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참의식이 말하다(39)

무한진인 2021. 3. 19. 21:04

질문자: 목격이 현재 순간에 사는 것과 같나요? 

 

라메쉬: 그렇습니다만, 현재 순간에 산다는 것은 누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목격도 마찮가지로 누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예요. 목격이 늘 계속될 때가 유기체가 현재 순간에 사는 것이고, 이것은 삶을 살아가는 "내"가 없기 때문에 꾸밈없이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몸-마음 구조체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행동들을 목격하는 것처럼 똑같이 자신의 몸-마음 구조체를 통해서 일어나는 행동들을 목격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간에 모든 몸-마음 유기체에 있어, 개별 유기체는 그 자신을 통해서 일어나는 모든 기능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그 자신이라는 개별 유기체를 통해서 기능을 하는 것은 바로 순수한 참주체, 다른 말로 참의식 또는 신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세상 가장 깊은 이해가 거기 있어요. 어떤 개별 유기체에도 의지력이란 있지 않아요. 이런 확신이 견고할 때 자신은 뒤로 물러나 앉게 되는데 이때 목격이 있고 침묵이 있습니다. 으르릉대는 세상 소음의 한 복판에 있을 때조차도 침묵이 있어요. 

 

질문자: 목격자에게는 진정 합쳐지는 경험이 있군요? 

 

라메쉬: 목격이 바로 합침이죠. 이렇게 합쳐진다라고 말하는 것은 "나"와 그대가 있다는 느낌이 있을 때만 그렇지요. 어떤 다른 것과 합쳐지는 "내"가 있는 한, 합쳐짐을 생각해요. 있는 모두가 참의식이라는 사실을 깊이 직관적으로 이해하면, 무엇이 있어 무엇과 합쳐집니까? 

 

질문자: 목격자와 목격되는 대상이라는 두 객체가 함께 하면 이것이 목격이 아닌가요? 

 

라메쉬: 관찰자와 관찰 대상에서 분리됨이 사라지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때 목격이 있어요. 

 

질문자: 개인의 마음은 본체를 인식할 수도 없고 심지어 '절대'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는데 그것에 관해서 이야기할 까닭이나 있을까요? 그렇게 이야기하고 나가서 개념화나 시키려고 이런 개념을 조작하는데, 이 모두가 완전히 웃기는 소리고 터무니 없어요! 

 

라메쉬: 그럼요! 당연하죠! 그리고 이것이 터무니 없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우친다면, 그때는 이 춤판에 낄겁니다. 그리고 이런 터무니 없음에도 가담하겠지요. 계속해서 몸-마음 유기체가 세상 속에서 살아가겠지만 그때는 주체 행동 의식은 전혀 없을 거예요. 이때 목격이 일어나는데, 자신의 몸-마음 유기체와 다른 모든 몸-마음 유기체 모두가 단지 참전체성이 기능하는데 쓰이는 도구로 인식됩니다. 

 

질문자: 깊은 잠 속에서도 목격이 일어나나요? 

 

라메쉬: 안 일어나요. 목격이란 사건을 목격한다는 뜻이예요. 생각도 하나의 사건이기에 목격이란 생각이나 사건을 목격한다는 뜻입니다. 깊은 잠 속에서는 목격할 사건이 없어요. 깊은 잠의 상태를 비목격 상태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되는데, 왜냐하면 목격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때문이죠. 그리고 목격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때문에 얽매이는 일도 없고 "나"도 없어요. 그래서 자신을 독립된 개체라고 여기는 의식이 깊은 잠 속에서는 없어요. 있는 모든 것이 참의식이기 때문에 늘 존재하는 것은 참의식이고 참의식은 깊은 잠 속에서도 존재합니다. 부재하는 것은 자신을 독립된 개체로 여기는 그 의식이지요. 깊은 잠속에서는 "내"가 부재하기 때문에 개념화하는 일이 없어요. 개념화하는 일이 시작되면 꿈꾸는 일이 시작되지요. 

 

질문자: 어떤 영적 지도자들은 하루 24시간 목격한다고 말하던데요. 

 

라메쉬: 그 말은 "내"가 더는 없다는 뜻입니다. "나"와 동일시하던 그 정체성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뜻인데, 이것은 전체와 동일시하는 것과 같아요. "하루 24시간 목격한다"는 뜻은 참의식이 늘 존재한다는 뜻이고 개인을 초월하는 비개인적 참의식이 늘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질문자: 목격하는 것은 비개인적 참의식이군요? 

 

라메쉬: 그럼요! 목격은 언제나 비개인적 참의식이 하는 것이죠. 

 

질문자: 제가 하는 목격이 영적 스승들에게 일어나는 목격과 같은 종류의 목격인가요? 

 

라메쉬: 여기서 보면 또, 영적 스승을 개별 개체로 여기고 있어요. 개별 개체는 목격하지 않아요. 그래서 스승이 늘 목격이 있다고 말하거나 참의식이 늘 존재한다고 말할 때는 "나"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비개인적 참의식인 "참나"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개체란 전혀 없습니다. 사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이 뜻하는 바예요. 행위자로써의 "나"라는 의식이 부재한다는 뜻이죠. 지난 밤 대담 후에 마샤가 "라메쉬 선생님, 선생님은 모든 것을, 모든 인간을 똑같이 보나요?"라고 묻더군요. 저는 이렇게 답했어요 "물론 아니죠. 사물들과 인간이라는 객체들 사이에 있는 차잇점을 저도 당신과 똑같이 봅니다. 사실, 차잇점이 있다면, 이런 객관적 표현 속에서 나타나는 엄청난 다양성을 경이롭게 본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겠지요. 그리고 여기에는 이 모든 다양한 객관적 표현 뒤에는 주체적 참실재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세상 가장 깊은 이해가 함께 있어요" 이 점에 관해서 제가 주로 드는 예가 있는데, 각각 다른 옷을 입고 찍은 자신의 사진 10장을 뿌렸다고 해봅시다. 아무도 모를 겁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10명의 다른 사람으로 보이죠. 하지만 '당신'은 그들이 같은 자신의 다른 모습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요. 당신이 아는 것은 앎이 있기 때문이죠. 깨달음이 일어날 때는 인간들을 포함해서 억만 가지의 물체들이, 이 모든 객체적 표현은 단지 같은 참주체의 다른 객체적 표현들일 뿐이라는 사실을 아는 앎이 있습니다. 

 

질문자: 이런 앎이 있군요. 아는 자도 있나요? 

 

라메쉬: 아니요. 앎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해에 개별적으로 이해하는 자가 없는 것과 같고, 목격에 개별 목격자가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지요. 이런 비개인적인 태도가, 이런 비개인적 시각이 정말 아주 중요합니다. 

 

질문자: 비개인적 "참나"는 단지 앎이군요. 

 

라메쉬: 맞는 말이예요. 사실은 당신이 "참나"라고 하는 순간 이런 "내"가 슬쩍 끼어들어요. 제일 좋은 방법은 "참나"라는 측면에서 생각하지 않는 것인데, 왜냐하면 "내"가 슬쩍 끼어들기 때문이죠. 

 

질문자: 목격이 일어날 때 이름과 형상도 인식되나요? 그냥 인식하고만 있어도 이름과 형상이 여전히 존재하나요? 

 

라메쉬: 아 그럼요. 물론이지요. 

 

질문자: 하지만 "내가 인식하고 있다."라고는 의식하지 않는군요? 

 

라메쉬: 맞는 말입니다. 비교하거나 판단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지요. 

 

질문자: 진정한 목격이 있을 때 깨달음이 가깝지 않나요? 자아라는 의식이 없잖아요. 

 

라메쉬: 맞아요. 자아라는 의식은 없고 다른 것이 있지요. 이것을 두고 저는 "참의식, 이해, 그리고 목격"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이들이 다른 세가지의 상태는 아니예요. 이해는 저절로 받아들임으로 바뀝니다. 목격할 것이 있으면 이해는 목격이 되지요. 목격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 이해는 비목격이 됩니다. 

 

질문자: 그 상태가 부재의 부재라는 상태인가요? 

 

라메쉬: 아니죠. 존재의 부재죠. 부재의 부재는 이 현상세계가 나타나기 전의 상태를 가리키는 개념이지요. 이런 상태를 언급하는 까닭은 마음이 "이 세상 이전에 뭔가가 있어야만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해가 깊은 단계에 도달하면 "그렇다. 뭔가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식으로는 아니지. 그 상태는 존재 의식이 부재하는 것 자체가 부재하는 상태지."라고 이해하게 되지요. 가장 깊은 이해의 단계에 도달하고 이런 마지막 장애가 남아있을 때, 이 마지막 장애를 제거하기 위해서 이런 이중 부정을 하나의 개념으로 쓰는 거예요. 

 

질문자: 여전히 잘 이해가 안되네요. 어떤 사람에게 생각이 일어났을 때 행동하는 대신에 생각을 목격한다면 은총이죠. 그리고 이렇게 목격하게 되는 것도 원인과 결과에 따라 일어나는데요. 생각에 반응하는 대신에 목격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원인과 상황이 이 사람에게 주어졌기 때문이죠. 현자의 경우에는 그 순간 카르마가 만들어지지 않지요. 

 

라메쉬: 카르마가 매 순간 만들어지지만 그것이 어느 누구의 카르마는 아니예요. 만들어지는 카르마는 이렇습니다. 사실 카르마는 삶을 지속시켜주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예요. 목격의 기초는 이해이고 이해는 은총이 있을 때에만 일어나기 시작해요. 

 

질문자: 그러면 그 순간에는 반응이 없군요? 

 

라메쉬: 맞아요. 

 

질문자: 그럼, 목격이 일어난다면 그 순간에는 해방되면서 그 순간, 자유가 있군요? 

 

라메쉬: 그 순간에 자유가 있죠. 그럼요. 자유가 있는 까닭은 생각이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예요. 그 순간에 자유가 있는데, 다만 목격을 행하는 것은 이해 그 자체예요. "내"가 목격하는 것이 아니죠. 

 

질문자: 이 세상 전체의 연극이 정해 놓은 대로 저는 지난 25년간 구루를 찾아다녔고 마침내 구루를 만나 그분의 발 밑에서 가르침을 받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 질문은, 그분께서는 "나를 구루라고 부르지 마시오."라고 말씀하셨지만 구루로서의 역할을 했다면 구루가 맞지않나요? 

 

라메쉬: 그렇죠. 그런데 그랬다면 구루라고 부르지 마세요. (웃음) 뭐가 문제예요? 

 

질문자: 문제 없습니다. 

 

라메쉬: 문제 없죠! (웃음) 늘 이런 식이예요. 마음은 문제를 만들어 놓고 해답을 원합니다. 대부분은 해답이 필요한 문제가 아니고 그냥 소멸될 문제들이죠. 문제는 소멸되는 것이지 해결되는 것이 아닌 까닭은 해결책이 없기 때문이예요. 문제가 소멸하게 되는 유일한 길은 문제가 일어나자마자 그냥 목격되는 거예요. 마하라지께서 말씀하셨듯이 문제는 "전달"되지가 않지요. 마음이 얽매이면 이때 문제는 정말 문제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하나의 생각일 뿐이죠. 이런 생각은 그냥 목격되면 사라져요. 

 

질문자: 제게는 목격자 자체도 깨어난 참의식의 한 측면처럼 보입니다. 

 

라메쉬: 정말 옳은 말이예요. 이 때문에 제가 정체성에서 탈피해가는 과정에서 이해가 되는 것이 바로 참의식이라고 말을 해요. 그리고 그 과정 중에 목격할 것이 있으면 그 행동하는 이해는 목격이 됩니다. 참의식, 이해, 목격은 단지 관념적으로 구분하는 말일뿐이예요. 자신을 독립된 개별 존재라고 여기는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이해가 되고, 또 목격이 되는 것은 바로 같은 참의식입니다. 근본적으로 다 같은 참의식이예요. 

 

질문자: 목격에서는 차이가 없군요. 현상세계는 자신의 근원인 본체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죠? 

 

라메쉬: 다른 말로 하자면, 참주체가 자신이 객관화되어 표현되는 이 현상세계를 목격하고 있다는 말이예요. 

 

질문자: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말씀이시군요? 

 

라메쉬: 맞아요. 분리되어 있지 않아요. 

 

질문자: 그 사실이 제게 기쁨을 주네요. 왜냐하면 분리되어 있지 않으면 오직 기쁨이나 사랑이라는, 이런 가치만 남기 때문이예요. 

 

라메쉬: 보시면,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해도 현상적으로는 여전히 분리되어 존재해야만해요. 햇빛아래에 서 있으면 자신과 자신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실체와 그림자는 분리되어 있어요. 하지만 그림자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아요. 그래서 분리되어 있지 않지요. 이 때문에 "현상세계가 실재하는가?"라는 의문에 답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답은 "실재하는 동시에 실재하지 않는다."라는 역설뿐이지요. 눈으로 볼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현상세계는 사실이예요. 그래서 실재합니다. 하지만 현상세계는 참의식이라는 바탕 위에서만 나타날 수 있어요. 참의식이 없으면 현상세계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상세계는 실재하지 않지요. (22cho)

 

                          - 리쿼만 편집,김영진(관음)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