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두 법륭선사의 심명(心銘) 공부(6)
[본문]
三世無物, 無心無佛
衆生無心, 依無心出
分別凡聖, 煩惱轉盛
計較乖常, 求眞背正
삼세(三世:과거,현재,미래)에 아무 것도 없어
심(心)도 없고, 불(佛)도 없으며
중생과 무심(無心, 佛)도
무심에 의지해서 나온다.
범부와 성인을 분별함은
번뇌를 더욱 번성하게 하는 것이고
머리로 헤아림은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며,
진(眞)을 구함은 정(正)에 어긋나는 것이다.
[해설]
본래 무생(無生)의 공적(空寂)함이라,
삼세(三世)에 무엇이 있다 할 것인가.
심(心)이라 할 것도 없고, 불(佛)이라 할 것도 없다.
심(心)이 본래 무심(無心)이며, 불(佛)이 본래 무불(無佛)이다.
그래서 무심이 곧 심이고, 무불이 곧 불이다.
일체의 상을 떠난 자리가 불이기 때문에
불이라는 相이 있게 되면 이미 불이 아니어서 무불이고,
무불이 이미 그러한 불의 뜻(相을 떠난 非佛)이 갖추어져 있는지라
무불이 곧 불이라 함이다.
<금강경>에 "무릇 상(相) 있는 모든 것은 허망한 것이나니,
그 모든 상(相)이 비상(非相)임을 안다면 곧 여래를 봄이다.'고 함도 같은 뜻이다.
'중생과 무심(無心)'에서 '무심'은 중생과 대비하여 불(佛)을 나타낸 말이다.
중생은 심상(心想)이 있어 무심이 아니다.
그러나 그 유심상(有心想)의 상태는 무심(無心)에 의지하여 있다.
바다의 파도가 바닷물에 의지하여 있는 것과 같다.
사물을 보고 듣고 분별하는 것은 본래 무심한 마음에 의지한 까닭이다.
그래서 중생도 무심에 의지하여 나온다고 하였다.
불은 곧 무심이니 불도 마찬가지로 무심에 의지하여 불이고, 불이 될 수 있다.
중생과 불이 평등하여 무심에 의지하여 나왔는지라 그 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파도 없이 잔잔한 바다이든 파도치는 바다이든 모두 똑같은 바닷물일 뿐이다.
이러한 진실의(眞實義)에 어긋나게 중생과 성인을 분별함은
무명(無明)을 더욱 두텁게 하여 번뇌가 성해진다.
무심의 뜻을 안다면 머리로 헤아리는 행을 할 수가 없다.
진리에 어긋나는 까닭이다.
진(眞)을 구함은 진이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에 어긋나고,
무심의 뜻에도 어긋난다.
정견(正見)이란 일체법이 모두 불가득(不可得)임을 요지(了知)함으로부터 얻어진다.
또한 앞에서 설명한 법문도 모두 정견이다.
자신의 수행이 이 정견에 수순하는가, 어긋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박건주 역주 <心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