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자아 탐구 실제 수행방법 및 이론 정리 (13)

무한진인 2020. 8. 4. 23:26

 : 선생님은 가슴이 참자아의 자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그렇다. 가슴은 참자아의 주인공이 거하는 지고의 중심이다. 이 점을 확실히 믿기를 바란다. 참자아는 에고 또는 개체로서의 자아의 배후에, 가슴에 현존한다. 

 

 : 그 중심이 제 몸의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세요.

 

 : 마음으로는 알지 못한다. (오른쪽 가슴을 가리키면서) 내가 그 중심이 여기 있다고 말해도 머리로 상상하는 것으로는 깨달을 수가 없다. 꿈을 깨고 그대 자신이 되는 것만이 중심을 깨닫는 유일하고 직접적인 길이다. 깨닫고 나면 중심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저절로 느끼게 될 것이다. 

경전에서 리트 구하(심장 깊숙한 곳), 아룰(은총), 울림(가슴)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 중심이다. 

 

 : 가슴에 그런 중심이 있다는 얘기는 어떤 책에서도 보지 못했습니다. 

 

 : 내가 오래 전에 인도 남부 지방의 언어로 번역된 아슈탕가리다얌을 우연히 본적이 있다. 아슈탕가리다얌은 인도 전통의학인 아유르베다의 교과서 같은 책인데, 거기에 가슴 오른쪽에 오자스 스타나 (육체적인 기원의 원천 또는 '빛의 자리'라는 뜻)가 있는데, 이곳이 '의식의 자리'라는 말이 나온다. 이 자리가 오른쪽 가슴에 있다는 말이 나오는 또 다른 책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 고대 문서에 나오는 그 자리가 지금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슴'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까?

 

 : 그렇다, 같다. 하지만 그대는 그 자리가 어디인지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자리가 어디인지 규명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무엇을 볼 때 그냥 보면 되는 것이지, 눈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를 알아야 되는 것은 아니다. 가슴은 늘 거기에 있다. 그대는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그대가 의식하지 못할 때에도, 가슴은 그대의 모든 움직임을 통괄하고 있다. 참자아가 가슴에 거한다기 보다는, 가슴 자체가 참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당하리라. 실제로 참자아는 중심 자체이다. 중심은 모든 곳에 현존하고 있다. 이 중심이 '가슴'이고 '참자아 깨달음'임을 알도록 하라. 

 

 : 가슴이 참자아의 자리라면, 어떻게 그 자리를 육체의 특정부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가슴이 육체의 특정한 위치에 있다고 못박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참자아를 한계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닐까요?

 

 : 맞는 말이다. 하지만 가슴의 위치에 대하여 묻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육체로 존재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한 가지 물어보자. 그대의 육체는 여기에 있는데, 질문을 하는 그대는 딴 곳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질문을 하는 그대와 그대의 육체가 여기 하나로 존재하고 있다. 참자아의 자리를 육체와 관련해서 언급하는 모든 가르침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순수의식은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없다. 그것은 형태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안도 없고 밖도 없다. 오른쪽도 없고 왼쪽도 없다. 순수의식, 또는 가슴 속에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이 궁극의 진리이다. 

이런 절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가슴, 참자아, 순수의식을 육체의 어떤 특정 부위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왜 그런가? 마음은 가슴의 빛이 희미하게 반사된 것이고, 육체는 그런 희미한 마음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육체는 궁극적인 실체가 일시적인 현상으로 나타난 아주 미미한 것이다. 그러니 그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가슴이 어찌 이런 육체의 특정부위에 갇힐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물질적인 육체나 이 세상과 관련된 개념의 도움이 없이는 생각도 못한다. 예를 들어 보자, 그대는 '나는 히말리아 저 너머에 있는 고향을 떠나 오랜 여행 끝에 이 아쉬람에 도착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은 진실이 아니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진정한 그대 자신에게 '오는 것'은 어디 있으며, '가는 것'은 어디 있겠는가? 진정한 그대 자신은 늘 그대 자신으로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아쉬람에 도착할 때까지 그대의 육체가 이곳에서 저곳으로 움직였을 뿐, 그대는 늘 그 자리에 있었지 않은가. 이건 아주 단순한 진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객관적인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주관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움직인 것처럼 보인다. 가슴이 육체의 어떤 부분에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이런 사람들의 의식 수준에 맞추기 위한 것이다. 

 

 : 가슴 어딘가에 진아의 자리가 있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 일단 순수의식인 가슴은 시공을 초월해 있다는 절대적인 관점을 받아들이면, 그 정확한 자리에서 평온하게 슇 수 있을 것이다. 

 

 : 가슴에는 서로 색깔이 다른 여섯개의 기관이 있고, 가슴 쎈타는 중앙 오른 쪽에 손가락 두개 폭 정도의 크기로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가슴쎈타는 형태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슴 쎈타의 모양을 상상으로 그린 다음 거기에 집중해야 하는 건가요?

 

 : 아니다. 오직 '나는 누구인가?'만을 탐구하라. 깊히 잠들어 있을 때에도 '나'는 남아 있다. 그 '나'와 깨아 있을 때의 '나'는 똑같은 '나'이다. 그러나 깨어있는 동안에는 그 '나'가 불행을 느끼며 그것을 제거하려고 애쓴다.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동일하게 현존하는 그 '나'를 찾아라, 그 '나'에 철저하게 집중하라. 그것만 잘되면 영원한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낼 것이다. 가슴 쎈터에 집중하고 명상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탐구하는 것이 요점이다. 안이라든지 밖이라든지 하는 것은 없다. 안과 밖은 똑같은 것이든지, 그렇지 않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 

물론 가슴 쎈타에 집중하는 명상도 있다. 가슴쎈타에 집중하는 명상을 하면 마음의 활동이 멎었을 때 고요한 각성상태에 있을 수 있다. 다른 쎈타에 집중해도 마음의 활동이 멎긴 하지만, 그 상태에 대한 각성이 없다. 나중에 마음이 다시 활동을 시작하면, 그때에야 비로소 마음의 활동이 멎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어째든, 이런 명상은 수행이지 탐구가 아니다. 육체의 어딘가에 참자아가 거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생각하는 힘 때문에 실제로 참자아가 그곳에 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가슴 만이 '나'의 유일한 거처이다. '나'는 가슴에서 나왔다가 가슴으로 돌아간다. 사람들은 가슴이 육체(밖)에도 있고 내면(안)에도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궁극적인 차원에서 보면, 가슴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안이다 밖이다 하는 것은 다 육체를 기준으로 하는 말인데, 육체란 마음이 만들어 낸 현상이기 때문이다. 근원인 가슴이 모든 것의 시작이고 과정이고 끝이다. 가슴은 형태와 한계가 없는 지고한 공간이며,진리의 빛이다. 

 

                                                                    -있는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