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두 법륭선사의 심명(心銘) 공부(1)
[본문]
心性不生 何須知見
本無一法 誰論熏鍊
往返無端 追尋不見
一切莫作 明寂自現
심성(心性)은 생함이 없는(생기지 않은) 것인데
어찌 (생기지 않은 心이) 지(知)하고 견(見)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본래 하나의 법(존재: 心識과 물질,인식주관과 대상을 포함한 모든 존재)도 없는데
누가 훈도(薰陶)하고 수련(修練)해야 한다고 논할 것인가.
이리저리 두서없이 왔다 갔다 하며
찾아다녀 보아도 (心을) 보지 못하나니
억지로 지어 행함을 일체 하지 않으면
발고 고요해져서 자연히 (심성이) 드러나네.
[해설]
마음은 본래 생함이 없는 것이며, 언제 생긴 바가 없다.
언제 생긴 바가 있었다면 소멸해야 할 것이나 마음은 본래 무생(無生)이라 멸함도 없다.
마음은 본래 무상(無相)이기에 본래 생멸의 상(相)을 떠나 있다.
바로 그러한 심성(心性)이 진여(眞如)이고 법성(法性)이며 불성(佛性)이다.
또한 그러한 심성(心性)이기에 지(知)함도 없고, 견(見)함도 없다.
생긴 바도 없고 무상(無相)이며 능(能: 인식주관)과 소(所: 인식대상)를 떠났는데
어떻게 지(知)함이 있고, 견(見)함이 있겠는가.
그래서 <대반야바라밀다경> 권제595 제 16 <반야바라밀다분> 3에
또한 선용맹(善勇猛)이여 ! 색온(色蘊)이 색온의 소행(所行)이 아닌 까닭에 지(知)이 없고, 견(見)함도 없나니,
색온(色蘊)에서 지(知)함이 없고, 견(見)함이 없다면 이를 반야바라밀이라 한다.(이하 受想行識 등 일체법이
마찬가지로 그러함이 설해짐)
고 하였다. 색(色: 물질)을 색온(色蘊)이라 함은 모든 물질은 수많은 여러 원소들이 모아지고 쌓여져(蘊)이루어진 까닭이다. 수많은 다른 원소들이 모아지고 쌓여져 이루어진 색(色)인 까닭에 그 색(色)의 실성(實性,自性)이 없어 본래 인식되는 그 색의 소행(所行)이 아니다.
인지되는 그 색은 단지 그림자일 뿐이다. 그림자가 무슨 소행이 있을 것인가.
색을 비롯한 수상행식(受想行識)의 일체법이 견(見)함이 없고, 지(知)함이 없는지라 바로 이러함을 요지하여 색(色)을 비롯한 일체법에 물들지 아니하고, 흔들림없으며, 걸림없음이 곧 반야바라밀다이다.
<금강경> 제31의 <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知와 見이 不生임)>의 뜻도 바로 이를 말한다.
지(知)함도 없고 견(見)함도 없다고 해서 허무(虛無)의 경계를 말한 것이 아니고, 분별하고 물들며, 걸림이 있는 지(知)함과 견(見)함이 아닐 뿐이다. 그래서 이를 지(知)함이 없이 지(知)하고, 견(見)함이 없이 견(見)한다고 한다.
이를테면 거울이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을 차별하여 싫어하거나 좋아함을 떠나 평등하게 흔들림 없고 염ㅂ착(染着)됨 없이 비추는 것과 같다.
또한 일체법이 무생(無生)인지라 누가 무엇을 이루고자 닦아 나갈바도 없기에 이에 대해 논할 바도 없다.
얻을 바의 한 법도 없는데 어찌 닦아 나감이 잇고 논할 바가 있겠는가.
심성(心性)이 그러한 까닭에 일부러 무엇을 얻고자 마음을 일으켜 닦으려 해서는 안된다.
단지 심성(心性)이 그러한 요지(了知: 깨달아서 명료하게 알게 됨) 하였으면 무명(無明)의 힘을 잃게 되어,
구름이 점차 걷히면서 밝은 해가 드러나듯이 심성(心性:眞如)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처음에는 요지(了知)한 뜻이 머리에 떠올라 지해(知解: 알음알이)의 장애가 있지만 점차 요지한 뜻이 자연히 익어지면서 현실의 사(事)에서 구현되어 간다.
그리고 요지한 뜻 자체가 얻을 바 없다는 것이고 마음이 본래 분별함이 없다는 것인 까닭에 그러한 지해(知解)도 자연히 놓아 버리게 된다. 즉 다른 법에 의지할 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무수지수(無修之修: 억지로 마음을 일으켜 닦는 바 없는 닦음)이고, 능가선법(楞伽禪法)이며,
초기 선종의 선법이며, 또한 돈법(頓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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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본성은 생기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려고 하며, 보려고 하는가?
心性不生 何須知見
본바탕은 단 하나의 티끌조차 없는데
닦으며 익힌다고 말하는 자는 누구인가?
本無一法 誰論熏鍊
가고 되돌아 오는 것은 아무 까닭이 없이 저절로 그러하니
아무리 좇아 다니며 찾아보아도 전혀 볼수가 없다네.
往返無端 追尋不見
온갖 행위를 억지로 짓지만 않는다면
밝고 고요한 본체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네.
一切莫作 明寂自現
- 박건주 역주, 우두법륜선사<心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