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자아 탐구 실제 수행방법 및 이론 정리 (19)

무한진인 2020. 10. 29. 21:39

이제 미세신을 살펴보자. 

마음(곧 생각들)과 지성이 이 미세신을 구성한다.

우리는 마음이 생각들의 집합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생시의 상태에서도 우리에게는 가끔 노력 없이도 모든 생각이 가라앉는 고요함의 순간들이 있지 않은가? 

그러한 무념의 시간에는 우리가 존재하기를 그치는가? 

아니, 그럴 때에도 우리는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나의 생시상태는 온통 계속 밀려오는 생각들의 파도로만 가득 차 있고, 

나는 생각의 가라앉음을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것을 듣는다. 

좋다, 그들의 불평을 반기고 그에 답하는 것이 옳다. 

 

생시상태에서 생각들의 파도가 저절로 가라앉는 시간들은 '고요히 있음'이나 진아안주의 상태이다. 

이런 체험을 해 본 구도자들은 '우리는 생각이 없을 때에도 존재한다'는 진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불평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더 깊히 살펴보자. 

 

우리는 이미 잠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들 중에서 1인칭 생각인 '나는 몸이다'가 첫 번째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2인칭과 3인칭에 속하는 다른 모든 생각들은 이 첫번째 생각을 붙들어야만 그 수가 증가한다. 

생시상태에서 생각들이 가라앉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잠이 엄습하면 첫 번째 생각인 '나는 몸이다' 자체가 가라앉기 때문에 모든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 모두가 꿈 없는 잠 속의 생각 없는 상태에 접근할 수 있지 않은가? 거기서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

 

에고인 '나'가 없는 잠 속에서도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네 !

                                         <우빠데샤 운디야르, 제21연>-

 

라고 스리 바가반은 말한다. 

그래서 우리의 기본적 시험기준에 따라 우리는 마음이 없을 때에도 존재하므로,

우리는 마음이 아니다. 

나아가 이 '나는 몸이다'하는 의식이 조대신을 '나'로 여겨 집착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것은 또한 미세한 방식으로 다른 많은 몸에도 집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조대신이 활동하지 않을 때도 마음은 작용하지 않는가? 

 

꿈이 그런 경우의 하나이다. 그것은 우리가 미세신을 취하는 한 예이다. 

꿈을 꾸는 동안에 마음은 -마치 다른 조대신을 취한 것처럼- 그 몸을 통해 기능하면서 많은 것을 안다. 

이 경우의 몸은 단지 하나의 심적인 투사물이다. 그것은 마음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도 미세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꿈없는 잠 속에서도 존재하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는 이 꿈의 몸 없이도 존재할 수 있으므로 그것이 '나'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마음이 이처럼 꿈 속에서만 미세심을 가지고 기능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생시에 상태에서도 우리는 백일몽을 꾸지 않는가? 

그럴 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우리가 잠자지 않고 앉아서, 어느 먼나라로 여행하여 그곳에서 어떤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삶의 온갖 풍상을 겪는 상상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럴 때 우리가 그 몸으로 가고 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몸 또한 미세신의 하나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우리가 지금 취하거나 그때 취하는 이 미세신들이 일시적인 것임을 안다. 

 

우리가 꿈에서 깨어나면 꿈의 몸은 사라진다. 

그와 마찬가지로, 백일몽을 꿀 때 취하는 몸도 거짓인(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즉, 이 몸들은 우리에게 다가왔다 떠나는 거짓 형상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몸들이 없을 때에도 우리는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따라서 그 몸들은 우리가 아니다. 

 

이제 더 나아가 면밀히 살펴보면, 우리에게는 미세신보다 더 미세한 또 하나의 몸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 각자는 이것을 뒷받침하는 그 자신의 경험, 즉 꿈없는 잠을 가지고 있다. 

그런 잠을 잘 때 우리에게는 조대신도 없고, 미세신도 없다. 

마음이 완전히 가라앉아 있으므로, 우리는 완전한 어둠 속에 잠겨 휴식하며 아무 것도 모른다,

마음이 이 어둠에서 다시 일어나면 꿈이나 생시의 상태가 된다. 

 

우리가 깊은 잠에서 깨어날 때는 이와 같이 우리의 경험을 기억한다. 

'나는 행복하게 잠을 잤고, 아무 꿈도 꾸지 않았다.'고,

즉, 우리는 꿈조차 없는, 외관상 어둠으로 보이는 그 상태 속에서도 우리가 존재했다는 것을 안다. 

그 어둠의 상태를 원인신(Causal body)이라고 한다. 

우리가 거기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을 아는 우리가 진정한 '나'이다.

 

깊은 잠 속에서 에고(집착의 형상을 한 마음)는 아무 미세한 원습의 형상으로 여전히 살아 있다.

미세신과 조대신들이 일어나는 토대이자 원인이 바로 이 형상이며, 그래서 그것을 원인신이라고 한다.

죽음의 상태에서도 우리는 이 원인신 속에서 존재한다. 

이 원인신은 조대신의 죽음에 의해 소멸되지 않는다. 

이 원인신조차 '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 상태조차 우리에게 낯설다는 것을 알면서 그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우리의 존재만이 실재하며, 

거기서 우리가 취하는 그 형상(어둠 혹은 무지)은 우리일 수  없다. 

 

생시상태의 조대신은 비록 '나'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나는 이 몸이 아니다'라고 배척했고,

같은 이유로 꿈 상태의 미세신도 '나가 아닌 것'으로 배척했듯이,

이제 깊은 잠의 이 원인신(어둠 혹은 무지)도 '나가 아닌 것'으로 배척하자.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오고 가는 하나의 형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몸 모두를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니다"로 확고히 제거하고 나서 남아 있는 

그 지(知), 우리의 존재(sat)에 대한 의식(chit)이야말로 '나'인 것이다.

 

우리는 이 세 가지 몸을 제거할 수 있는가? 

분명히 그럴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의 껍질일 뿐이며,우리에게 외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외부적인 것으로부터는 우리가 자신을 분리할 수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 범위 내에 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외부적인 이 껍질들에서 우리 자신을 분리할 때에만 자신의 참된 성품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미 확립한 진리, 

즉 우리의 참된 성품 그 자체가 행복이라는 진리에 따르면, 

우리의 참된 성품을 아는 것 자체가 완전한 행복의 체험이다. 

그래서 진아지(깨달음)의 체험은 바로 행복의 정점이다. 

그것이 바로 모든 살아잇는 존재들이 알게든 모르게든 무수한 노력을 통해 찾고 있는 궁극의 목표인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하는 탐구를 통해서 

완전한 행복(ananda)으로서의 우리의 실재(sat)에 대한 지(知, chit)를 성취하는 것이 인류의 지고한 목표이다. 

우리가 항상 이 존재-의식-지복(sat-chit-ananda)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껍질들을 우리 자신으로 상상하여 우리 자신을 은폐하는 과오가 모든 불행의 유일한 원인이다. 

 

                                                               -스리 라마나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