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참의식이 말하다(42)

무한진인 2021. 4. 9. 21:23

질문자: 그저 하나의 생각일 뿐인 그 생각과 동일시하는데서 탈피하는 탈정체성의 과정에서, 무엇이 포기를 하나요? 계속해서 객체로서 뭔가를 원하고 이해하기를 원하는 것은 감정인 것 같습니다. 

 

라메쉬: 그 동일시된 의식인 "내"가 바로 원하는 것이고 생각하는 것이고 갈망하는 것입니다. 

 

질문자: 포기하는 자가 있다는 생각, 뭔가를 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군요? 

 

라메쉬: 맞습니다. 어떤 연유로 자신을 한 특정한 몸-마음 유기체와 "나"로써 동일시 했던 참의식이 불현듯 변하면서 그렇게 동일시하던 정체성이 떨어져 나갑니다. "정체성이 떨어져나간다."라는 말은 단순히 주체 행동 의식이 떨어져 나간다는 뜻입니다. 

 

질문자: 어떻게 항복하는 것이 주체 행동 의식의 부재와 관련이 있는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라메쉬: "항복"이라는 말은 깨달음이 일어나는 것을 뜻하는 확실하고 궁극적인 단어인데, 이상하게도 우리 일상 생활에서는 아주 비열한 단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일상에서는 "항복"이라는 말을 쓸때 보면 항복을 하는 누군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항복하는 사람은 수치스러워 하지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항복에는 항복하는 "내"가 없습니다. 항복은 그냥 일어날 뿐입니다. "항복"이라는 말은 "나"와 신으로 나누어지는 이원성이 있을 때 쓰는 말입니다. 이런 항복이 일어날 때는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의지"가 떨어져나가고 존재하는 것은 오직 신의 의지 뿐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입니다. 어디선가 읽었던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한 남자가 어쩌다 절벽 밑에서 손가락으로만 간신히 매달려 있는 골치 아픈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잠시 후에 "거기 위에 누구 없소? 도와 주시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래. 나 여기 있네."라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남자는 다시 "누구요?"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목소리는 "나는 신이네. 도와 주겠네. 내가 하라고 하는데로 정확히 하게나."라며 답했습니다. 남자가 안도하며 "좋습니다. 말씀하시는데로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신이 말했죠. "그냥 놓게나, 무사할 걸세." 잠깐 있다가 남자가 소리쳤습니다. "거기 다른 사람 누구 없소?" (웃음) 살면서 어느 단계에 이르렀을 때는 어느 정도 정말 신뢰해야 하는 순간에 이릅니다. 신뢰해야할 사실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지능으로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자기 자신이 삶을 살아간다고 아무리 굳게 믿더라도 삶은 살아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냥 자신의 삶과 가까운 사람들의 삶을 돌아봐도, 다음에 일어날 더 중요한 사건을 일으키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은 계획된 것이 아니라 우연히 일어났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난 지금의 위치에 있지 못했을 거야."라고, 지금 위치가 좋든 싫든, 이렇게 말하겠죠. 이런 두 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어느 정도 신뢰가 쌓이게 되지요. 이 두 가지 원칙 말고 우리의 삶을 이끌어줄 다른 뭔가가 있을지는 의문이군요. 삶은 우이락 맞서 싸우지만 않는다면 정말 진실로 단순해질 수 있습니다. 

삶과 싸우지 않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받아들인다는 것이, 두통 때문에 아스피린을 먹는 것처럼 필요해서 뭔가를 회피하는데 의미있는 행동을 안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삶을 받아들인다는 뜻은 일이 일어나는 대로 과거를 돌아보거나 앞날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그때 그때 처리해 나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루 하루, 순간 순간, 삶을 받아들이면 삶이 놀라울 정도로 단순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질문자: 더 하실 말씀이 있나요? 

 

라메쉬: 그게 바로 요점이죠. 어느 누가 무엇을 더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더해지는 모든 말은 그냥 개념적인 구조를 쌓는 일일 뿐이고 방해만 될 뿐이지요. 

 

질문자: 저와 제 친구들은 선생님의 책들을 읽고서 '나는'에 머물려고 노력하고 있는데요. 저는 이 친구들과 앉아서 커피를 마시면서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모두 똑 같이 말할 수도 있고, 제 친구들도 마찮가지겠지만, 전 여전히 얼간이로 남았있습니다. 전 여전히 비참한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라메쉬: 그래요. 

 

질문자: 그럼, 선생님은 이루셨는데 왜 저는 안 돼죠? 

 

라메쉬: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질문자: 카르마든 뭐든 상관 없습니다. 전 그냥 여기서 벗어나고 싶을 뿐입니다. 

 

라메쉬: 보시면, 이 농담이 농담이라는 사실을 깨우치기 전까지는 가장 비극적인 농담이 될 수 있지요. 

 

질문자: 아 그럼요. 아주 불쾌합니다. 제가 원할 때 '나는'에 머물수가 없군요. 

 

라메쉬: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나는'에 머무르는 것이고, 깨달음을 얻기위해서 이 유기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이것 하나를 받아들임으로 해서 일어나는 해방감이 어떤지 상상이나 하시겠습니까? 깨달음이 이 몸-마음 유기체에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받아들임으로써 말이죠. 단지 이런 받아들임이 엄청난 해방감을 뜻한다는 사실을! 

 

질문자: 가끔 선생님께서 받아들임에 관해서 말씀하실 때, 마치 의지로 하는 뭔가를 뜻하시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그렇게 뜻하실리가 없다는 것은 압니다만. 

 

라메쉬: 받아들임이란 이해가 생기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질문자: 그럼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없군요? 

 

라메쉬: 없죠. 

 

질문자: 어제 어린 아이들이 세상이 될 때까지 머무는 본연의 상태에 관해서 말씀하실 때.. 

 

라메쉬: 그렇죠! 

 

질문자: 그럼 그때는 깨달음의 상태는 아니고 깨달음이 필요하기 전의 상태인가요? 

 

라메쉬: 그렇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종종 직관적으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입니다. 자, 전 이 경우에 제 손녀딸의 일을 자주 연관짓습니다. 여러 달 동안 로스앤젤레스에 있었을 때 요리를 해주던 아주 사랑스러운 여자 분이 있었습니다. 이 여자 분은 요리를 하면서 대담을 듣고 있었지요. 제가 제 손녀 이야기를 이미 세, 네 번은 했었죠. 그래서 한 번은 대화가 이 즈음에 왔을 때 그냥 이야기를 안 하고 넘어갈려고 했었죠. 그랬더니 이 사랑스런 여자 분께서 주방에서 머리를 내밀고 "저 사람들에게 선생님 손녀 이야기를 해주시죠!"라고 말하더군요. (웃음) 제 손녀, 아크세타가 네 살 때였는데, 정말 지칠 줄을 모르는 아이였죠. 하루가 끝날 때 즈음에는 아이 엄마는 완전히 지쳐서 뻗어버리곤 했지요. 그러다 어느 날 저녁에 아이 엄마, 지타가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아크세타, 보렴. 아크세타가 엄마를 너무 지치게 해요. 이제 엄마가 목욕을 줄 거예요. 목욕하고 나면 방에 들어가서 5분 동안만 조용히 있으면서 신께 기도하면, 신께서 아크세타를 더 좋은 아이로 만들어 주실 거예요." 그래서 아크세타는 바로 그러겠다고 했고, 아크세타는 방에 들어갔지만 아마 2분도 안 돼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너 신께 기도는 했니?"라고 물었죠. 아크세타가 말했습니다. "예 엄마. 정말 기도 했어요. 정말로 엄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 그래서 정말로 열심히 기도했어요." "뭐라고 기도했니?"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엄마가 말한 대로 했어요. 그분께 엄마를 많이 귀찮게 안 하도록 저를 좋은 아이로 만들어 줄라고 기도했어요. 정말 기도했어요." 그러자 엄마는 기뻤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날, 아크세타는 아크세타였고, 모든 게 똑같았죠. 그렇게 긴 하루가 지나고, 엄마가 물었죠. "아크세타, 엄만 니가 어제 밤에 기도한 줄 알았는데?" 아크세타가 대답했죠. "엄마, 기도했어요. 아주 열심히 기도했다고요. 그래도 그분께서 저를 좋은 아이로 안 만들어주시면 그분이 할 수 있는 게 없거나, 아니면 지금 이대로의 제가 되기를 바라시나 보죠." (웃음)                                                                                            (23jung)

 

                           - 리쿼만 편집,김영진(관음)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     

                          

 

                                                 검단산 정상에서~,  한강 두물머리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