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자아 탐구 실제 수행방법 및 이론 정리 (30)

무한진인 2021. 3. 4. 21:57

열림과 닫힘을 넘어서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잠깐 맛보기도 합니다. 

그들은 열림의 순간을 체험했고 그것은 정말 경이롭게 느껴지지요.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그것이 닫히는 느낌을 받아요.

따라서 그들은 영원히 열려 있는 상태를 만들어야 겠다고 굳게 다짐합니다. 

그들은 저를 찾아와 이런 일을 겪었다고 하면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데  

남은 걸림돌이 무엇이든 그것을 없애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열림과 닫힘의 느낌은 그 가치가 과대평가되고 있습니다. 

열림이 주는 큰 기쁨과 조화로운 느낌, 닫힘이 주는 개인적이고 답답한 느낌은 둘 다 더 깊은 곳에서 목격되는 현상입니다. 저는 계속해서 이런 목격함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바로 그 목격자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모든 것, 즉 열림과 닫힘, 들어감과 나감, 오고 가는 것과 같은 느낌들은 전부 변하기 마련이나 오직 목격자만은 불변하지요.

 

많은 구도자들이 자유로운 느낌을 얻었다가 잃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본질상 변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을 여전히 자신을 가리키는 잣대로 쓰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변화무쌍한 것을 지켜보는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할 수도 있습니다. 

언젠가는 그 아름다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지요. 

결코 변하지 않는 어떤 현상을 보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에서', 또 '누구 혹은 무엇으로서' 지켜보는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보이는 것들에 깊이 사로 잡혀서 이러한 인식의 근원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지나 오감을 통해 받는 인상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에 수반되는 느낌과 몸의 반응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인식의 일부지요. 

 

참자아 속에 '영원히 머물 수 있는' 사람은 현실에 결코 존재하지 않아요. 

아무도 이를 해낸적이 없어요. 

부처님도 그렇게 할 수 없었고, 예수님도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참자아란 그냥 우리 자신일 뿐이며 아무 노력 없이도 영원히, 늘 완전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에요.

사실상 참자아 안에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일'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변동은 변하지 않는 의식 속에서 나타나고 목격되기 때문이지요. 

 

개인적 자아가 떠나갈 때

때가 되면 우리는 개인이라는 감각이 현존 속에 나타나기는 하지만 현존이 더 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하나의 독립된 개인이라는 느낌은 여전하지만, 그것은 서서히 사라지는 중이지요. 

이는 마치 뱀이 집에서 빠져나가는 모습과 같습니다. 

머리는 마당으로 나갔지만 꼬리는 아직 집 안에 있습니다. 

그 뱀이 알아서 밖으로 나가도록 내버려두세요.

이제는 온도가 맞지 않기 때문에 어차피 뱀은 더 이상 집 안에 머물 수가 없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개인적 감각은 아직 남아있기는 하나 서서히 문밖으로 나가 그 영향력을 잃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예요. 

'기다리는 사람' 또한 마음의 한 측면입니다. 

 

에너지와 주의를 개인성이 아니라 오직 참자아에만 기울이세요. 

만일 우리가 개인이라면 우리는 개인성의 감각과 그것이 벌리는 어리석은 것들을 지켜볼 수 없을 거예요.

개인이란 느낌은 불안정하고 일관성이 없는데도 일관성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은 오고 가는 것들에 대하여 보고하지요. 

그러나 모순되게도, 일관성을 가지려고 분투하는 그것은 원래 일관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관성을 가지려고 한다면 개인성은 사라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일관성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요령이라면 요령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아름다운 무언가를 얻게 될 

개인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이미 여기에 있고,

개인이 그것을 감추고 있을 뿐입니다. 

이 신비의 베일이 이제 벗겨지니

정체성에 너무 주의를 기울이지 마세요.

정체성에 주의를 기울일수록 그것은 더욱 진짜같이 보입니다. 

그것이 실재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임을 아세요. 

그것은 스스로 실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우리의 에너지와 믿음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은 모습을 가질 수 없습니다. 

전구가 전기없이 빛날 수 없듯이 말이지요.

우리의 주의와 정체성, 관심과 신념을 통해서 생각은 그 에너지를 공급받습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고 나면 여러분은 진정한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힘은 언제나 생각이 아니라 바로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명확해지기 전까지는 생각이 스스로 살이 있는 듯 보일 것입니다. 

 

생각과 '생각하는 행동'은 같지 않다.

얼마동안 생각은 계속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생각이 나타나는 것 자체가 '생각하는 행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예요.

믿음이 뒷받침되지 않은 생각은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수반된 생각은 전쟁을 일으킬 수도, 한 국가의 고통을 치유할 수도 있습니다. 

생각을 믿고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 함으로써 우리는 생각을 살아 있게 하고 

그로 인해 큰 고통과 아픔을 겪게 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관객들이 자리에 앉아야 연극배우가 무대에 오르듯, 

생각은 그 생각을 인식해 줄 여러분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생각 자체는 지각력이 없으므로 스스로 생각할 수 없어요. 

따라서 생각은 스스로 '생각하는 행동'으로 변할 수 없습니다. 

'생각하는 행동'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생각들이 '생각하는 자'라는 또 하나의 생각과 손을 잡아야 합니다. 

즉 그 연극과 결과물에 관심이 있는 '나'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우리를 괴롭게 하는 생각은 다른 사람의 머릿 속에서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그냥 지나 갈 수 있습니다. 

어떤 생각도 그 자체로 의미나 힘을 갖지 못합니다. 

그 생각에 - 조건화, 습관, 신념, 인식 등으로  -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일단 우리가 이 특정 생각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여 생각하는 행동에 빠져들어가게 되면 그 생각 - 연극의 관찰자 또한 어느 틈에 연극의 일부가 되어 버리지요.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을 아는 그 존재는 연극이라는 비눗방울 속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폭넓은 의식의 영역 속에서, 의식 그 자체로서 우리의 주의가 생각과의 동일시로 끌려들어가는 것까지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중립의 영역 안에, 즉 지켜보는 중립의 자리에 머무세요. 이것이 참자아입니다. 

 

                 -무지 지음, <드높은 하늘처럼, 무한한 공간처럼, 참된 나를 찾아서> 정신세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