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의식이 말하다(20)
-- 깨달음은 현상세계 안에 있는 상태다 --
질문자: 깨달음과 잠든 참의식 간의 차이를 종합해보려하고 있습니다.
라메쉬: 잠든 참의식의 상태는 주체의 상태입니다.
질문자: 그 말씀은 그 상태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인가요?
라메쉬: 잠재적인 상태 안에 모든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질문자: 그러면, 인식이 물러선다는 뜻인가요? 그러니까, 깨달음이 제게는 인식하는 일이 소멸되는 것처럼 들립니다.
라메쉬: 깨달음은 단지 현상세계 안에 있는 상태일뿐입니다. 여기서 벗어나지 맙시다. 깨달음은 현상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이해입니다. 어디에도 깨닫는 "이"란 있을 수 없어요. 깨달음을 묻는 것도 현상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개념일뿐이지요.
질문자: 그럼 깨닫고자 하는 충동이 인식이 안되나요? 영원히?
라메쉬: 누구 쪽의 충동입니까? 매 번 여기서 실수해요. 우리는 개인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합니다. 자신이 개별적으로 생각하는 자라는 측면에서 생각하지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충동은 오직 개인의 관점에서 볼 때만 있어요. 하지만 깨달음이란 오직 이해하는 자가 없이 일어나는 이해입니다. 깨달음이란 어떤 것에도 항복하는 자가 없이 항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해는 개인과는 전혀 상관없는 비개인적 이해이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섬광처럼 번떡이는 이해입니다. 깨달음은 이해하는 자와 이해하는 과정과 이해하는 대상이 함께하는 삼각관계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순수하고 단순한 이해이고 여기에는 이해하는 자는 없습니다.
질문자: 예. 그렇지만 인식하는 누군가가...
라메쉬: 아니죠! 바로 이것이 요점입니다. 정확히 이것이 핵심이죠!
질문자: 제게 말이 안됩니다.
라메쉬: 바로 그거죠! 정확히 그렇죠! (웃음) "나"에게는 말이 안되죠!
질문자: 그건 그냥 말 장난이죠. 그럼 수행은 왜 하나요? 전 삶 전체를 수행을 하면서 보냈고 마하라지와 함께 있을 때는 마하라지께서 제가 오래 전 부터 해오던 수행이 옳다고 확인해 주신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는데...
라메쉬: 그래서 뭐가 문제입니까?
질문자: 선생님의 가르침에 대한 저의 느낌을 그냥 말하는 겁니다. 선생님 말씀을 이해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라메쉬: 제 말은, 이 이해는 시간의 흐름 없이 수직적으로 일어나는 이해이며 여기에는 어떤 것도 이해하는 자가 없다고 말하는 것뿐이예요. 섬광같이 번떡이는 이해만 있을 뿐이지 이해하는 자는 없어요. 그리고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제가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답은, 나쁘게 말할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만, "당신"은 아직 이것을 이해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말할 수 밖에 없군요. 이런 이해는 오직 제 시간이 됐을 때만 일어날 수 있고, 그 시간이 언제 일지는 아무도 몰라요. 기대를 하는 한, "내"가 깨달음을 원하는 한은 그 이해는 일어나지 못한다고만 말할 수 있습니다.
-- 깨달음 이후에도 몸-마음은 계속 살아간다 --
질문자: "나"라는 정체성에서 탈피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
라메쉬: 깨달음이란 참의식이 개별 몸-마음 구조체를 독립된 개인으로 동일시하면서 생긴 정체성이 제거된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자신을 독립된 개인으로 의식하는 정체성이 제거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해요.
질문자: 그러면 어떻게 깨달음이 일어난 몸-마음 구조체가 남은 삶동안 기능을 하나요?
라메쉬: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에서 탈피한다는 것은 독립된 행위자로서 동일시하는 정체성에서 탈피한다는 뜻이지, 몸-마음 구조체와 동일시하는 정체성은 남은 삶동안 계속되야지요. 안 그러면 어떻게 유기체가 기능하겠어요? 예를 들어서 누가 라마나 마하리쉬나 마하라지를 부르면 그분들은 대답을 하세요. 그러니 정체성은 분명 남아있어요. 그래서 개별 몸과 동일시하는 일은 계속되지만 자신을 독립된 행위자로 여기는 정체성은 없어지지요. 자신의 몸-마음 구조체를 통해서 일어나는 행동은 다른 몸-마음 구조체를 통해서 일어나는 행동과 전혀 다를 바 없이 목격됩니다.
질문자: 선생님께서 몸과 동일시하는 정체성은 남아있으나 주체 행동 의식은 없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누가 그 몸과 동일시한다는 말인가요?
라메쉬: 각 개별 구조체를 도구로 이용해서 기능하는 참전체성 또는 참의식 또는 신이 모든 것을 기능하게 만드는 중심입니다. 정신과 신체로 이루어진 유기체에서는 정신적인 부분이 유기체를 작동하게 하는 중심이라고 여겨집니다. 반면에 심장이나 간 등은 신체 또는 물리적 구조체의 일부지요. 정신적인 부분이 작동의 중심이 되면서 몸이 기능하게 되지요. 비유 자체에 본질적인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비유를 하나 들어보죠. 차를 타고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고용된 운전기사가 있습니다. 운전석에 앉아 있다고 해서 자신이 차 주인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죠. 차 주인을 기능의 중심이라고 하면 작동의 중심은 운전기사예요. 깨달음이 일어나면 누가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지 누가 운전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지 이 둘 다를 정확히 아는, 차를 소유한 운전자가 있어요
-- 깨달음의 전제 조건 --
질문자: 영적인 문제에 관해 조금밖에 이해하지 못해도 깨달음이 일어날 수 있나요?
라메쉬: 그럼요! 사실상 그 질문은 이런 말이죠. 영적 진화의 과정에 있어서 아주 낮은 수준의 이해에서 완전한 이해로 비약적인 도약을 할 수 있느냐? 있지요. 비약적으로 도약할 수도 있어요.
질문자: "어떻게?"라는 질문을 안 할 수가 없네요.
라메쉬: "어떻게"는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 아니예요.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전 거기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밖에는 해줄 말이 없군요. 정확히 이 "어떻게"라는 의문이 가장 큰 장애예요. 이에 대한 유일한 답은 라마나 마하리쉬께서 말씀하셨던 "누가 알고자 하는가?"라는 답이지요.
질문자: 그럼 깨달음에는 전제조건이 없다는 말씀이신데, 깨달음이 좀 더 잘 일어날 만한 종류의 사람도 없나요?
라메쉬: 오래 전에 쉘든 박사(William Herbert Sheldon, 윌리엄 허버트 쉘든, 1898-1977, 미국의 생리학자이자 심리학자 - 옮긴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쉘든 박사는 영적인 측면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유기적인 측면을 고려할 때 인간의 유기체를 어떤 유형들로 분류할 수 있는지 연구했지요. 쉘든과 그의 연구원들은 인간에게는 세가지 유형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첫 번째는 신체는 부드러우나 기질이 아주 외향적인 유형이었고, 이를 내장 긴장형이라고 불렀어요. 두 번째는 큰 뼈대에 근육질이면서 경쟁심이 강한 유형인데, 이를 신체 긴장형이라고 불렀어요. 세 번째 유형은 경쟁에는 관심이 없는 유형이예요. 뼈대가 작고 약한 근육을 가진 내향적인 성격인데, 이를 두뇌 긴장형이라고 불렀어요. 찾음은 이 세가지 유형 모두에서 시작될 수가 있어요. 찾음이 알아서 그 유기체에 꼭 맞는 길로 안내할 겁니다. 놀랍게도 힌두교의 전통에서도 이런 세가지 유형과 일치하는 세 가지의 길 또는 세가지의 요가를 소개해요. 내장 긴장형의 사람은 대부분 박티, 즉 헌신의 길로 이끌릴 겁니다. 신체 긴장형의 사람은 행동, 즉 카르마 요가의 길로 일끌리 겠죠. 마지막으로 두뇌 긴장형의 사람은 아주 자연스럽게 진리, 즉 즈나나의 길을 향해 나아갈 겁니다. 하지만 이런 길들은 단지 관념적으로 불리한 것이지 같이 합쳐질 수도 있고 또 자주 합쳐지기도 하는데, 특히 박티와 즈나나의 길이 종종 함께 가지요.
질문자: 깨달음이 몸-마음 유기체에 일어난 뒤에도 유기체는 계속 살아간다고 말씀하셨는데, 깨달음이 싸이코패스에게도 일어나나요?
라메쉬: 아닙니다. 사이코패스의 유기체는 깨달음이라는 일을 받아들일 만한 준비가 안 될 겁니다. 제가 한 말은 깨달음이 모든 종류의 유기체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죠. 박타 또는 헌신자인 내장 긴장형의 사람에게도, 성취를 즐기는 사람인 신체 긴장형의 사람에게도, 두뇌 긴장형인 즈나니에게도 깨달음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깨달음은 모든 종류의 유형에서 일어날 수 있어요. 하지만 깨달음이 일어나려면 깨달음이라는 사건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이런 각 유형의 유기체가 충분히 발달해야만 합니다. 아인슈타인의 시대에 많은 과학자가 있었지만 상대성이론을 받아들일 능력이 되는 사람은 아인슈타인 밖에는 없었어요. 아인슈타인 자신의 말처럼 "외부에서 들어오는" 그 방정식을 받아들일 만큼 아인슈타인의 두뇌가 충분히 발달했었기 때문이죠.
질문자: 선생님께서 몸-마음 유기체 또는 복합체가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면 제가 정말 묻고 싶은 것은, 어디에 그 중요성이나 가치가 있냐는 겁니다. 육체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어야하나요? 아니면 정신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어야하나요?
라메쉬: 둘 다죠. 보시면, 몸과 마음은 결코 둘로 나눌 수 없어요. 이 때문에 제가 계속해서 "몸과 마음의 유기체"라고 말하는 겁니다.
질문자: 글쎄요. 아프다고 불평하는 것은 몸이라기 보다도 마음이지 않습니까?
라메쉬: 그렇죠. 정말로 마음이 몸이 아프다고 불평하기 때문에 아픔을 느끼는 거죠.
질문자: 몸은 전혀 상관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라메쉬: 맞아요. 그래서 당신이 물어보는 그런 준비 과정에서 몸과 마음을 구분할 수가 없어요. 마음이 이런 이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됩니다. 오직 특정 시간이 되어야지만 마음은 이런 이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됩니다. 깨달음에 꼭 필요한 성심 성의를 다하는 것 조차도 특정 시간이 되어야지만 성심성의을 다할 수가 있어요.
질문자: 그럼 그냥 정신적으로 조건이 충족 되어야 하는 문제군요?
라메쉬: 처음에 찾음 시작할 때만 정신적인 조건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단순히 육체적인 즐거움 말고도 삶에 뭔가가 더 있는 것이 틀림없어."라는 생각이 들어와요. 이런 생각이 열 명의 유기체에 들어 간다고 해도 오직 한 유기체만 반응할 수도 있어요. 그 순간에는 다른 아홉 명의 유기체는 그 생각에 반응할 준비가 안 된 거죠. 그래서 오직 한 특정 유기체만이 외부에서 들어오는 그 생각에 반응하고 마음이 내면으로 향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이것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생각에 마음 또는 유기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관한 문제예요.
-- 깨달음의 희소성 --
질문자: 니사르가다타께서는 다락방에서 거의 40년 동안을 가르치셨으니 틀림없이 수 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을 거예요. 이 사람들 중에 몇 명은 깨달음에 가까이 갔거나 깨달았을 수도 있는데, 제가 알기로는 니사르가다타께서 확신을 가지고 가르침을 전하라고 독려한 사람은 선생님 한 분 밖에는 없네요. 이 사실을 보면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드물게 일어나는 일인지를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라메쉬: '성취한다'는 말이 심각하게 잘 못 쓰인 것 같군요. 뭔가를 성취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이 요점이예요.
질문자: 깨달음이 아주 드문 것은 맞는 것 같네요.
라메쉬: 정말 그렇긴 하죠. 아주 드물게 일어나지요.
질문자: 그걸 보면 저희는 깨달음을 바라는데 좀 더 겸손해야겠네요. (웃음) 선생님 스스로도 왜 그렇게 드물게 일어나는지 궁금한 적이 있으신가요? 정말 많은 사람이 그 다락방을 거쳐갔을 텐데요.
라메쉬: 정말 그렇게 많은 사람은 아닙니다. 확실히 수천 명은 아니죠. 사실 제가 평상시처럼 해안을 따라 30분 정도 차를 테워드릴려고 마하라지께 갔을 때 마하라지께서 쉬고 계시다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때는 마하라지와 저 뿐이었어요. 마하라지께서 나갈 채비를 하시다가 느닷없이 제 어깨에 손을 올리시고는 "완전한 이해가 적어도 한 번은 있으니 난 기쁘네." 전 정말 그분의 증명은 필요 없었어요. 정말 솔직히 말해서 전 깨달음이 일어난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일반적으로 말해서, 깨달음이 순전히 그분의 은총으로 일어난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분께 감사드리는 마음이 엄청나게 컸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승에게서 인정받는 일은 참으로 감격적인 일이었어요. 제가 눈물을
흘리면서 그분을 의아하게 쳐다보니, 마하라지께서 "글쎄, 아마 한 둘 더 있을지도 모르지."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 맞아요. 아주 드문일이예요. 여기서 기분적인 요점은 깨달음이 드물게 일어난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고, 일단 이 사실이 받아들여지면 개인적인 바람은 사라져요. 그래서 깨달음이 드물게 일어난다는 사실은 좌절을 가져올 수도 있고 완전한 자유로 이끌 수도 있어요. 뭔가를 원하는 "내"가 있는 한은 좌절할 겁니다. 그래서 제가 계속 반복해서 말하는데, "내"가 10억 원의 돈을 바라든지 깨달음을 바라든지는 질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12jung)
- 리쿼만 편집, 김영진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