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초기선종법문

영가현각선사의 지관(止觀) 법문(3)

무한진인 2020. 5. 8. 23:18

(3)명적(冥寂)의 묘성 : 성성적적의 영지(靈知)

 

[본문]

지(知)가 멸하고 대(對)가 버려지면 오로지 깊고 고요하다(冥寂),

고요하여 맡길 바가 없으니 묘한 성품은 타고난 것(天然)이다.

知滅對遺 一向冥寂 闃爾無奇 妙性天然 

 

[해설]

주관으로서의 지(知)가 멸하고 객관으로서의 대(對)가 버려진 경지는 주객분별을 넘어선 경지쌍망의 경지, 

즉 심층마음인 일심의 경지이다. 

주객 분별의 표층의식 너머 심층에서 작용하는 주객포괄의 마음은 다시 그 마음이 의거하는 바를 물을 수 없는 궁극의 마음이다. 그래서 그 마음을 고요하여 맡길 바 없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심층에서는 주와 객의 분별, 지와 타의 이원성이 사라지니, 일체가 하나의 마음으로 통하며 그 안에서는 서로 다른 차이에서 오는 비교와 경쟁, 다툼과 투쟁이 없으므로 오로지 깊고 고요할 뿐이다.

그것이 모든 중생 안의 본래 성품이고 본래 마음이므로 그 마음을 쓰는 것이 곧 마음을 흡흡하게 쓰는 것이고, 본성대로 사는 것이고, 천연스러워지는 것이다. 

이 본래 타고난 찬연의 마음이 바로 능연의 식(識)과 소원의 경(境)을 함께 포괄하는 전체로서의 마음, 경지쌍방 이후에 드러나는 공(空)으로서의 마음, 아공과 법공을 통해 드러나는 진여, 이공소현진여(二空所顯眞如)의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의 본래 면목, 인간의 본성인 진여불성을 내 안에서 직접 깨닫고자 하는 것이 바로 사마타 수행이다.

 

행정은 "지(知)가 멸함은 능(能)을 결론 짓고, 대상이 버려짐은 소(所)를 결론 짓는다. 

두 길이 이미 사라지면, 하나의 성(性)만이 적연하다, 라고 말한다. 

이어 "능과 소가 자취를 끊으므로 '맡길 바가 없다(無寄)고 말하고, 영지(靈知)가 홀로 서므로 '천연(天然)이라고 말한다. 그 도가 '머무를 바 없음(無住)에 근본을 두니, 무주의 심체는 영지로서 어둡지 않다. "라고 하여 그 천연의 경지를 영지로 설명한다. 

주객분별을 넘어선 전체로서의 한마음, 경지쌍방의 배후에서 드러나는 한마음의 깨어있음이 바로 '영지'이다. 

영지는 주객무분별적 한마음의 성성적적한 깨어있음이다. 영지가 밝게 빛나 어둡지 않음이 '영지불매(靈知不昧)'이다. 

 

[본문]

이는 마치 불이 공(空)을 얻으면, 불이 스스로 멸하는 것과 같다. 

공은 묘성이 상(相)이 아니라는 것에 비유되고, 

(자멸하는) 불은 망념이 생하지 않음에 비유된다. 

如火得空 火則自滅 空喩妙性之非相 火比妄念之不生

 

[해설]

불은 능소분별의 망념에 비유되었다. 

분별심은 공의 깨달음을 통해 사라지는데, 

이를 불이 공을 얻어 멸하는 것으로 비유한 것이다. 

불이 공을 얻어 멸하게 되듯, 

우리의 분별적 마음은 공의 깨달음을 얻으면 더 이상 주객분별을 일으키지 않게된다는 것이다. 

 

행정은 이렇게 설명한다. 

"영지가 광대하므로 공의 비유를 취했고, 능소망정(能所妄情)은 불에 비유하였다. 

불이 공에 가면 멸하듯, 허망은 진실에 닿으면 사라진다. 

일상법문(一相法門)을 닦음은 이에 준해야 한다. 

불이 공(空)에 닿아 공 안에서 사라지듯이, 주객분별의 허망(妄)은 주객포괄의 진실(眞) 안에 포괄되어 사라진다는 것이다. 

 

함허는 "일상(一相)의 법문은 능과 소가 사라진 곳이다. "라고 설명한다. 

다양한 차별적 상들이 모두 사라지고 난 바탕에 드러나는 무분별의 공을 일상(一相)이라 한 것이다. 

 

2) 연지(緣知)에서 무연지(無緣知)로

 

[본문]

그 글에서 말하기를 ① 연을 잊은 이후 적적하니 영지(靈知)의 성이 역력해지고

② 무기(無記)의 혼매도 소소하니 본래의 진공에 계합하여 밝아진다.

其辭曰 ①忘緣之後寂寂 ② 無記昏味昭昭, 契本眞空的的

 

[해설]

①주객분별에 머물러 대상을 반연하면 마음에 고요함이 없다.

대상을 반연하는 마음활동을 멈추어야 고요하게 적적해질 수 있다. 

적적해야 영지의 빛이 드러나게 된다. 

② 무작정 적적하기만 하면 혼침에 빠질 위험이 있지만, 

영지의 빛이 역력히 밝으면 혼미한 무기(無記)에 빠지지 않고 마음의 공성 안에서도 밝게 깨어있게 된다. 

그러므로 영지의 빛 안에서는 적적과 성성(腥腥)이 함께 유지된다. 

 

행정은 "육조 혜능 선사는 '선악은 모두 사량분별하지 않아야 자연히 심체에 들어가 맑고 항상 적적하여 묘용이 항하의 모래 같아진다'고 하였다 라고 말한다. 표층의식의 주객분별과 사량분별을 멈추면 심층마음의 영지의 묘용이 저절로 드러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어 이렇게 설명한다. "하층 부류 중생은 그 본성이 혼침이어서 무기이지만, 지(知)의 체를 확실히 논하자면 비추어 어둡지 않다. 

물고기는 연못을 그리는 정이 있고, 새는 나무를 찾는 성이 있다. 

수행하는 자가 그중에 특별히 통달하면 곧 본래의 진공과 합치할 것이다. 

능소분별은 인간이 제6식에서 행하는 분별이다. 

따라서 그런 분별적 의식을 갖지 않은 일체 중생은 본래 마음 심층에 그러한 적적성성의 본성이 갖추어져 있다.

다만 그들은 본성적으로 성성하게 깨어 있지 못하고 무기 혼침에 빠져 있을 뿐이다. 

 

[본문]

성성적적이 옳고 무기적적은 그르다. 

적적성성이 옳고 난상성성은 그르다. 

惺惺寂寂是 無記寂寂非 寂寂惺惺是 亂想惺惺非

 

[해설]

의식이 대상을 가지지 않으면 적적하다. 

대상이 없이 적적하다 보면 혼침에 빠져들어 무기가 되기 쉽다. 

그러나 적적한 무기인 '무기적적(無記寂寂)'은 수행인이 도달하고자 하는 경지가 아니다. 

적적하면서도 무기에 빠져들지 않고 성성을 유지하는 '적적성성'이 얻고자 하는 경지이다. 

또 반대로 성성하다 보면 의식이 또렷하여 대상을 좇아가는 산란한 난상에 빠져들기 쉽다. 

그러나 성성하되 산란한 '난상성성(亂想惺惺)' 또한 수행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경지가 아니다. 

성성하면서도 난상에 빠져들지 않고 적적을 유지하는 '성성적적'이 얻고자 하는 경지이다. 

결국 '성성적적'은 옳지만, 

적적해서 무기에 빠지는 '무기적적'이나 성성해서 난상이 되는 '난상성성'은 옳지 않다.

 

행정은 이렇게 덧붙인다. 

"이하의 문장에서 '성성은 정(正)이고 적적은 보조(助)'라고 말한다. 

정(正)과 조(助)가 함께 행해져야 마음 닦음이 거기 있다. 

정과 조가 각각 서야 3성(性)이 양분된다. 

이것은 영가집에서 잠시 후 성성과 적적에 대해 어느 것이 주이고 어느 것이 보조인지를 논하는 것을 미리 언급한 것이다. 3성은 적적하지 않은 선과 악, 성성하지 않은 무기를 말한다. 

 

(1) 연지 1 : 대상지

 

[본문]

만약 지(知)로써 적(寂)을 안다면 이것은 '대상 없는 지(無緣知)가 아니다. 

마치 손으로 여의(효자손)를 잡으면 여의가 없는 손이 아닌 것과 같다. 

若以知知寂 此非無緣知 如手執如意 非無如意手 

 

[해설]

성성적적은 마음이 아무 대상이 없어 적적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들지 않고 성성하게 깨어있는 상태이다. 

마음의 특정대상을 아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없어 적적하면서도 깨어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렇다면 적적에서도 깨어 있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서는 성성적적의 마음을 적(寂), 즉 고요함을 인식대상으로 아는 마음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성성적적의 마음은 적(고요함)을 대상으로 아는 마음이 아니라, 스스로 적(고요함)이 된 마음이다. 

즉 고요함을 대상으로 인식하는 마음이 아니라, 스스로 고요해진 마음이다. 

적(고요함)을 인식대상으로 알고 있는 마음은 적(고요함)과 대면하여 적(고요함)을 연(緣)한 주객대립의 마음이지 진정한 주객무분별의 성성적적의 마음이 아니다. 적(고요함)을 대상으로 삼는 지(知)는 대상을 갖는 지(知)인 연지(緣知)이지, 대상이 없는 지인 무연지(無緣知)가 아니다. 즉 무연지로서의 성성적적의마음이 아닌 것이다. 

마음의 본래자리를 아는 무분별지는 무연지(無緣知)여야 한다. 

적적의 고요함일지라도 마음이 그 적(고요함)을 대상으로 해서 안다면, 그렇게 대상을 아는 마음은 마음 자체가 아니다. 마치 주관으로서의 손이 객관으로서의 여의(효자손)를 잡고 있다면, 이때 손은 객관을 갖지 않은 손 또는 주객을 포괄하는 손 자체는 아닌 것과 같다. 따라서 적(고요함)을 대상으로 아는 연지를 여의를 잡고 있는 손에 비유한 것이다. 여기서 '여의(如意)'는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물건인 등긁이(효자손) 같은 것을 말한다. 

 

행정은 "능지(能知, 주관)의 마음으로 적적한 경계를 알면, 이미 능소가 성립하니 어찌 무연이겠는가? 경에서 '지견(知見)에서 지(知)를 세움이 곧 무명의 근본이다'라고 하였다. 고 말한다. 

추구되는 것은 대상지인 연지가 아닌 무연지라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지견(知見)이란 능소로서 대상화 하여 아는 것이다. 

본래의 영지에 머무르지 않고 이원화 내지 대상화 해서 지견으로 나아감이 무명의 근본이다. 

행정은 이 비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 손은 본래 안에 있으니 '능히 아는자(能知)를 비유한 것이고, 여의는 바깥에서 온 것이니 '알려지는 것'(所知)을 비유한 것이다. 여의를 잡은 손이므로 결국 능소분별이라는 말이다. 

 

                                       -한자경 지음 <선종영가집 강해> 불광출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