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의식이 말하다(45)
-- 영적 수행 --
질문자: 자연의 상태에 도달하려면 명상이 필요한가요?
라메쉬: 필요 없어요. 사실, 그런 경우는 자연의 상태가 아니죠. 자연의 상태가 될 수가 없죠.
질문자: 명상이 아주 재미있어요. 제가 필요 없는 일들을 많이 하는 것 같군요. 그래도 그것이 일어나는 일이니까, 다 필요하죠. 안 그렇습니까?
라메쉬: 그럼요. 당연하죠. 현재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필요해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누가 명상을 한다면 저는 그냥 하던 명상을 계속하라고 말해요. 요가를 한다면, 계속 요가를 하면 됩니다. 단지, 어떤 변화가 일어날 때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변화도 일으키려고 하지 마세요. 자신의 삶을 계속 살아가고 변화가 일어난다 해도 죄책감을 가지지 말고 받아들이세요.
질문자: 선생님과 개인적으로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어쨌든 만트라를 반복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인데, 뭔가 아주 멋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대단한 경험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지만요.
라메쉬: 그게 좋은 겁니다. 아니면 그 경험을 붙들고 있었을테니까요.
질문자: 제가 어렸을 때, 아주 차가운 물에서 수영을 할 때면 항상 차가워서 깜짝 놀라곤 했는데, 매번 적응이 됐으면 하고 바랬죠. 깜짝 놀라는 것이었는데, 마치 잠에서 깨는 것 같았어요. 처음으로 "나는"을 반복하는 일을 살펴봤을 때도 그때처럼 깜짝 놀라는 경험이었습니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나는"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이것을 쫓아야만 하나요? (웃음)
라메쉬: 받아들이세요. '해야만 한다'든지 '하지 말아야만 한다'든지 하는 의문을 갖지 마시고.
질문자: 이런 모든 영적 수행이나 훈련하는 방법이라는 것들에 어떤 가치라도 있나요?
라메쉬: 인간의 마음은 시켜 주기만 하면 뭐든지 하고 싶어서 안달이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많은 영적 수행이 깨달음에 이르게 해준다고 굳게 믿고 심지어 그런 방법들을 수행하는 것 자체가 깨달음이라고 굳게 믿는지를 알면 놀라실 겁니다. 이건 순전히 맹목적인 숭배고 미신이지요.
질문자: 하지만 모든 영적 수행을 맹목적인 숭배와 미신으로 치부하면 마음을 닫아버리게 되잖아요?
라메쉬: 전적으로 마음을 활짝 열어두세요. 어쩌다 어떤 수행을 하게 된다면 해보고 두고 보세요.
제 경우를 보면 저는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를 찾아 뵙기 전에 20년 동안 한 구루를 모셨어요. 그분은 전통적인 입회식을 해주는 전통적인 구루였죠. 그 당시에 저는 구루에 대한 열망이 너무도 강해서 그 분을 찾아 갔을 때 짧은 입회식을 거치는 동안 감정이 너무나 북받쳐서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죠. 쌓였던 감정이, 쌓였던 구루에 대한 열망 자체가 이런 식으로 표출 됐던 것이지요. 얼마 안 있어서 그분의 가르침에 거짓이 없었지만 그분의 가르침은 제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죠. 누가 마하라지께 가서 "제 아내가 아픕니다."라거나 "제 아들이 직장을 잃었습니다."라고 말하면 마하라지께서는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하네."라고 말하셨을 겁니다. 반면에 이전 구루께서는 그런 일을 자기가 해야 할 일 중의 하나로 여기셨고 사람들의 영적 삶을 책임질 뿐만 아니라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서 진실되게 물질적인 도움도 주셨을 겁니다. 마하라지의 가르침은 완전히 비개인적이고 보편적이었어요. 하지만 이전 구루께서는 처음에는 힌두교도였다가 둘이 아님을 믿는, 아드바이타를 믿는 사람이 되셨죠. 이전 구루는 "누구는 이런 예배를 드리고 누구는 저런 수행을 하고 이런저런 사원으로 가보시오."라고 말하셨을 겁니다. 그분은 사기꾼이 아니예요. 진짜였어요. 하지만 그분은 끝까지 자신의 구루가 한 말을 궁극의 것이라고 확신했고 오래 전에 죽은 자신의 개인적 구루가 여전히 자신의 행동을 이끌어 준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제가 12살 때부터 찾고자 했던 것이 이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해졌어요. 하지만 이 유기체가 관계를 모질게 끊지 못하는 성격을 타고나서 그 구루와의 관계를 20년 더 이어갔지요. 이 관계에서 특이한 점은 이것을 지난 1950년에 점성술에서 예언했다는 사실입니다. 별자리를 읽는 점성술사의 예언이 아니라 나디(nadi)라고 불리는 남부 인도 예언들 중에 하나였어요. 한 발 뼘쯤 되는 마른 나무껍질같은 잎사귀가 있었는데, 아주 탄력이 좋아서 부러지지 않았지요. 그 위에 아주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거기 쓰여진 예언에 따르면 제가 먼저 한 구루를 20년간 모실 거지만 별로 신통치 않을 것이고 은퇴한 뒤에 저의 진정한 구루를 만나고 이때 아주 빠른 진전이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제가 은퇴한 뒤에 '더 마운틴 패스(The Mountain path)'라는 잡지에서 진 던이 쓴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에 관한 글을 읽었어요. 마하라지의 다락방에 처음 올라갔을 때 니사르가다타께서 처음 제게 하신 말씀이 "자네 마지막으로 찾아왔군. 안 그런가? 와서 앉게."였어요. 그러니, 누가 치유하는 재능이 있다면 왜 안됩니까? 점성술에 재능이 있거나 심리치유에 재능이 있다면 안될 까닭이 뭡니까?
니사르가다타를 뵙기 전의 20년을 허비한 것이 아니예요. 모든 것은 그 다음 장면을 위한 준비 과정입니다. 그래서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어떤 수행을 하게 된다면 저는 피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군요. 받아들이고 해보세요. 나중에 이런 영적 수행을 그만 두게 된다면 그렇게 놔두세요. 그리고 그렇게 그만두게 될 때 제가 권해드릴 것은 그만두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는 것뿐 입니다. 일어나는 일이고 당신이 통제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장자가 말했어요. "스승님께서는 오실 때가 됐을 때 오셨고 스승님께서는 일이 평범하게 흘러가듯이 그렇게 떠나셨다." 이것을 심지어 지능의 수준에서 어렴풋이만 이해해도 해방감이 들기 시작하는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좌절감이 해방감으로 바뀌지요. 좌절감이란 "내"가 포기하는 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의지력이죠. '나'란 단지 신 또는 참전체성이 작용하는데 쓰여지는 수십억 인간들처럼 하나의 도구일 뿐이라는 확신이 정말로 있다면 어떻게 엄청난 해방감이 들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질문자: 어떤 책들을 읽었는데, 책에서는 좀 더 의식적으로 자신과 자신의 생각과 또한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하라고 권하더군요. 제가 그렇게 해보니까, 수고스럽고 실망스럽더군요.
라메쉬: 그 사실을 깨우치면 자동으로 생각과 노력이 적게 들지요.
질문자: 좀더 참의식의 완벽한 연장선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좀 더 의식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죠.
라메쉬: 그게 다 헛소리죠! 존재하는 헛소리의 양이 엄청나죠! 하지만 "엄청난 양의 헛소리"가 존재하는 것도 참전체성 작용의 일부인데, 이 때문에 깨달음이 오직 한정된 수만큼만 일어날 수 있는 거죠. 깨달음이 한정된 수만큼만 일어나기 위해서 이런 헛소리들은 계속되어야만 하지요.
질문자: 찾는 이가 계속 탐구하게 하는군요.
라메쉬: 그렇습니다. 거의 끝임 없이 탐구하게 하는 이유는 이렇게 찾고 탐구하는 것이 참전체성 작용의 일부이기 때문이예요. 찾고 있는 주체는 그 개인이 아닙니다.
질문자: 그러면 명상 수행을 하지는 않지만 명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나요?
라메쉬: 그것이 진정한 명상이죠. 하지만 제가 말하듯이 어느 시점에서 영적인 진전을 위해서 명상이 그 유기체에 필요하게 되면 유기체는 명상을 해야할 겁니다. 그 유기체는 이런 저런 명상을 꼭 해야만 되는 곳으로 안내될 것이고 명상할 겁니다. 저도 하루에 적어도 30분은 명상을 해야 한다고 말하던 예전의 구루에게 20년간을 가야만 했어요. 그렇게 20년간 행한 20년간의 명상은 이 유기체가 마하라지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도록 하는데 어떤 영향을 미쳤음이 틀림없어요.
질문자: 자파(japa, 만트라를 반복하는 수행 - 옮긴이) 수행은 어떻나요?
라메쉬: 특정한 경우에 필요할 수도 있는 영적 수행들 중에 하나죠. 하지만 영적 수행이 꼭 필요하지는 않아요.
질문자: 많이 할 필요가 없군요.
라메쉬: 많이 할 필요 없어요. 사실 솔직히 말해서 제 가르침은 깨달음으로 가는 정말로 게으른 방법이죠. (웃음) 그냥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라! 이 보다 더 게으른 방법이 어디있겠어요?
-- 기도 --
질문자: 기도는 어떤 것인가요?
라메쉬: 우선, 무슨 의미로 기도를 말하는 것인지에 달려있습니다.
질문자: 개인적인 신 앞에서 자신을 탄원하는 것이죠.
라메쉬: 그래요. 하지만 보통은 어떤 대상을 두고 기도하지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수도 있죠. 왜 기도가 여러 다른 형태의 에너지와 다르다고 생각하나요? 그렇게 강렬하게 바라는 것, 뭔가를 하고 싶어하는 강렬함은 일종의 에너지예요. 어느 정도 까지 그런 에너지가 작용하는지, 어느 정도까지 이런 에너지가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가 없어요. 당신이 뭔가를 위해 기도하고 기도한 일이 일어나면 "나의 기도가 응답 받았다."라고 말하죠. 반면에, 대부분의 경우에는 기도에 응답이 없습니다.
질문자: 응답 받은 것은 기억하죠.
라메쉬: 기억 안 해야할 이유도 전혀 없죠.
-- 영적 경험 --
질문자: 아주 오랫동안 저를 괴롭혀 온 의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저는 선(禪) 수행을 하던 승려였습니다. 10년 동안을 매일 같이 앉아서 좌선을 했고 좌선을 하는 동안 저는 그냥 사라졌어요. 종 소리를 들으면 그 종 소리가 되었습니다. 나무를 보면 저와 나무 사이에 있던 거리가 사라지고 저는 나무가 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곧 바로 일어났습니다. 정체성이 어디에나 있었지만 특정한 대상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전 늘 그런 상태에서 같은 사람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런 일이 10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반복되다가 의문이 들었는데, 평상시 의식에서 제가 바뀌지 않는다면 여기에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제가 겪어왔던 상태가 무엇이고 이것이 저의 개인 성향과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는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라메쉬: 마음이 노력한다는 점에서 관련이 있군요. 그런 상태가 자연스럽게 오지는 않았죠?
질문자: 그럼요. 아주 힘들었습니다.
라메쉬: 아주 힘들죠. 어떤 "누군가"가 아주 고된 노력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은 어떤 마음의 상태라는 결과를 낳았죠.
질문자: 물론입니다.
라메쉬: 아무 물리 실험이나 화학 실험을 해보세요. 결과가 아주 명확하게 나오는데, 요가의 경우도 같아요. 1 단계, 2 단계, 3 단계, 4 단계, 5 단계를 실행합니다. 단계들이 모두 실행되면 마침내 특정한 결과가 나와야만 해요. 하지만 이 모두가 여전히 현상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지요. 이런 까닭에 마하라지께서 말씀하시곤 하셨는데, 우리가 사마디에 10분 동안 들어가 있을 수도 있고 10일 동안 들어가 있을 수도 있고 10년 동안 들어가 있을 수도 있고 100년 동안을 들어가 있을 수도 있지만 자기가 떠난 바로 그 자리로 돌아와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니 아무런 가치가 없죠.
질문자: 맞는 말씀이십니다. (웃음)
라메쉬: 당신은 그냥 머리로가 아니라 경험에서 우러나와서 제 말에 동의하는 거지요.
질문자: 물론입니다. 그리고 그때 전 사마디와 사마디가 주는 그 특별함을 떠나보내고 일상의 개인으로 돌아오는데 무척 힘들었습니다.
라메쉬: 정말 그랬을 거예요. 하지만 이런 종류의 상태가 저절로 일어나고 고되게 노력하는 "내"가 없을 때 그런 종류의 상태가 일어나는 까닭은 오직 한 가지뿐이예요. 마하라지께서 반복해서 말씀하셨던, "이해가 모든 것이다."입니다. 처음에 이해는 지적 수준에서 시작되어야 하는데, 그럴 수밖에 없지요. 이런 까닭에 라마나 마하리쉬와 마하라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어요. "즈나나 요기가 되려면, 즉 지식을 찾으려면 정말로 찾고 있는 것이 지능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너머서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만큼 정직하고 예리한, 아주 예리한 지능이 있어야만 한다." 이런 찾음은 이해력의 문제가 아니라 직관적 이해의 문제예요. 하지만 지능을 통해서 도달해야만 하지요.
질문자: 하루는 사이 바바의 책을 읽고 있었어요. 전 그분을 만난 적도 없고 대화를 나눈 적도 없어요. 조금 뒤에 알 수 없는 냄새가 났어요. 몇 장 뒤에 그분이 신성한 재를 만들었다는 부분을 읽었고 그 냄새가 신성한 재에서 나는 냄새라는 것을 알아차렸는데, 책을 읽기 몇 달 전에 그 냄새를 맡아봤기 때문이예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게 무슨 뜻이죠?
라메쉬: 참의식 안에서는 어떤 일도 일어 날 수 있다는 뜻일 뿐이예요. 보시면, 지능은 모든 일이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고 우겨요.
질문자: 그 사람과 같은 의식, 즉 같은 진동 수준에 있을 수 있다는 뜻일까요?
라메쉬: 무슨 설명이든 원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죠.
질문자: 어떤 라디오 방송에 주파수를 맞추는 것과 비슷할까요?
라메쉬: 백 년 전에 당신이 라디오에 관해서 말했다면 다들 미쳤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지금부터 백년 뒤에는 모두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 있을 지도 모르죠. 누가 압니까? 참의식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좋다면 기적이라고 불러도 돼요. 그래서 만족스럽다면요.
질문자: 아니요. 기적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건 마치 같은 진동 수준에 맞춰 지면서 다른 편에 있는 진동을 듣고 알고 느끼거나 이해하는 것 같아요.
라메쉬: 예. 다르게 말하면 당신은 그것의 구조적인 측면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질문자: 그렇군요.
라메쉬: 그런데 저는 현상의 본성에 관해서 말하고 있어요. 구조적인 것은, 우리는 아직 몰라요. 몇 년 안에 아마도 과학에서 그런 구조적인 것에 관해 설명해 줄 수도 있겠죠.
질문자: 고맙습니다. 우리가 구조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면 모든 순간이 기적이 되는군요.
라메쉬: 그럼요. 그것이 바로 라마나 마하리쉬께서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진정한 본성이 아니다."라고 하신 말씀의 뜻입니다. 생각하는 것은 개념화 한다는 것이고 '있는 그대로'에서 멀어진다는 뜻입니다.
질문자: 제가 미국 북동쪽 메인주에 있을 때 한 경험인데요. 바위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며 파도가 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인간의 한계를 너머서 있던 움직임을 느꼈어요.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힘과 연관되는 어떤 것을 찾고 있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제가 한 그 경험과 연관지을 수가 없군요. 제가 뭘 하고 있었나요?
라메쉬: 당신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고 정확히 그 때문에 그런 경험이 일어났습니다. 경험이 일어난 뒤에는 당신은 그 경험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죠. 더 많이 원했어요. "어떻게 일어난 거지? 왜? 왜 나 한 테?" 이렇게 "왜"라고들 하면서 경험을 더 멀리 밀쳐내지요. 영적 도표에서 보자면 당신을 나타내는 점이 더 진화했었다면 그런 경험에 그저 놀라워만 했을 거예요. 일어나서 걸어나갔겠죠. 그럼 그 경험이 더 자주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때가 안됐기에 마음은 질문하기 시작하지요. 당신이 경험을 쫓아갔기에 경험은 더 멀리 달아났죠. 아주 일반적인 일이예요. 그런 멋진 경험을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겠지만 함정일 따름입니다. (25jung)
- 리쿼만 편집,김영진(관음)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