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참의식이 말하다(24)

무한진인 2020. 12. 4. 20:42

질문자: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얽매이는 것을 권하지 않으시지요.

 

라메쉬: 권하다니요?! 당신이 그렇게 해서 행복하다면 원 없이 즐기세요. 이제, 제가 화가 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말해 보겠습니다. 핵심은, "내"가 화나는 게 아니예요. 저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나 두려움이나 화가 일어나는 것이나, 일어나는 모든 일을 전혀 통제하지 못해요. 일어나는 모든 생각과 감정 느낌은 유기체와는 전혀 무관해요. 이렇게 물을 수 있죠. "현재의 순간에 화가 일어나면 유기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당신은 얽매이고, 저는 그렇지 않아요. 화가 나는 감정은 목격됩니다. 얽매임이 없어요. 가 수직적으로 일어나고 목격되면서 잘려나가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수평적인 얽매임이 없어요. 

 

질문자: 선생님께서 화를 목격하고 놓아준다는 말씀인가요? 

 

라메쉬: 아니죠. 제가 놓아주는 것이 아니예요. 이것이 핵심이예요. 

 

질문자: 그럼 화를 받아들이시나요? 

 

라메쉬: 아니죠. 받아들이지도 않아요. 저는 화를 받아들이지도 거부하지도 않는데, 그 까닭은... 

 

질문자: 그냥 바로 인식하시는군요? 

 

라메쉬: 목격됩니다. 목격하는 자라는 대리인 없이. 

 

질문자: 깨달음을 괴로움이나 좌절이 없는 곳에서 놀이를 하는 한 방법이라고 말해도 될까요? 

 

라메쉬: 아닙니다. 놀이라면 슬픔이 있어도 슬픔에 반응하지 않아야겠지요. 깨달음이 일어난다고 몸마음 유기체에 생각이나 감정이 없는 게 아니예요. 그렇지 않아요. 깨달음이 일어난 뒤에도 몸마음은 여전히 유기체일 뿐이고 자신이 타고난 특성에 따라서 외부에서 들어오는 생각과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반응해요. 하지만 반응이 일어나는 순간 반응이 목격되고 잘려나가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수평적으로 얽매이지 않아요. 기쁨을 예로 들어보죠. 누가 한번은 제게 "정말로 이해하고 변해가는 사람을 보면 만족감을 느끼십니까?"라고 물어보더군요. 만족감은 일어납니다. 당연히 일어나야죠. 유기체에는 생각이나 느낌, 감정이 일어나야 해요. 하지만 이것들은 목격되면서 잘려나가지요. 만일 집안에서 상을 당하면 슬픔이 일어나겠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속되지는 않아요. 몸-마음 유기체가 슬픔을 안고 살아가지 않아요. 주체할 수 없이 슬픔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행동이 달라지지는 않아요. 

 

질문자: 두려움도 마찮가진가요?

 

라메쉬: 물론 그렇죠. 두려움도 마찮가지죠. 특히 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있을 때가 그래요. 

 

질문자: 전 계속 욕구와 기능의 관계에 관한 생각이 드는데요. "내"가 사라진 이후에도 비개인적인 수준에서 욕구가 계속된다는 말이 맞나요? 

 

라메쉬: 생각과 욕구, 감정들은 일어날 수 있어요. 마하라지께서는 "그것들은 절대 전달되지 않아."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수평적으로 얽매이지 않으신다는 뜻이예요. 그것들은 일어나면서 목격되고 잘려나가지요. 

 

질문자: 하지만 기능은...욕구가 없이 기능한다는 것은 이해가 안되요. 

 

라메쉬: 욕구가 일어날 수도 있지만 얽매임으로 이어지지는 않아요. 보통사람은 욕구가 대부분 얽매임으로 이어지지요. 

 

질문자: 예를 들어 마하라지께서는 담배에 중독되어 계셨어요. 담배를 피우고 싶으시면 담배 불을 붙이셨죠. 그분의 몸-마음 구조체는 담배에 중독되어 있었어요. 

 

라메쉬: 마하라지께서는 배고프시면 식사하시고 걷고 싶으시면 산책하셨죠. 

 

질문자: 하지만 그런 중독도 욕구와 같지 않나요? 

 

라메쉬: 같지요. 욕구가 일어나는 것은 의식의 일부이기 때문이예요. 깨달음 또는 이해 또는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지, 이것이 일어난 뒤에는 욕구는 그저 목격될 뿐이예요. 전달되지 않아요. 

 

질문자: 그럼에도 욕구 때문에 행동이 일어나는데요. 

 

라메쉬: 배고프거나 목이 마른 것과 같은 욕구라면 생각이 행동으로 실현되겠지요. 

 

질문자: 마음이 관여하지 않고서요? 

 

라메쉬: 그럼요. 

 

질문자: 제 말이 좀 개인적으로 들리시면 용서하세요. 좀 전에 선생님께서 저희에게 글을 읽어주시다가 끝무렵에서 감정적인 반응이라고 할 만한 것이 선생님에게서 보였어요. 눈물이 고이고 말을 더듬으시면서 눈에 띄게 태도의 변화가 있었어요. 어떤 움직임이었는지 물어도 될까요? 

 

라메쉬: 그냥 일어났죠! 제가 통제할 수 없는 참의식 안에서 일어난 움직임이었지요.

 

질문자: 관련된 생각이나 어떤 심상이 있었나요? 

 

라메쉬: 깨달음이 일어난다고 해서 몸-마음 유기체가 식물인간이 되지는 않아요. 생각들이 일어나요. 감정들이 일어나요. 하지만 생각이나 감정, 욕구가 전달되지는 않아요. 그냥 일어날 뿐이지요. 창피함과 같은 개인적인 반응은 일어나지 않아요. 그리고 "난 정말 예민하구나."라고 느끼지도 않아요. 

 

질문자: 고통은 어떻나요? 몸의 고통이요. 괴로움 같은 것이 어느정도는 있지요? 

 

라메쉬: 이 몸 말입니까? 당연히 있지요. 물론이죠. 

 

질문자: 하지만 선생님께는 "내"가 존재하기 않기 때문에 그것과는 별로 상관 없는 것 같은데요? 

 

라메쉬: 맞아요. 

 

질문자: 라메쉬 선생님, 자아를 깨달은 사람, 즉 즈나니는 자신의 몸과 동일시는 하지만 자신이 행위자라고 여기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셨어요. 감정과 생각도 마찮가지인가요? 

 

라메쉬: 그럼요! 당연하지요. 무엇이 일어나든지, 즈나니는 동일시하지 않아요. 그냥 목격될 뿐이지요. 그리고 하나 더, 즈나니는 절대 자신을 즈나니라고 의식하지 않아요. 

 

질문자: 즈나니가 될 필요가 없군요? 

 

라메쉬: 그게 바로 핵심이죠. 필요 없어요. 이미 거기 있어요!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냥 일어납니다. 대부분 이 점을 잘 이해하지 못해요. 일단 깨달음이 일어나면 더는 깨달음이 일어났다고 기억할 필요가 없죠! 기억을 해야한다면 깨달음이 일어난 것이 아니예요. 

 

질문자: 제가 선생님께 어떤 상태에 있느냐고 물어보기 전에는 생각할 필요가 없군요? 

 

라메쉬: 아, 그럼요. 그래서 이렇게 질문하고 답하고 있지요. 보통 때는 "내가 이것을 잘하고 있나? 저것을 잘못하고 있나? 나는 즈나니이기 때문에 저런 일은 하면 안돼."라고 생각하는 일은 결코 없죠. 

 

질문자: 어떤 사람은 자신을 즈나니로 여기면서 다른 사람과 구분짖지만, 즈나니는 그렇게 하지 않아요. 맞나요? 

 

라메쉬: 맞아요. 

 

질문자: 라메쉬 선생님, 선생님께 깨달음이 일어났을 때 세속적인 일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셨나요?

 

라메쉬: 아니죠. 유일한 차이는 주체 행동 의식이 사라졌다는 것뿐이예요. 유기체는 행위자가 아니고 일어나는 모든 일은 참전체성 작용의 일부로 일어나고 그 일들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의식이 이 유기체에 늘 존재해요. 그래서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대단한 변화는 아니예요. 적어도 이 몸마음 유기체에서는 대단한 변화가 아니었죠. 거의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난 변화였지만 대단하지는 않았어요. 제게는 늘 이 두가지 확신이 있습니다. 첫째로 세상은 환상이며 정말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둘째로 모든 일이 저절로 일어나고 있고 내가 바꿀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질문자: 욕구가 사라지는 일이 일어났나요? 

 

라메쉬: 아니, 아니죠. 욕구는 사라지지 않아요. 욕구는 일어납니다. 욕구는 그냥 하나의 생각이예요. 감정도 하나의 생각입니다. 감정과 욕구, 생각들은 일어나지만 전달되지는 않아요. 일어나는 모든 일은 목격되면서 그냥 사라져요. 하지만 생각이나 감정 또는 욕구가 일어나는 일은 유기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본성이 그것들을 "전달해서" 얽매이거나, 그렇지 않고 "내"가 없을 때는 그것들이 일어나는 일이 목격되면서 사라집니다. 

 

질문자: 때때로 필요에 따라 행동하지만 얽매임은 없다는 말씀인가요? 어떤 때는 욕구에 따라 행동하고 어떤 때는 욕구를 지켜보면서 욕구를 사라지게 하시나요? 

 

라메쉬: 생각이 일어날 때 보통 사람은 그 생각이 좋거나 나쁘거나 어떻다고 판단하면서 얽매이지요. 하지만 일어날 행동은 어떤 생각을 하더라도 같을 겁니니다. 개인은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할지 결정한다고 생각하지만 행동은 참전체성 안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어요. 즈나니에게는 끼어드는 생각하는 마음이 없어요. "배고프다"와 같은 생각이 일어날 때 행동이 필요하면 저는 먹으로 가지요. 

 

질문자: 먹을 것이 없으면 화가 나시나요? 

 

라메쉬: 먹을 것이 없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질문자: (웃으며) 그게 정답이군요. 

 

라메쉬: 가능한 최고의 답이지요. 왜 그런지 말해주지요. 당신은 제게 어떤 상황에서 이 개인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개인 대 개인으로 묻고 있어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떤 주어진 상황, 즉 어떤 가상적인 상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저는 모릅니다. 활동적이고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본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배가 고픈 그런 경우에 다른 사람이 가진 음식을 낚아챌 수도 있겠지요. 이것은 깨달음이 있든지 없든지 마찮가집니다. 하지만 좀 더 소극적인 성격을 타고난 유기체라면 그렇게 하지는 않겠지요.

 

질문자: 그럼 선생님도 화를 내실 수 있군요? 

 

라메쉬: 그럼요. 화가 일어날 수 있지요. 누가 한번은 마하라지께 "마하라지 선생님, 왜 화를 내십니까?"라고 물었더니, 마하라지께서 "누가 화를 내고 있나?"라고 대답하셨어요. 말장난 하신 게 아니예요. 화는 일어났다가 사라져요. 계속 부글거리고 있지 않아요. 

 

질문자: 화가나기 때문에 행동하지는 않습니까? 

 

라메쉬: 화가 행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죠. 화가나서 한 행동 때문에 몸-마음 유기체가 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예요. 

 

질문자: 즈나니에게 조차도요? 

 

라메쉬: 그럼요. 정말 즈나니란 존재하지 않아요. 깨달음이 일어난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화가 일어나서 행동을 낳고 이 때문에 벌을 받는 이런 모든 일이 목격됩니다. 나의 행동이 아니라 참전체성 기능의 일부로써지요. 

 

질문자: 그럼 정말로 자신이 행위자가 아니고 단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확신만 있으면 완벽하지 않더라도, 욕구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잘 못된 일을 하더라도, 누구든지 깨달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라메쉬: 깨달음이 일어난다고 해서 유기체가 완벽해지지 않아요. 전체예요. 전체는 상반된 양극을 다 포함해요. 완벽함을 찾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어리석음이라는 사실을 즈나니는 이해합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은 참전체성 작용의 일부입니다. 

 

질문자: 그리고 깨달음이 내면의 평화를 가져오나요? 

 

라메쉬: 내면의 고요함 또는 평화, 다 같은 말입니다. (14 jung)

 

                                         - 리쿼만 편집, 김영진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