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탐구 실제 수행방법 및 이론 정리 (23)
스리 라마나는 가끔씩 영적인 길을 가는 구도자들을 세 부류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했다.
참자아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를 들으면 금방 참자아를 깨닫는, 영적으로 많이 진화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깨달음이 확고해지는데에 시간이 좀 걸리는 사람들도 있으며, 오랜 세월 피나는 수행을 해야 참자아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화약과 숯과 젖은 석탄을 비유로 들곤 했다.
화약은 불똥만 하나 튀어도 순간적으로 불이 붙는다,
그러나 숯불을 피우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필요하며,
젖은 석탄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이를 말려야 하고 불을 붙이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최상의 단계와 중간 단계에 와 있는 사람들에게 스리 라마나는 참자아만이 실재한다고 가르쳤다.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릇된 관념만 버리면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직접 참자아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릇된 관념들을 '참자아가 아닌 것'이라고 했다.
'참자아가 아닌'그릇된 관념들은 참자아를 체험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상상이 만들어 낸 가공의 집적물, 다시 말해서 착각이라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근본저인 착각은 참자아가 육체와 마음이라는 제한된 틀 속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다. 자신은 특정 육체를 지닌 독립된 개체라는 생각을 버리는 순간, 여타의 그릇된 생각들로 이루어진 가공의 건축물은 일시에 무너진다. 그러면 참자아의 의식적인 각성상태가 된다. 그 각성상태는 영원하다.
스리 라마나는 이 수준의 사람들을 가르칠 때는 노력이나 수행을 문제삼지 않았다.
그는, 참자아는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니며, '참자아가 아닌' 제한적인 관념들이 떨어져 나가기만 하면 스스로 드러나는 각성상태라고 가르쳤다.
* * *
질문자 : 어떻게 하면 참자아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마하리쉬 : 깨달음이란 새롭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항상 존재하고 있으며, '나는 깨닫지 못했다'는 생각만 버리면 된다.
고요함과 평화가 깨달음이다. 참자아가 아닌 상태란 한 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길고 긴 세월동안 깨닫지 못했다는 느낌이나 의심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들을 제거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는 것이다. 왜 의심이 생기고 깨닫지 못했다는 느낌이 생기는가?
그것은 '참자아가 아닌 것'을 참자아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참자아가 아닌 것'이 사라지고 나면 참자아만이 남는다.
방을 꽉 채우고 있는 물건들만 치우면 빈공간은 저절로 드러난다.
빈공간을 어디 다른 데서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질문자 : 바사나(습기 또는 정신적 경향성)가 소멸되지 않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바사나가 소멸된 상태에 들어 갈 수 있습니까?
마하리쉬 : 그대는 지금 그 상태에 있다.
질문자 : 지금 그 말씀은 참자아에 마음을 집중하고 있으면 바사나들이 나타나는 즉시 소멸된다는 뜻인가요?
마하리쉬 : 그렇다. 그대가 그대의 본성 안에 머물러 있으면 바사나들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질문자 : 어떻게 하면 참자아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마하리지 : 참자아의 자리에 도달한다는 그런 것은 없다. 만약 참자아의 자리에 도달해야 한다면 참자아는 '지금여기'에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며, 결국 새롭게 획득해야 할 대상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새로 얻은 것은 언젠가는 잃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영원하지 않은 것은 추구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나는 참자아의 자리에 도달한다는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대가 참자아 이다. 그대는 이미 참자아 자체이다.
그대는 그대의 충만한 지복상태를 모르고 있다.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무지(無知)가 지복이라는 본질을 가진 참자아 위에 장막을 드리우고 있다.
그대가 할 일은 무지의 장막을 걷어내는 일뿐이다.
참자아를 육체나 마음과 동일시하는 것이 무지이다.
이 그릇된 동일시가 제거되면 참자아만이 홀로 남는다.
따라서 깨달음은 누구나 가능하다. 깨달음은 구도자를 차별하지 않는다.
'내가 과연 깨달을 수 있을까'하는 의심과 '나는 깨닫지 못했다'는 생각이 깨달음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다.
그 장애물에서 벗어나도록 하라.
질문자 : 영원한 자유의 상태에 이르려면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리나요?
마하리쉬 : 해탈이란 미래의 어느 때에 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영원히 현존한다.
질문자 : 그 말씀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체험하고 있지 못합니다.
마하리쉬 : 그 체험은 '지금 여기'에 있다.
아무도 자신의 참자아를 부정할 수 없다.
질문자 : 자신의 참자아라는 것은 존재차원의 문제이지, 행복의 차원은 아니지 않습니까?
마하리쉬 : 참자아가 행복이며, 행복이 실재이다. 해탈이라는 말은 사람들을 혼동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현재 무엇엔가 구속되어 있고, 그래서 자유롭기를 갈망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진정 구속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자유만이 있다. 이미 그 상태이거늘, 무엇 때문에 영원한 자유니 해탈이니 하는 이름을 붙이고 그 헛된 이름을 추구하는가?
질문자 :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들은 지금 무지합니다.
마하리쉬 : 무지만 없애면 된다. 그 외에는 할 일이 없다. 해탈에 관해 질문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해탈이란 구속에서 벗어난다는 말인데, 그것은 현재 구속되어 있음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그러나 구속은 없다. 그러므로 해탈도 없다.
질문자 : 서양사람들 중에는 우주의식의 섬광을 체험했다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이 체험한 것은 무엇입니까?
마하리쉬 : 그들이 체험했다는 섬광은 말 그대로 섬광이다. 그런 체험은 번쩍하고 나타났다가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시작이 있는 것은 반드시 끝이 있다. 항상 현존하고 있는 의식에 대한 깨달음만이 영원하다. 그 의식은 언제나 우리 안에 현존하고 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자기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깊히 잠들었을 때는 아무것도 모르다가 깨어나면 다시 정신을 차리지만, 깊히 잠든 사람이나 깨어난 사람은 동일한 사람이며 그 사람 자체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 깊히 잠들었을 때는 육체에 대한 의식이 없지만, 깨어있는 상태에서는 육체에 대한 의식이 있다. 그러므로 차이점은 육체에 대한 의식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데 있을 뿐, 본래의 의식 자체는 변함이 없다.
육체와 육체에 대한 의식은 함께 일어났다가 함께 사라진다.
깊히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지만, 깨어있는 상태에서는 육체에 대한 의식 때문에 여러 가지 제약이 생긴다. 이런 제약이 곧 구속이다.(잠자는 동안 육체에 대한 의식이 없을 때는 없던 제약이 육체에 대한 의식이 깨어나면서 동시에 생겨남에 비추어 보아) 구속은 육체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생겨난다는 것을 알수 있으리라. 육체와 '나'를 동일시하는 그릇된 느낌이 사라져야 한다.
진정한 '나'는 육체에 대한 의식이 없는 동안에도 늘 존재한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으며 새롭게 나타나지도 않는다. 그것은 '지금여기'에 현존한다. 영원히 현존하는 것이라야 실재라고 할 수 있다. 새롭게 나타나는 것은 결국 다시 사라질 것이다. 깊히 잠들어 있을 때와 깨어 있을 때를 비교해 보라.
깨어 있을 때는 육체가 있지만, 깊히 잠들면 육체가 없다. 따라서 육체는 영원한 실재가 아니다.
늘 현존하며, 육체라는 현상이 나타나도록 만드는 참자아 의식만이 영원한 실재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나는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나'를 육체와 동일시하는데 있다.
모든 고통은 이 잘못된 동일시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잘못된 생각과 느낌이 사라져야 한다. 그러면 그게 곧 깨달음이다.
깨달음이란 어떤 새로운 것을 얻거나 새로운 능력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모든 속임수가 제거된 상태이다.
궁극적인 진리는 지극히 단순하다. 그것은 본래 상태로 존재하는 것일 뿐이며, 그 이상 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다.
질문자 : 깨어있는 상태보다는 깊히 잠든 상태가 순수의식에 더 가깝습니까?
마하리쉬 : 깊히 잠든 상태, 꿈꾸는 상태, 깨어있는 상태는 고정불변의 각성상태인 참자아 위에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그대는 한순간이라도 참자아를 떠나서 존재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지금 그대가 하는 식의 질문도 가능하리라.
질문자 : 그러나 흔히 깊히 잠든 상태가 깨어 있을 때보다 순수 의식에 더 가깝다고들 말하지 않습니까?
마하리쉬 : 그 질문은 '저는 깨어 있을 때보다 잠들어 있을 때 저 자신에게 더 가까운가요?'하고 묻는 것과 같다.
참자아는 순수의식이다. 한 순간이라도 참자아에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원성(二元性)이 존재한다면 그대와 같이 질문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순수의식상태인 참자아 안에는 이원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잠을 자거나 꿈을 꾸거나 깨어 있거나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깨어있는 상태에는 이름답고 재미있는 일들이 많지만, 잠자는 동안에는 그런 것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잠든 상태를 둔한 상태라고한다.
자, 더 나아가기 전에 몇가지 짚고 넘어가자. 그대는 자는 동안에도 그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가?
질문자 : 예, 인정합니다.
마하리쉬 : 그러면 잠자는 동안에 존재하는 그대와 지금 깨어있는 상태의 그대와 같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인가?
질문자 : 같은 사람입니다.
마하리쉬 : 그렇다면 잠든 상태와 깨어있는 상태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다. 그 연속성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대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늘 존재하는, 존재상태의 연속성이다.
잠든 상태와 깨어있는 상태의 유일한 차이점은, 깨어있는 상태에서는 육체를 비롯한 현상세계가 나타나지만, 잠든 상태에서는 사라진다는 것뿐이다.
질문자 : 하지만 잠든 상태에서는 육체와 현상세계가 사라졌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합니다.
마하리쉬 : 그렇다. 잠든 상태에는 육체와 이 세상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는냐에 대한 인식이 없다. 그러나 '나는 잠자는 동안에는 그런 인식이 없습니다.'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잠자는 동안에는 그런 인식이 없다는 것을 아는 '나'라는 존재가 필요하다. 지금 '잠자는 동안에는 그런 인식이 없다'고 말하는 그대는 누구인가?
깨어 있는 상태의 그대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는가? 잠자는 상태의 그대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결국 참자아와 육체를 동일시하는 개체로서의 그대가 '나는 잠자는 동안에는 그런 인식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대는 주변 세계를 둘러보면서, 깨어 있는 상태에는 아름답고 재미있는 일이 많지만, 잠이 들면 이 모든 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잠든 상태는 둔한 상태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대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지 않는다면, 육체와 현상 세계에 대한 인식이 없다고 해서 둔한 상태라고 말할 수 없으리라) 세 가지 상태를 번갈아 오가는 중에도 존재의 연속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대의 진정한 존재는 어떤 상태에서도 현존하지만, 개체적인 자아나 인식의 대상인 현상세계는 그렇지 못하다.
질문자 : 그렇습니다.
마하리쉬 : 연속적인 것이 영원한 것이다. 연속적이지 않은 것은 일시적인 것이다.
따라서 연속적인 그대의 존재 자체는 영원하지만, 육체나 이 세상은 그렇지 않다.
육체나 이 세상은 영원토록 변치않는 '참자아'라는 스크린 위를 지나가는 일시적인 영상일 뿐이다.
-데이비드 갓맨 편집, 정창영 옮김 <있는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