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참의식이 말하다(26)

무한진인 2020. 12. 18. 21:38

-- 도덕성과 사회의 가치 -- 

 

질문자: 소크라테스와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이 살았던 사회의 도덕성을 위반한 댓가로 사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라메쉬: 맞는 말이예요. 그 시대를 지배했던 도덕성의 기준을 어긴 댓가죠. 

 

질문자: 그 말씀이 제게 답이 되는 것 같네요. 사람들이 저희가 도달하고자 하는 참의식의 상태와 일상적인 정치적, 사회적 수준에서 보는 도덕성 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일으키는 대부분의 문제에 대한 답이 된 것 같습니다. 전혀 관계가 없군요. 

 

라메쉬: 맞는 말입니다. 사실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유 없이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어요. 그 당시 사회와 법에 팽배했던 기준을 어겼기 때문이예요. 하지만 그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가 할 일을 막지는 못했지요. 

 

질문자: 저는 사회의 법에 근거해서 선과 악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는데요. 

 

라메쉬: 깨달은 사람의 관점에서는 이런 의문은 전혀 일어나지 않아요. 모든 행동은 다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예요. 깨달은 사람은 절대 결정하지 않아요. 주체 행동 의식이 없기 때문에 결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을 내가 해야하나? 말아야하나?"라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아요. 

 

질문자: 깨달은 사람의 행동에는 악의나 사전 의도가 없죠? 

 

라메쉬: 맞는 말입니다. 악의나 사전 의도가 없어요. 이것을 장점이라고 생각하면 당연히 장점이지요. 하지만 자연 발생적인 행동에서 이런 장점이 어떻게 작용할지는 아무도 몰라요. 

 

질문자: 이런 이해에 애정이 깃든 사전 의도도 없을까요? 

 

라메쉬: 사전 의도가 없어요. 

 

질문자: 전혀 없나요? 

 

라메쉬: 전혀! (웃음) 좋은 의도든지 나쁜 의도든지, 전혀 없어요.

 

질문자: 그렇지만 그냥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라메쉬: 그점이 바로 본질적인 이해입니다. 행동하는 순간에 마음이 "내가 해야하나? 말아야하나?"라고 생각하고 나서 "아, 무슨 상관인가. 나는 행위자가 아닌 것을. 단지 도구일 뿐이지."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예요. 이런 것은 다 여전히 마음의 작용이죠. 깨달은 이에게는 이런 생각 자체가 없어요. 생각하는 마음이 전혀 없어요. 생각하는 마음이 바로 행위자의 마음이예요. 

 

질문자: 일단 분리됐다는 의식과 "나"라는 의식이 사라지면 사랑이 흘러나오지 않나요? 

 

라메쉬: 그렇지요. 그런데 무슨 뜻으로 사랑이라고 했습니까? 

 

질문자: 하나라는 느낌입니다. 

 

라메쉬: 그것을 사랑 또는 자비의 느낌 또는 어떤 이름이든지 원하는 대로 부르셔도 됩니다. 자비라고 불러도 되고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고 관용이라고 불러도 되고 평정이라고 불러도 되고 고요함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다 이름표일 뿐이예요. 별 차이 없어요. 이름표를 붙일 필요가 전혀 없어요. 

 

질문자: 하지만 깨달은 사람이 살인을 저지를 계획은 세우지는 않을 거라고 말해도 되지 않나요? 

 

라메쉬: 그렇죠. 그렇게 말하겠죠. 

 

질문자: 예수는 신은 사랑이라고 말했는데, 완전한 말은 아니군요? 

 

라메쉬: 그럼요. 하지만 예수의 말을 듣던 개인들에게는 이해가 가는 말이지요. 

 

질문자: 그럼 다른 말로, 예수 자신은 완전히 이해했다는 말씀인가요? 

 

라메쉬: 물론이죠! 예수는 "나와 나의 아버지는 하나다. 신의 왕국은 내면에 있다."라고 꽤 자주 말했어요. 예수가 완전히 이해했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어요. 하지만 예수는 그 이해를 전달하기 위해서 청중의 수준에 맞게 수준을 낮춰서 말한 거죠. 

 

-- 죽음 -- 

 

질문자: 잠든 참의식과 활동하는 참의식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해도 되나요?

 

라메쉬: 기본적으로,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습니다. 

 

질문자: 인식되는 것은 이렇게 아름답고 다양하게 나타나는 활동하는 참의식이죠? 

 

라메쉬: 예, 맞는 말입니다. 

 

질문자: 그럼 죽음은 단지 인식되는 부분의 움직임이 멈추는 것일 뿐인가요? 죽음과 함께 인식하는 것도 멈추나요? 

라메쉬: 인식하는 일은 깨달음이 일어났든지 아니든지에 상관없이 모든 몸-마음 유기체에서 죽음과 함께 멈춥니다.

 

질문자: 하지만 인식하는 일이 비개인적인 일이라고 이해하면 잃어버린다는 느낌이 전혀 안 들것이고, 단지... 

 

라메쉬: 죽음의 순간에 말입니까? 죽음이 일어나고도요? 

 

질문자: 아니, 그전에 말입니다. 

 

라메쉬: 아! 

 

질문자: 그럼 뭔가를 잃어버린다는 두려움이나 집착이 없겠군요. 

 

라메쉬: 전혀없어요. 이 때문에 많은 성자의 죽음을 아름다운 일로 묘사하는 겁니다. 성자는 죽음을 "나"에게 일어나는 일로 보지 않아요. 왜냐하면 "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죠. 죽음의 과정은 단지 목격될 뿐입니다. "내"가 더는 없기에 목격이 일어나는 겁니다. 

 

질문자: 그리고 두려움도 없군요? 

 

라메쉬: 전적으로 옳은 말이예요. 두려움이나 상실감이 전혀 없어요. 

 

질문자: 몸-마음 유기체가 죽을 때 평범한 사람과 즈나니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나요? 

 

라메쉬: 없어요. 정말로 전혀 없어요. 이렇게 몸-마음 유기체를 즈나니로, 한 개인으로, 깨달은 '사람'으로 여기기 때문에 끔찍한 혼란이 일어납니다. 깨달음이 일어나면 유기체가 갑자기 뭔가로 변한다고들 생각해요. 이런 일은 절대 없죠! 깨달음 또는 각성이 일어나면 몸-마음 유기체는 더도 덜도 아니고 예전에 하던 일을 계속해 나가요. 몸-마음 유기체는 타고난 성격에 따라서 기능할 겁니다.

 

질문자: 주체 행동의식이 제거되는군요. 하지만 보통사람이 죽을 때도 같은 일이 일어나는데요. 이때도 주체 행동 의식이 제거되지요. 그럼 차이가 없네요? 

 

라메쉬: 전혀! 몸-마음 유기체에 관한 한 죽음 이후에 차이가 없어요. 그리고 참의식 안에서도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는 몸-마음 유기체가 죽기 전에 참의식이 동일시하기를 멈추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죽음이 일어날 때 몸-마음 유기체가 동일시하기를 멈추는 경우지요. 

 

질문자: 이것이 즈나니와 평범한 사람사이의 유일한 차이인가요? 

 

라메쉬: 그럼요!  (15 jung) 

 

                              - 리쿼만 편집, 김영진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