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자아 탐구 실제 수행방법 및 이론 정리 (18)

무한진인 2020. 10. 20. 23:07

 : 제가 이미 각성상태라면, 어째서 저는 지금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마하리쉬 : 이원성(二元性)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가 현재 알고 있는 것은 에고에서 비롯된 것이고, 따라서 상대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 상대적인 앎은 주체와 대상이 있게 마련이지만, 참나의 각성상태는 절대적이며, 어떠한 대상도 있을 수 없다. 기억 또한 상대적이다. 기억하는 주체가 있고, 기억되는 대상이 있다. 그러나 주체와 대상의 이원성이 사라진다면 누가 누구를 기억한단 말인가?

참나는 영원히 현존(現存)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참나를 깨닫도록 도와 달라고 하는데, 자기 자신을 아는데에 무슨 도움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들은 참나가 무언가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참나는 영원히 같은 상태로 현존하고 있다. 사람들은 무언가 번쩍하는 섬광같은 것을 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참나는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있는 그대로일 뿐이다. 인간의 언어로는 묘사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그래도 굳이 정의하자면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that I am)' 라고 말하는 정도가 최선이리라. 

참나가 사람의 엄지 손가락만 하다는 책도 있고, 털끝만 하다는 책도 있고, 번갯불 같다는 책도 있고, 엄청나게 광대한가 하면, 가장 작은 것보다 작다고 표현한 책도 있다. 하지만 모두 근거 없는 이야기들이다. 

참나는 유일한 존재이지만, 실재와 비실재의 분별을 넘어서 있다. 참나는 앎이지만, 앎과 무지의 분별을 넘어서 있다. 그것을 어떻게 정의할 수가 있겠는가? 참나는 그저 현존하고 있을 뿐이다. 

 

 : 참나를 깨닫게 되면 무엇을 알수 있습니까?

 

마하리쉬 : 안다는 행위는 없다. 안다는 것은 그냥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참나를 깨달은 상태는 무엇인가를 새롭게 얻거나 저 멀리 보이는 어떤 목표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있었던 그대로, 또한 항상 있는 그대로 그냥 존재하는 상태이다.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라고 여기는 태도를 버리기만 하면 된다. 우리 모두는 실체가 아닌 것을 실체로 착각하고 있다. 우리가 늘 하던 이런 행위를 그치기만 하면, 참나가 곧 나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그저 '참나로 존재하라'는 것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그대는 그토록 자명한 참나를 찾으려고 애썼던 스스로가 우수꽝스럽게 여겨질 것이다. 그 단계에 이르면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의 분리에서 벗어난다. 그때는 보는 자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보는 그대(에고)가 사라지고, 참나 만이 오롯이 남게 된다. 

 

 : 그런 상태를 어떻게 해야 직접 체험할 수 있겠습니까?

 

마하리쉬 : 참나에 대한 앎을 말하려면, 두 개의 나가 있어야 한다. 알아차리는 나와 알려지는 대상이 되는 또 다른 나가 있어야 한다. 거기에다가 그것을 알아가는 과정도 있어야 한다. 

우리가 깨달음이라고 부르는 상태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로서 존재하는 상태이지, 무엇인가를 알거나 무엇이 되는 상태가 아니다. 깨달았다고 해도 깨달은 그 존재는 항상 존재해 왔고 존재하고 있다. 그 상태가 어떻다고 묘사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존재할 뿐이다. 차선책이긴 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이런저런 말로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 할 수는 있으리라. 깨달음을 얻는다고들 이야기하지만, 이미 실재하는 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단 말인가? 

 

 : 선생님께서는, 참나는 침묵이라고 말씀하시곤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하리쉬 : 참나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생각해야할 꺼리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극치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생각자체가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나의 아름다움 속에서 말은 길을 잃어버린다. 그에게는 오직 침묵만이 존재한다. 궁극의 그런 상태에서는 그 상태 그대로 존재하는 것 외에는 해야 할일이 아무 것도 없다. 

 

 : 무엇이 침묵입니까?

 

마하리쉬 : 언어와 생각을 초월한 상태가 침묵이다. 있는 그대로의 이 상태가 침묵인데, 이것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현자들은 말한다. '나'라는 생각(에고)이 털끝만큼도 일어나지 않고 참나만이 오롯이 현존하는 상태를 침묵이라고, 이러한 상태의 주인공이 신이며 영혼이다. 참나는 아득한 태곳적부터 존재해 온 침묵이다. 

침묵만이 진실하고 완전한 앎이며, 그 밖에는 모두 보잘 것 없고 하찮은 일에 불과하다. 

주체와 대상이 분리된 상태에서 삼라만상의 수많은 모습들을 분별하는 것은 참다운 앎이 아니다. 

삼라만상은 앎 자체인 참나의 표면에 나타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 이 세상에는 수많은 존재들이 육체를 가지고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참나만이 유일한 실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마하리쉬 : '이 몸이 나'라고 생각한다면, 수많은 존재와 자아가 있게 된다. 그러나 '이몸이 나'라는 생각이 사라진 상태가 바로 참나의 상태이다. 그 상태에서는 대상이 모두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나의 각성상태에서는 참나만이 유일한 실재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참나의 자리에서 보면 몸이란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환상의 힘에 의해 왜곡되고 뒤틀린 마음 때문에 실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참나를 의식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면 크게 어긋난 셈이다. 이 세상은 그 몸이 없이는 존재하지 않고, 그 몸은 그 마음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 마음은 의식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의식은 궁극의 실재가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내 안의 신성(神性)을 통해 참나의 자리에 들어간 현자에게는 참나 외에는 더 이상 알아야 할 것이 없다. 왜 그럴까? 육체와 '나'를 동일시하던 에고가 사라지고, 어떠한 형체도 없는 순수의식자체이기 때문이다. 

참나를 깨달은 사람은 자신이 곧 참나이며 참나 외에는 그 자신의 몸이나 그 밖의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이런 자리에 든 사람에게는 하나의 몸이 있고 없고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깨달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무엇을 깨닫는단 말인가? 실재는 항상 있는 그대로 있다. 우리는 그 무엇도 새로이 창조해 내지 못하며, 이미 가지고 있지 않은 무엇인가를 얻을 수도 없다. 우물을 파면 하나의 구멍이 생긴다. 그러나 그 구멍 속의 공간은 우리가 창조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그 공간을 메우고 있던 흙을 파냈을 뿐이다.

그 공간은 우물을 파기 전에도 거기 있었으며, 우물을 판 다음에도 그곳에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내면에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에고의 찌꺼끼인 습(習,samskaras)을 밖으로 던져 버리기만 하면 된다. 

(삼스카라는 생각과 행위의 결과로 생긴 잠재인상이 의식 밑바닥에 쌓인 축적물로서, 현재의 삶에서 본능이나 어떻게 하고자 하는 경향성으로 나타난다) 

습이 모두 제거되고 나면, 참나만이 홀로 빛난다.

 

 : 어떻게 해야 습을 버리고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까?

 

마하리쉬 : 자유는 우리의 본성이다. 우리가 곧 자유이다. 우리가 자유를 갈망한다는 사실 자체가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움이 우리의 진정한 본성이라는 사실을 숨김없이 보여주지 않는가. 단지 우리가 구속되어 있다는 착각을 버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자유에 대한 생각이나 자유롭고자 하는 갈망이 사라지고, 자유로움 그 자체가 된다.그러나 스스로 구속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자유롭게 되기를 갈망하는 동안에는 구속되어 있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