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스님의 경책(20
ㅇ. 수승함은 구하지 않아도 수승함이 저절로 온다.
오늘날 부처님법을 배우는 사람이 가장 중히 여길 것은
진정견해(眞正見解)를 구하는 일이다.
만약 진정견해만 얻는다면 나고 죽음에 물들지 않고
가고 머무름에 자유로워 수승함을 구하지 않아도 수승함이 저절로 온다.
수행자들이여 !
예부터 선지식들은 모두가 그들만의 특별한 교화의 방법이 있었다.
지금 산승이 사람들에게 가르쳐 보여준 것은
다만 그대들이 다른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바른 안목이 작용하게 되면 곧바로 작용할 뿐이다.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의심하지 마라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이 진정견해를 얻지 못하는 것은
그 병이 어디에 있는가?
병은 스스로 믿지 않는데 있다.
그대들이 만약 스스로를 믿지 못하면,
곧 바쁘게 이리저리 쏘다니면서 일체 경계를 좇아 끌려가며,
수만가지 경계에 자신을 빼앗겨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 진정견해 : 정견(正見)과 사견(邪見)을 둘 다 초월한 중도정견(中道正見)
ㅇ. 알 없는 사람일 뿐이다.
그대들이 생각 생각마다 밖으로 찾아 헤매는 마음을 쉴 수 있다면
곧 조사와 부처와 같이 다름없느니라.
그대들이 조사와 부처를 알고자 하는가?
다만 내앞에서 법문을 듣고 있는 그대 자신이 조사이자 부처이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를 철저히 깨닫지 못하기에
곧장 자신 밖을 향해 내달리면서 조사와 부처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렇게 해서 설사 밖에서 구하여 얻는다 하더라도
모두 번지르르한 문자일 뿐이다.
마침내 살아있는 조사의 생생한 마음은 얻지 못할 것이다.
착각하지 마라, 여러 선덕들이여 !
지금 바로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만겁천생(萬劫千生)을 삼계에 윤회하여 좋아하는 경계에 이끌려 다니느라
나귀나 소의 배 속에 태어날 것이다.
도를 배우는 여러 벗들이여!
산승의 견해로 볼 때 그대들도 석가와 다름이 없다.
지금 여러가지로 작용하는 곳에 모자라는 것이 무엇인가?
여섯 갈래(眼,耳, 鼻, 舌, 身,意)의 신령스런 빛이 잠시도 쉰 적이 없다.
이와 같이 볼 수 있는 견해를 얻을 때
비로소 참으로 한평생 일없는 사람(一生無事人)이 된다.
ㅇ. 밖으로 구하지 마라.
대덕아 ! 삼계(三界)는 불타는 집과 같아 편함이 없다.
이곳은 그대들이 오래 머물 곳이 못 된다.
무상(無常)을 알리는 죽음의 신이 한 찰나 사이에
귀한 사람, 천한 사람, 늙은이 젊은이를 가리지 않고 목숨을 빼앗아 간다.
그대들이 조사, 부처님과 다르지 않고자 한다면, 부디 밖으로 구하지 마라.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의 청정한 빛은 그대 자신 속의 법신불이고,
그대들 한 생각 마음의 분별없는 빛은 그대 자신 속의 보신불이며,
그대들 한 생각 마음의 차별없는 빛은 그대 자신 속의 화신불이다.
이 세 가지의 불신(佛身)은 지금 내 앞에서 법문을 듣고 있는
바로 그대들 자신이다.
부디 밖을 향해 찾지만 않으면 삼신(三身)의 이런 공용을 갖춘다.
경학을 공부하는 사람(경론가)에 의거하면
이 세 가지 불신에 도달함을 궁극의 경지로 삼으나
산승의 견해로는 그렇지 않다.
세 가지 불신이란 이름과 말이며, 또한 세가지 의지인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몸(佛身)이라고 하는 것은 이치에 따라 세운 것이고
국토는 바탕에 따라 논한 것이다.
법성신, 법성토는 이 빛의 그림자(光影)인 줄 분명히 알아야 한다.
ㅇ. 모든 곳이 돌아가 쉴 곳이다.
대덕들이여 ! 그대들은 또한 그림자를 조종하는 사람임을 알라.
이것이 모든 부처의 근본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곳이 도를 닦는 이들의 돌아가 쉴 곳이다.
그대들의 사대(四大,地水,火,風) 로 된 이 육신은
법을 설하거나 법을 들을 줄 모른다.
폐(肺),위(胃),간(肝), 담(膽)도 설법을 하거나 법을 들을 줄 모른다.
허공도 설법을 하거나 들을 줄 모른다.
그렇다면 무엇이 설법을 하고 법을 들을 줄 아는가?
그대들 눈앞에 역력하고 아무 형체도 없이 홀로 밝은
이것이 바로 설법을 하고 법을 들을 줄 안다.
만약 이와 같이 볼 줄 안다면 곧 조사, 부처와 다르지 않다.
ㅇ. 마음은 형상이 없고 시방세계를 관통하고 있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
마음 법은 형상이 없어서 시방세계를 관통하고 있다.
눈에 있을 때는 보고, 귀에 있을 때는 들으며, 코에 있을 때는 냄새 맡고,
입에 있을 때는 말하며, 손에 있을 때는 잡고, 발에 있을 때는 걸어 다닌다.
본래 이 하나의 정밀하고 밝은 것(一精明,眞如一心)이 나뉘어
우리 몸의 여섯 가지 부분과 화합하였을 뿐이다.
한마음마저 없는 줄 알면 어디든지 해탈이다.
산승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다만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일체 구하는 마음(一切馳求心)을 쉬지 못하고
저 옛사람들의 부질없는 마음 작용과 광경(機境)을
받들고 매달리기 때문이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
산승의 견해에서 보자면 보신불과 화신불의 머리를 앉은 자리에서 끊는다.
십지보살은 마치 식객과 같다.
등각, 묘각은 죄인으로서 칼을 쓰고 족쇄를 찬 것이다.
아라한과 벽지불은 뒷간의 똥오줌과 같다.
보리와 열반은 나귀를 매는 말뚝과 같다.
어째서 이러한가 ?
다만 도를 배우는 이들이 삼아승겁이 공한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장애가 있는 것이다.
만약 진정한 도인이라면 마침내 이렇지 않다.
다만 인연 따라 구업(舊嶪)을 녹인다.
시절 따라 자유롭게 옷을 입고, 가게 되면 가고 앉게 되면 앉아서
한 생각도 불과(佛果)를 바라지 않는다.
어째서 그러한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만약 업을 지어서 부처를 구하고자 한다면
부처가 오히려 생사의 큰 조짐이 된다'라고 하였다.
-임제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