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스님 경책(3)
ㅇ.
대덕아! 시간을 아껴야 하거늘,
다만 옆집으로 분주히 돌아다니면서 선을 배우고 도를 배운다고 하는구나.
이름과 글자로 집착하여 부처를 구하고 조사를 구한다고 하는구나.
선지식을 찾아가서 생각으로만 헤아리는구나. 착각하지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
그대들 안에 오롯한 부모가 있는데, 다시 또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
그대들 스스로 돌이켜 보라.
옛사람이 이르기를 '연야달다(演若達多)가 머리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다가
찾는 마음을 쉰 순간, 아무런 일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ㅇ.
대덕들이여 !
일상에서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니
조작된 마음으로 남의 모양을 흉내 내지 마라.
좋고 나쁜 것을 알지 못하는 머리 깎은 노예들이 있다.
그들은 문득 귀신을 보고 도깨비를 보며,
동쪽을 가리키고 서쪽을 구분하며
맑은 날이 좋으니, 비 오는 날이 좋으니 한다.
이러한 무리들은 모두 빚을 지고 염라대왕 앞에 가서
쇳덩이를 삼킬 날이 있을 것이다.
공연히 아무 탈 없는 집안의 남녀들이 무릇 들의 여우와
도깨비 정령에 홀려 곧장 괴상한 짓을 만들어 낸다.
이 눈멀고 어리석은 것들아!
밥값을 깊을 날이 있을 것이다.
ㅇ.
나는 어느 때는 먼저 지혜로 비춰보고 뒤에 작용을 하며
어느 때는 먼저 작용을 하고 나중에 비춰본다.
어느 때는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며
어느 때는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지 않기도 한다.
먼저 지혜로 비추고 뒤에 작용하는 것은 중심을 사람에게 둔 것이다.
먼저 작용하고 뒤에 비춰보는 것은 중심을 대상에 둔 것이다.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할 때에는
밭 가는 농부의 소를 빼앗고 굶주린 사람의 밥을 뺏앗는 것처럼
뼈를 두둘겨 골수를 뽑아내고 아픈 데에다
다시 바늘과 송곳으로 침을 꽂는 것이다.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지 않을 때는
물음도 있고 대답도 있으며
손님(객관)이 되기도 하고 주인(주관)이 되기도 한다.
물과 진흙이 서로 합하고 조화롭게 되는 것처럼
근기에 따라 사람들을 제접한다.
만약 헤아리기 힘든 뛰어난 사람이라면
앞에 열거한 법들을 거량하기도 전에 떨치고 일어나 바로 가버린다.
그래야 조금 되었다고 할 수 있다.
ㅇ.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
참으로 중요한 것은 진정견해를 갖추고 천하를 마음대로 다니면서
안목없는 허수아비나 도깨비들 같은 선승들의 엉터리 주장에
홀리지 말아야 한다.
일이 없는 사람이 참으로 귀한 사람이다.
다만 무엇을 하려고 억지로 조작하지 마라.
오직 평상의 생활 그대로 하라.
그대들이 밖으로 향하고 옆집을 찾아 헤메면서
방법을 찾아봐야 그르칠 뿐이다.
단지 부처를 구하고자 하나 그 부처란 이름 뿐이며 글귀일 뿐이다.
ㅇ.
그대들이 바깥을 향해서 부처를 구하려고 허둥대고 찾으려 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가?
시방삼세(十方三世)의 부처와 조사들이 세상에 오신 뜻은
오로지 법을 구하기 위함이다.
지금 여기서 도를 배우는 사람들도 또한 법을 구하기 위함이다.
법을 얻었다면 그것으로 마친 것이지만
법을 얻지 못하면 여전히 지옥, 아귀, 축생, 천도, 인도의
다섯 갈래의 길에 떨어져 윤회하게 된다.
무엇이 법인가?
법이란 마음법이다.
마음 법은 형상이 없어서 온 시방법계를 관통하고 있어
눈앞에서 언제나 활발발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믿는 마음이 부족하여
이름과 글귀를 분별하는 가운데서 제멋대로 불법을 구하여
사량과 분별을 헤아려 이해하려고 하니,
불법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어긋나버린다.
ㅇ.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산승의 설법은 무슨 법을 설하는가.
심지법(心地法)을 설한다.
그래서 범속함(凡)에도 들어가고 더러운 곳에도 들어가며
진여에도 들어가며 세속에도 들어간다.
중요한 것은 그대들이 지어낸 진(眞), 속(俗), 범(凡), 성(聖)의 가치관으로서
모든 진,속,범,성의 세계에 이름을 붙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원래 진,속,범,성의 입장에서
이 사람의 참다운 성품에 이름을 붙여줄 수는 없다.
ㅇ,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
심지법을 깨달았으면 손에 잡히는 대로 곧장 쓸 뿐,
다시는 무슨 이름을 붙이지 마라.
이를 일컷자면 그윽한 뜻(玄旨)이라고 한다.
산승의 설법은 천하의 누구와도 같지 않다.
가령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바로 눈앞에 각기 다른 몸으로 나타나
그들이 '스님깨 묻습니다'라고 하자마자 나는 벌써 알아차려버린다.
노승이 그저 편안히 앉아 있는데 어떤 수행자가 찾아와 나를 만날 때도
나는 그의 본심을 다 알아버린다.
어째서 그런가?
그것은 나의 견처가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밖으로 범부와 성인을 취하지 않고,
안으로 마음의 근본자리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철저히 깨쳐 다시는 의심하거나 잘못하는 점이 없기 때문이다.
-임제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