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아함경(18-2)
491. 사문출가소문경(沙門出家所問經)
이 사문출가소문경은 염부제소문경의 내용과 같다.
492. 니수경(泥水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의 가란다죽원(迦蘭陀竹園)에 계셨다. 그 때 존자 사리불도 또한 거기 머물고 있었다.
그 때 존자 사리불이 모든 비구들에게 말하였다.
어떤 비구는 무량삼매(無量三昧)를 얻어 몸으로 증득하고 원만하게 갖추어 머물고도 개체의 몸이 멸함[有身滅]과 열반(涅槃)을 마음으로 늘 즐거워하지 않아 개체의 몸을 돌아봅니다. 이는 마치 사람이 아교를 손에 칠하고 나무 가지를 잡았을 때에 손이 곧 나무에 붙어 뗄 수가 없는 것과 같으니, 왜냐하면 손에 아교를 칠하였기 때문입니다. 비구들이여, 무량삼마제(無量三摩提 : 無量三昧)를 몸으로 증득하고도 개체의 몸이 멸함과 열반(涅槃)을 마음으로 늘 즐거워하지 않아 개체의 몸을 돌아본다면 끝내 벗어날 수 없고, 현세에서 법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를 수 없으며, 결국 목숨을 마치더라도 또한 얻은 바가 없어 다시 이 세계로 돌아와 태어나고, 끝내 어리석음의 어둠을 깨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비유하면 마을 근처에 뻘이 매우 깊고 푹푹 빠지는 진흙 못이 있는데, 오랜 가뭄으로 비가 오지 않으면 못물은 마르고 잦아들어 그 땅이 갈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아서 비구들이여, 법을 볼 수도, 법의 가르침을 따를 수 없게 되며, 결국에는 목숨을 마치더라도 또한 얻은 것이 없어 다음 생에도 이 세계에 다시 떨어질 것입니다.
어떤 비구는 무량삼매를 얻어 몸으로 증득하고 원만하게 갖추어 머무르며, 개체의 몸이 멸함과 열반을 마음으로 믿고 즐거워하여 개체의 몸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는 비유하면 사람이 뽀송뽀송하고 깨끗한 손으로 나무 가지를 잡을 때에 손이 나무에 들러붙지 않는 것과 같으니, 왜냐하면 손이 깨끗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아서 비구들이여, 무량삼매를 얻어 몸으로 증득하고 원만하게 갖추어 머무르며, 개체의 몸이 멸함과 열반을 마음으로 믿고 즐거워하여 개체의 몸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현세에서 법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게 되고 결국 목숨을 마치고 다시는 이 세계로 돌아와 태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마땅히 힘써 방편으로써 무명을 부수어 깨뜨려야 합니다. 비유하면 마을 근처에 진흙 못이 있는데, 사방에서 물이 흘러들고 또 자주 하늘에서 비가 내려 물이 항상 못으로 흘러든다면, 그 물은 차고 넘쳐서 더러운 것들은 흘려보내 못이 맑고 깨끗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아서 그런 이들은 모두 현세에서 법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게 되고, 목숨을 마치고는 다시 이 세계로 돌아와 태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마땅히 힘써 방편으로써 무명을 부수어 깨뜨려야 합니다.
존자 사리불이 이 경을 말하자, 모든 비구들은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493. 승선역류경(乘船逆流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왕사성의 가란다죽원에 계셨다.
그 때 존자 사리불이 여러 비구들에게 말하였다.
만일 아련야(阿練若) 비구6)이거든 빈 땅이나 혹은 숲 속이나 나무 밑에서 마땅히 이렇게 공부하여야 합니다. 즉 '마음 속에 애욕의 생각이 있음을 스스로 깨닫고 있는가'라고 안으로 자기 자신을 관찰하고 사유해야 합니다. 만일 깨닫지 못한 사람이 경계(境界)나 깨끗한 모양[淨相]에 대하여 애욕을 일으킨다면 멀리 여읨과 어긋나게 될 것입니다. 비유하면 장부[士夫]가 힘을 내어 배를 타고 강물[流]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몸이 피로해져 게을러지면 배는 곧 강물을 따라 도로 내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아서 비구들이여, 깨끗하다는 생각을 하면 도리어 애욕이 생겨 멀리 여읨과 어긋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비구는 공부할 때에 하근기(下根器)가 행하는 방편을 닦고 그 행이 순박하지도 깨끗하지도 못합니다. 따라서 도로 애욕에 떠다니게 되어 법의 힘을 얻지 못하고,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며,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한 채, 그 깨끗하다는 생각을 따라 애욕이 생겨 흐름에 실려 떠내려가며 멀리 여의는 일과 어긋나게 될 것입니다.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이런 비구는 '다섯 가지 욕망[五欲功德]에 대한 애욕을 여의어 해탈하였다'고 감히 스스로 말할 수 없습니다.
혹 어떤 비구는 혹은 빈 땅이나 숲 속이나 나무 밑에서 즉 '나는 안으로 마음속에 욕심을 여의었는가?'라고 이와 같이 사유합니다. 이런 비구는 경계에 대하여 혹 깨끗한 모양을 취했더라도, 그 마음을 깨닫게 되면 멀리 여읨을 따라 나아가고 실려갈 것입니다. 비유하면 새의 깃털이 불에 들어가면 바로 오그라들어 다시는 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이 비구는 혹 깨끗한 모양을 취했더라도 곧 멀리 여읨을 따라 흘러 실려갑니다.
비구들이여,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합니다. 즉, 방편의 행에 대하여 마음이 게으르지 않으면, 법의 적정(寂靜)함·고요하게 그침[寂止]·쉼[息]·즐거움[樂]과, 순박하고 깨끗한 한마음을 얻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나는 사유한 뒤에 깨끗한 모양에 있어서 멀리 여읨을 따르고 그대로 따라 도를 닦았으므로 (다섯 가지 욕망에 대한 애욕을 여의어 해탈하였다)라고 스스로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존자 사리불이 이 경을 말하자, 모든 비구들은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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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팔리어로는 aranakayabhikkhu이다. 여기에서 아련야(阿練若)는 조용한 장소를 말한다. 대개 수행하는 비구는 조용하고 고요한 숲을 선택해 머물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또 임주비구(林住比丘)라고도 한다.
494. 고수경(枯樹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왕사성의 가란다죽원에 계셨다. 그 때 존자 사리불은 기사굴산(耆??山)에 있었다.
그 때 존자 사리불은 이른 아침에 가사를 입고 발우를 가지고 기사굴산에서 나와 왕사성으로 걸식하러 들어갔다. 그는 가던 길에 길가에서 큰 마른 나무를 보고는, 곧 그 나무 밑에 자리를 펴고 몸을 가다듬어 바르게 앉아 모든 비구들에게 말하였다.
만일 어떤 비구가 선정[禪思]을 닦아 익히고 신통력(神通力)을 얻어 마음이 자재(自在)하게 된다면, 이 마른 나무를 흙으로 만들려면 곧 흙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른바 이 마른 나무 가운데 지계(地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구가 신통력을 얻어 마음에 흙이라는 판단을 가지면 곧 틀림없이 흙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어떤 비구가 신통력을 얻어 뜻대로 자재하게 된다면, 이 나무를 물·불·바람·금·은 등의 물질로 만들려고 해도 틀림없이 모두 다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른바 이 마른 나무에는 수계(水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구가 선정을 닦아 신통력 얻어 뜻대로 자재하게 되면, 마른 나무를 금으로 만들려고 하면 틀림없이 금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요, 또 다른 여러 가지 물질로 만들려고 하더라도 틀림없이 다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마른 나무에는 갖가지 요소[界]가 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선정을 닦아 신통력 얻어 뜻대로 자재하게 되면 갖가지 물질을 틀림없이 다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비구들이여,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선정을 닦은 비구의 신통 경계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마땅히 힘써 선정을 닦아 모든 신통을 배워야 합니다.
사리불이 이 경을 말하자, 모든 비구들은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