있는 사람들이 '둘이 아님'이라는 이해에 좀 더 쉽게 빠져들지 않나요? 여기 서양은 너무나 물질 만능주의라서요.
라메쉬: 보시면, 이 과정은 계속되고 있어요. 인도에서 최고의 학력을 가진 젊은이들이 여기 서양에 와서 물질적인 부를 추구합니다. 그리고 인도에 있는 극빈층의 사람들은 어떤 서양들 보다 더 물질 만능주의죠!
이제 물질적으로 충족하고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서양의 젊은이들이 이런 가르침을 찾아서 인도로 가고 있어요. 바가바드기타에서 크리슈나 신은 어떤 일이 일어날 기회는 너무 부자이고 성공한 사람이나 너무 부족하고 가난에 찌들은 사람들보다는 보통 환경 속의 보통 사람들의 경우에 더 많다고 말합니다.
-- 가짜 스승들 --
질문자: 왜 이렇게 가짜 영적 스승이 많나요?
라메쉬: 진실하거나 진실하지 않은 스승들에 관해서 윌리엄 로(William Law)가 한 말을 들려주죠. "어찌하여 그리 많은 가짜 영혼이 세상에 나타나서 거짓 빛과 거짓 불로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무엇을 알며 계시를 받고 신성한 삶을 개척했다고 주장하며, 특히 신에게서 비범한 부르심을 받아서 기적을 행한다고 주장하지 그대는 아는가? 그들은 진정으로 신이 자신에게 그런 것을 주었다고 믿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먼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고서 신을 향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본성을 죽이기도 전에 신에 너무 민감해졌다. 자아 또는 타락한 본성의 손에 놓인 종교는 자신에게 남겨진 본성을 발견하는데 쓰이지 않고 최악의 악함 만을 밝혀내는데 쓰일 뿐이다. 그러기에 이렇게 불타는 종교인들의 일그러진 열정은 세속적인 것을 쫓는 열정보다 훨씬 더 못하다. 긍지와 자만, 증오, 박해가 종교적 열정이라는 탈을 쓰고 자신에게 남겨진 본성이 부끄러워하는 행동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아주 강한 어조로 말했는데, 250년 전의 글입니다. 저는 윌리엄 로에게 이렇게 물을 겁니다. "누가 이런 가짜 스승들을 낳았는가? 누가 그들이 하는 행동을 하게 했는가? 거룩한 사람을 낳는 힘과 다른 힘이겠는가? 이런 일그러진 영혼들 조차도 참전체성 기능의 일부가 아니겠는가?"
-- 살아있는 구루가 필요한가? --
질문자: 은총이 일어나는 과정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아도 일반적으로 깨달음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스승이 필요하다고들 말하는데요. 그런가요?
라메쉬: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요점은 어떤 제자들과 어떤 스승이 함께하게 되는 일이 참전체성 작용의 일부라는 사실이예요. 제자와 구루는 떨어져 있는 양극일 뿐이죠. 이 구루와 제자가 함께 하나의 관계를 형성하고 이런 관계가 형성되는 일은 참전체성 작용의 일부입니다.
질문자: 그리고 그일은 구루와 제자에게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그런 관계가 일어나는 시간이 되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않겠군요.
라메쉬: 맞아요.
질문자: 선생님의 책 '지침들'에서 찾는 이가 길을 따라 나아갈 때 함께 하는 표지판이나 지침, 지표가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라메쉬: 그래요. 129계단을 오르는 길에서 끝이 가까워지면 징후를 볼 겁니다. 그리고 그 수준에서는 "내"가 그대로 남아있어요. 그래서 "내"가 "아, 내게 진전이 있구나"라고 말하면 "내"가 더 강해지겠죠! 마침내 지침들은 그저 지침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우치면서 딱히 지침은 중요하지 않게되지요.
질문자: 저는 꽤 자주 구루를 찾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합니다. 스승이 왜 필요한가요? 제게 개념이란 제 스스로, 저 혼자만의 힘으로 알아낼 수 있어야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라메쉬: 라마나 마하리쉬에게는 인간 형태로의 스승은 없었어요. 그분 살아 생전에는 없었죠. 그분 전생에서는 있었을 수도 있겠죠. 그분의 유기체는 상당히 진화해서 사다나 같은 것은 할 필요가 없었어요. 그분이 뭘하든지 그냥 일어났어요. 하지만 라마나로 불리는 몸-마음 유기체에 영적 진화가 축척되기 이전의 생에서는 인간 형태의 스승들을 거쳤던 유기체들이 있었을 수도 있지요. 마하리쉬에게는 아루나찰라(Arunachala) 동산이 구루였어요. 아주 초기부터 아루나찰라가 자신에게 뭔가를 했다고 말씀하셨어요. 감각을 일깨웠죠. 마하리쉬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어요. 그래서 마하리쉬는 학교 수업료를 내라고 준 돈을 가지고 집을 떠나 기차역으로 가서 돈을 주며 그 돈으로 갈 수 있는 곳까지 기차표를 끊어 달라고 했어요. 그 표로 티루반나말라이(Tiruvannamalai)까지 갔는데, 아루나찰라가 있는 곳이죠. 그래서 참의식이 여행하면서 이용하는 각각의 몸-마음 유기체는 구루와 같은 것을 만나게 되는 목적지를 향해서 나아가고 그 동안에 그 유기체를 통해서 일어나기로 되어 있는 사다나 같은 것들을 행하지요. 이런 까닭에 "내게 구루가 필요할까? 어떤 길이 최상의 길인가?"라는 질문은 정말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겁니다. 최상의 길이나 최악의 길은 없어요. 단지 각 개별 유기체에게 제시된 길이 있을 뿐입니다.
--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 --
질문자: 선생께서 쓰신 여러 책들을 읽었고 지금은 '가르침의 체험(Experiencing the Teaching)'을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여러 대담에도 참석했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과 상호교류하면서 뭔가를 알아차렸는데, 이 가르침이 제가 받은 영향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 궁금해요. 세상의 보통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는데 애를 먹어요. 사람들과 어떤 연결 고리도 찾을 수가 없어요. 그렇게 상호교류하는 일이 거의 무의미해 보이네요. 이건 마치 제가 다른 사람들 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그런 것은 전혀 아닙니다. 제가 뭘 하고 있는지 좀 일깨워주시겠습니까?
라메쉬: 자신이 가장 관심있어하는 것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있을 때 늘 좀더 편안하게 느낄겁니다. 중독된 사람일수록 더 하겠죠. 알코올에 깊이 중독되어 있다면 알코올에 중독된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있을 때에만 외롭게 느끼지 않을 겁니다. 그런 모임에서 어울리지 못하면 외롭겠죠. 마하라지께서는 아드바이타, 즉 불이원성을 중독으로 부르셨어요. 한번은 제게 "이 악습에 얼마 동안이나 중독되어 있었나?"라고 물으셨지요. 저는 "기억하는한 처음부터입니다."라고 대답했죠.
-- 기쁨 --
질문자: 바잔(*역자주, 요가에서 이르는 영적으로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르는 것이 왜 좋은 일이죠?
라메쉬: 그것이 당신에게 기쁨을 주나요?
질문자: 예.
라메쉬: 기쁨을 피해야할 까닭은 없죠. 전혀 없죠. 기쁨이 찾아 온다면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세요. 기쁨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해서 갈망하지는 마시고!
-- 성관계 --
질문자: 성관계를 갖는 것이 정말 깨달음에 방해가 됩니까?
라메쉬: 성관계를 죄라고 생각할 때만 방해가된다고 전 말합니다. 제 해석은 그래요. 죄는 언제나 마음에 있지 몸에 있지 않습니다.
질문자: 예전 스승께서는 성욕을 억제하라는 규율을 강조하셨는데요. 하지만 성욕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을 억제하는 것이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라메쉬: 제 말이 그말이예요. 행동이 일어나면 신의 의지로, 즉 참전체성 작용의 일부로 받아들이세요. 그러면 죄가 없어요. 그런데, "내가 그 일을 저질렀어. 그러지 말아야 했는데. 신이시여 용서하소서!"라고 한다면 죄에 바탕을 두고 모든 것을 생각하게 되지요.
질문자: 사실이죠. 왜냐하면 행하는 것은 참의식이니까요.
라메쉬: 전적으로 당신의 신념에 달려있어요. 성행위가 일어났다고 해서, 왜 다른 모든 일은 신의 의지로 일어났다고 생각하면서 성행위 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야 합니까? 왜 다른 모든 행동은 신의 행동이라고 여기면서 성행위만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면서 죄를 지었다고 생각해야 합니까? 다만 명심할 것은, 적극적으로 섹스를 추구하는 것과 성행위가 일어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두가지 현상입니다.
질문자: 성관계가 오직 사랑에서 비롯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라메쉬: 사춘기에는 보통 성행위가 사랑을 초월하지요. 사랑은 중요하지 않고 관계가 없지요.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는 성관계에 사랑이 필요하지요. 사랑 없는 성관계는 의미가 없지요. 그 이후에는 사랑해서 성관계로 이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요. 그리고 결국에는 사랑이 성관계를 초월하지요. 이런 식으로 과정이 진행됩니다. 어느정도의 단계를 지나면 사랑이 성관계를 초월하고 사랑은 사랑으로 남지요. 보편적 참사랑의 일부로 남지요.(26cho)
- 리쿼만 편집,김영진(관음)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