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탐구 실제 수행방법 및 이론 정리 (20)
문 : 진아를 깨달은 사람에게는 깨어있는 상태, 꿈꾸는 상태, 깊은 잠의 상태의 세 가지 의식상태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마하리쉬 : 그들에게는 세 가지 상태가 없는 것이 사실이냐고 묻는 그대는, 어떤 의식상태에서 그렇게 묻고 있는 것인가? 그대가 '나는 꿈을 꾸었다', 또는 '나는 깊히 잠들어 있었다.' , 또는 '나는 깨어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 모든 세 가지 상태 안에 그대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가 꿈을 꾸고 있었는지, 깊히 잠들었는지를 알 사람이 없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어떤 상태이든, 그대는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대는 지금 깨어 있으며, 깨어있는 상태로 있는 동안엔, 꿈꾸는 상태가 가려진다. 그리고 깊히 잠이 들면 꿈꾸는 상태가 사라진다. 그러나 그대는 항상 존재한다. 세 가지 상태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지만, 어떤 경우에든 그대는 항상 존재한다.
이것은 영화와 비슷하다. 스크린은 항상 존재하며, 항상 존재하는 스크린 위에 여러 장면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러나 스크린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고, 본래 그대로 스크린으로서 남아 있다.
마찬가지로 그대는 세 가지 의식상태의 전이(轉移) 속에서도 여전히 그대의 진아(참나)로 남아 있다.
그대가 이 사실을 이해한다면, 스크린 위에 나타나는 장면들이 스크린을 해치지 못하듯이, 세 사지 의식상태에서 전개되는 상황이 그대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스크린 위에는 파도가 출렁이는 거대한 바다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때로는 큰불이 일어났다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스크린은 물에 젖거나 불에 타지 않고 거기에 남아 있다. 어떠한 장면도 스크린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깨어 있을 때나 꿈을 꿀 때나 깊히 잠들어 있을 때 일어나는 상황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그대는 여전히 진아로 남아 있다.
문 : 깨어 있는 상태, 꿈꾸는 상태, 깊히 잠든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마하리쉬 : 그렇다. 그 상태들은 나타났다 사라진다. 진아(참나)는 그것들로 말미암아 괴로움을 당하지 않으며, 늘 같은 상태로 존재한다.
문 : 그렇다면 진아를 깨달은 사람은 강 건너 불 구경하듯이 이 세상을 바라본다는 말씀인가요?
마하리쉬 : 그렇다. 그게 사실이다. 비드야라나가 쓴 판차다시(Panchadasi) 제10장에는 극장 안에 켜 있는 등불에 대한 비유가 나온다. 그 등불은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모든 배우와 관객을 차별하지 않고 비춘다. 배우가 맡은 역활이 왕이든 노예이든 무용수이든,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빛을 비춘다. 그 등불은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도 거기에 있었고, 연극이 끝난 후에도 그대로 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내면의 빛인 진아(참나)는 늘거나 줄지 않으면서, 에고나 지성이나 마음이나 기억에 고루 빛을 비추어 준다. 깊이 잠 들었을 때에도, 에고의 느낌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조차도, 진아는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계속 빛을 발한다.
진아인 주인공이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이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도 마음이 만들어 낸 생각일 뿐, 진아에 관한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다. 무엇을 바라본다고 말하려면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보는 자'나 '보이는 대상'은 모두 마음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문 : 진아의 각성 상태에서 본다면, 의식의 세 가지 상태는 네 번째 상태(뚜리아)보다 얼마만큼이나 거리가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의식의 세 가지 상태와 네번째 상태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가 있습니까?
마하리쉬 : 의식의 상태라고 하든, 각성의 상태라고 하든, 존재의 상태라고 하든, 오직 하나의 상태만이 있을 뿐이다. 깨어있는 상태, 꿈꾸는 상태, 깊히 잠든 상태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나타났다가 사라질 뿐이다. 궁극적인 실재만이 있다. 세가지 상태의 전이 속에서도 나타나거나 사라지지 않고 늘 현존하는 진아(참나)만이 실재이다. 의식의 세 가지 상태는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실재가 아니기 때문에 궁극적인 실재에서 이만큼 또는 저만큼 떨어져 있다는 식으로 말할 수 없다. 아마 이렇게 말할 수는 있으리라. 존재 또는 의식이 유일한 실재이며, 거기에 깨어있음이 더해지면 깨어있는 상태이고, 잠이 더해지면 잠자는 상태이며, 꿈이 더해지면 꿈꾸는 상태라고 말이다.
의식은 그 위에 여러 장면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스크린이다. 스크린이 실재이고 그 위에 나타나는 장면들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의식의 세 가지 상태를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오랜 습관 때문에 각성상태를 네 번째 상태라고 부르고 있으나 사실은 네번째 상태라는 것도 없고 오직 하나의 궁극적인 상태만 있을 뿐이다.
꿈꾸는 상태는 짧고 깨어있는 상태는 길다는 점 외에는 두 상태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두 상태 모두 마음의 산물이다. 사람들은 깨어있는 상태가 길기 때문에 그 상태를 자신들의 진정한 모습인양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깨어있는 상태, 꿈꾸는 상태, 깊이 잠든 상태와는 아무 관계없이 늘 본연의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네 번째 상태, 즉 뚜리야가 우리의 진정한 상태이다. 세 가지 의식 상태(아바스타)라는 말을 쓰다 보니 네번째 상태(뚜리아 아바스타) 라고 하는 것이지, 엄밀히 말해 뚜리아는 별도의 의식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진아(참나) 본연의 상태이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그 상태를 네번째 상태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네번째'라는 말 자체가 앞의 세 가지를 전제로 하는 상대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뚜리아타타, 즉 (네번째 상태마저) 초월한 상태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문 : 본질적인 상태, 즉 진아라는 스크린 위에 세 가지 상태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하리쉬 : 지금 그 질문을 하는 자는 누구인가? 진아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나타났다가 사라진다고 말하는 자는 그것을 바라보는 자이다.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이 그 마음을 구성한다. 그런데 그 마음이라는 것이 있는지 찾아보라. 그 마음은 진아 안에서 녹아든다고 할 수 있는데, 거기에는 '보는 자'도 '보이는 대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 세 가지 상태는 나타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그대의 질문에 대한 가장 정확한 대답이 될 것이다. 진아(참나)만이 언제나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
자신의 본질인 진아(참나)에 대한 탐구가 없기 때문에 세 가지 상태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아 탐구가 철저히 이루어지면 세 가지 상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설명을 해주어도 진아를 스스로 깨달아 체험하기 전에는 실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스스로 명백히 존재하는 진아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눈감고 있는 것인가 !
문 : 마음과 진아(참나) 차이는 무엇입니까?
마하리쉬 : 아무런 차이도 없다. 마음이 내면으로 향하면 진아이고, 외부로 향하면 에고와 현상계로 된다.
똑같은 옷감이라도, 여러가지 다른 이름의 옷으로 불리게 된다. 똑같은 금으로 만들어진 장신구들이라도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하지만 이름만 다를 뿐 모든 옷의 본질은 옷감이며, 모든 장신구도 다같이 금으로 되어 있다.
실제는 오직 하나 뿐이며, 이름과 모습이 다를 뿐이다.
마음이라는 것이 진아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라는 독립된 실체는 없다.
진아는 마음이 없어도 존재하지만, 마음은 진아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문 : 브라흐만을 '사트-치트-아난다(실재-의식-지복)라고 하는데,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마하리쉬 : 유일한 실재(사트)를 브라흐만이라고 한다. 의식(치트)은 유일한 실재인 브라흐만의 빛이며, 지복(아난다)은 브라흐만의 본질이다. 의식과 지복은 실재의 다른 형태이며, 이 셋을 합쳐 '사트치트아난다'라고 한다.
문 : 진아를 실재(사트)와 의식(치트)라고 하시면서 그것을 존재도 아니요 비존재도 아니고, 의식도 아니요 무의식도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하리쉬 : 진아(참나)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실재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존재와 비존재라는 이원성(二元性)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따라서 존재도 아니요 비존재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진아는 의식이기도 하지만 , 알아야 할 것도 알려질 필요도 없는 절대의식이기 때문에, 의식이 있음도 아니요, 의식이 없음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사트 치트 아난다'는 우리의 궁극적인 상태가 실재와 의식과 지복에서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말로 하다 보니 할 수 없이 '실재 의식지복'이라는 것이지, 비실재나 의식이 없는 상태나 괴로운 상태를 전제로 하는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다.
문 : 우리의 진정한 본질이 행복이나 지복(아난다)이라고 말씀하시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마하리쉬 : 브라흐만은 완전한 지복이다. 진아는 완전한 평화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현존하며, 유일하게 현존하는 진아가 곧 의식이다. 진아는 완전한 행복 이상의 것이 아니며, 완전한 행복만이 현존한다.
이 사실을 깨닫고, 진아상태에 머물면서 영원한 지복을 누리도록 하라.
인간의 행복이 외적인 원인이나 소유물에 의해 좌우된다면, 재산이 많아지면 행복해질 것이고 재산이 줄어들면 불행해질 것이다. 재산이 하나도 없다면 그의 행복은 제로가 될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깊히 잠든 상태에서는 아무런 재산도, 심지어는 자신의 육체마저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불행은 커녕 매우 만족스러운 행복감을 느낀다. 사람들이 편안하고 깊은 잠을 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로 보아 행복이란 내면에 깃들어 있는 것이지 결코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님이 명백해진다.
외적인 요인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순수한 행복의 창고를 열기 위해서는 진아(참나)의 자리에 들어가야만 한다.
- 데이비드 갓맨 편집, 정창영 옮김<있는 그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