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탐구의 실제수행방법 정리(5)
문 :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하기 시작하면 슬며시 잠이 들어 버립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답 : 깨어있는 동안에 열심히 탐구하도록 하라. 그것으로 충분하다. 만약 잠이 드는 순간까지도 그 탐구를 계속했다면, 자는 동안에도 그 탐구는 계속될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그 즉시 다시 탐구를 시작하라.
문 : 어떻게 하면 평화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참자아 탐구를 통해서는 평화를 얻을 것 같지 않은데요.
답 : 그대의 본래 상태가 평화이다. 마음이 본래 상태를 가로막고 있다. 평화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대가 오직 마음으로만 참자아를 탐구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무엇인지 조사해 보라. 그러면 마음은 사라질 것이다. 마음과 생각은 하나이다. 생각과 떨어져 있는 마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생각을 일으키는 그 어떤 것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그것을 마음이라고 부른다. 마음이 무엇인지 철저히 조사해 보면, 그런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음이 사라질 때, 그대는 영원한 평화상태에 도달한다.
문 : 저는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근원을 탐구하다 보면, 생각을 더 이상 진행시킬 수 없는 고요한 마음상태에 도달합니다. 어떤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텅빈 공백상태가 됩니다.
은은한 빛이 충만하고, 몸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육체나 어떤 형태가 인식되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런 체험은 거의 30분 정도 지속되며 기분도 좋습니다. 이런 체험이 몇 시간, 몇칠, 몇달 동안 지속될 때까지 수행에 몰두하면 영원한 행복(자유,구원 또는 달리 눠라고 부르든) 에 도달됩니까?
답 : 그런 체험은 구원이 아니다. 그런 상태는 마노라마(manolaya, 無記, 생각이 일시적으로 가라 앉은 상태)라고 한다. 마노라야는 생각의 흐름이 어느 한 곳에 집중된 상태이다. 집중상태가 끝나면 그 즉시 이전처럼 여러가지 생각들이 밀려든다. 설령 마음이 일시적으로 가라앉은 상태가 천 년동안 지속된다 하더라도 생각이 완전히 끊어진 자리, 사람들이 윤회의 수레바퀴에서의 해탈이라고 부르는 상태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따라서 수행자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이런 체험을 하는 자가 누구인지, 또 이런 상태에서 기쁨을 느끼는 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내적인 탐구를 해야 한다. 이런 탐구가 없으면 육체가 없어진 듯한 몰아경이나 깊은 수면상태에 오랜동안 빠져 있을 것이다. 이 단계에서 적절한 인도를 받지 못해서, 거짓 자유의 느낌에 현혹되어 거기서 빠져 나오지 못한 수행자들이 많다. 여기서 빠져 나와 목표에 도달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와 관련된 좋은 이야기가 있다. 어떤 요기 수행자가 몇 년동안 갠지스강 언덕에서 열심히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고도로 집중된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그 상태를 오래 유지하는 것이 자유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고 수행을 계속했다. 그는 어느 날 깊은 집중에 들어가기 전에 갈증을 느꼈다. 그래서 제자에게 갠지스 강에서 물을 떠오라고 했다. 제자는 물을 뜨러 강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요가 수행자는 제자가 돌아오기 전에 깊은 몰아경에 빠져 버렸다. 그는 몇십 년 동안 그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동안 갠지스강 다리 밑으로는 수없이 많은 물이 흘러 갔으며, 강의 지형 마저 변해 버렸다. 어느 날 그는 몰아 상태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깨어나지마자 '물, 물 !'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물을 뜨러 간 제자도 갠지스강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맨 먼저 요구한 것이 물이었다. 깊은 집중 상태에 들어 가기 전 그의 마음의 가장 겉층에 있던 생각은 물이었다. 그가 들어가 있던 집중 상태가 아무리 깊고 또 그 상태가 아무리 오래 지속되었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으로 생각을 가라앉힌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가 깨어나지마자 다시 물을 찾은 것이다.
다시 의식차원으로 돌아온 순간 가장 겉층에 있던 생각이 강력한 힘과 속도로 터져 나온 것이다.
집중상태에 들어가기 직전에 가졌던 생각이 이러할진대, 그 전에 가졌던 생각들도 의식층 어딘가에 그대로 남아잇지 않겠는가? 생각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를 자유라고 한다면, 그는 과연 자유를 얻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일시적으로 마음이 고요해진 상태와 생각이 영원히 소멸된 상태가 다르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생각의 물결이 일시적으로 가라앉은 상태가 설령 천 년동안 지속된다 하더라도, 일시적으로 가라앉은 생각들은 집중상태가 끝나지마자 다시 일어난다. 따라서 구도자는 자신의 영적 진보과정을 신중하게 관찰하여, 생각이 가라앉는다는 마법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수행 중에 생각이 가라앉는 체험을 하게 되면, 즉시 의식을 회복하여 그 체험을 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탐구해야 한다. 이 탐구 중에 다른 생각이 끼어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 일종의 자기 최면 상태인 깊은 수면 상태에 빠져서도 안된다. 이런 상태를 체험한다는 것은 목표를 향해 잘 나아가고 있다는 표시가 된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에 이를 것이냐, 아니면 일시적인 몰아경에 함몰할 것이냐의 분기점이 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구원에 이르는 가장 쉽고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빠른 지름길은 자아 탐구수행이다. 자아탐구 수행을 하면 생각의 힘이 점점 깊어져, 결국 생각이 나온 근원에 도달한다. 그러면 일체의 생각이 그 근원 속으로 녹아 들어간다. 그때 모든 생각이 일시에, 그리고 영원히 소멸하면서, 그대는 어떤 충만한 내면의 느낌 속에서 휴식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문 :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저는 아직 그 정도 단계에 이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답 : '나라는 생각'의 근원을 찾아보라. 그것만 하면 된다. '나라는 생각'때문에 우주가 나타난다. '나라는 생각'이 사라지면 불행 역시 사라진다. 거짓된 나는 그 근원을 찾으면 저절로 사라진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느냐고 똑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마음을 보여 주시오. 그러면 어떻게 통제하는지를 알려 주겠소.'
마음은 여러 가지 생각이 묶여 있는 일종의 생각 꾸러미이다. 그러니 어찌 생각이나 욕망으로 그것을 없앨 수 있겠는가? 생각과 욕망은 마음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새로운 생각이 일어나면 마음은 점점 더 비대해질 뿐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마음을 없애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마음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마음이 일어나는 근원으로 파고 들어가 거기에서 떠나지 않는 길밖에 없다. 그러면 마음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요가에서는 '생각의 흐름을 통제하는 법'을 가르친다. 그러나 나는 '참자아 탐구'를 가르친다. 이것이 실제적인 방법이다. 잠들었을 때, 기절했을 때, 그리고 단식할 때, 마음의 작용은 가라앉는다. 하지만 그때가 지나면 생각들이 되살아난다. 그렇다면 그런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몰아상태에 들어가면 고통이 사라지고 평화로움에 젖는다. 하지만 그 상태에서 깨어나면 고통이 다시 찾아온다. 그러므로 마음을 통제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그것은 지속적인 효과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지속적인 효과가 있겠는가? 고통의 원인을 찾으면 된다.
고통은 이런 저런 대상에 대한 생각때문에 생긴다. 그 무엇을 대상으로 보는 분별심도 일어나지 않고, 따라서 대상에 대한 생각도 없으면 고통이 사라진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그 무엇을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분별심을 어떻게 사라지게 하느냐?'이다. 여러 경전과 성인들은 대상은 실체가 아니라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幻影)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런지 아닌지 조사해 보라. 그 말이 진리인지 거짓인지 확인해 보라. 그러면 결국 객관세계는 주관적인 의식 안에 존재한다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 참자아는 현상계 속에 두루 스며 있고, 동시에 현상계를 품고 있는 전일적(全一的)인 실재이다. 참자아 차원에는 주관과 객관의 구별이 없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는 그대의 평화를 방해하는 어떠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깨달음이며, 참자아가 영원한 것처럼 깨달음도 또한 영원하다.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물러나 참자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영적인 수행이다. 이 수행은 그 무엇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도 아니고, 마음을 파괴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물러나 참자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문 : 집중이 왜 효과가 없습니까?
답 : 마음에게 마음을 없애라고 하는 것은 도둑을 잡으라고 도둑을 경찰로 임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도둑을 잡는 척 하겠지만 결코 잡지 못한다. 마음을 내면으로 돌려 어디에서 마음이 일어나는지 그 근원을 찾도록 하라. 그러면 마음은 사라질 것이다.
문 : 마음을 내면으로 돌려 근원을 찾는다면, 이 역시 마음을 사용하는 것 아닌가요?
답 : 물론 그렇다. 우리는 마음을 사용한다. 마음은 마음을 통해서만 없앨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고 널리 인정받고 있는 사실이다. 마음이 있다, 이 마음을 없애야겠다고 말하지 말고, 대신 마음의 근원을 탐구하도록 하라. 그러면 마음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마음이 외부로 향하면 생각과 대상을 낳지만, 내면으로 향하면 스스로 참자아가 된다.
문 : 그렇더라도 저는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지금 제가 알고 있는 '나'가 그릇된 '나'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그릇된 '나'를 어떻게 없앨 수 있습니까?
답 : 그릇된 '나'를 없애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어떻게 에고가 에고를 없앨 수 있겠는가? 그대는 에고의 근원을 찾아 거기에 머무르기만 하면 된다. 그대는 에고의 근원에 도달하기까지만 노력하면 된다. 그 다음엔 저절로 일이 진행될 것이다. 거기서부터는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때부터는 노력으로 가는 길이 아니다.
-데이비드 갓맨 편집, 정창영 옮김<있는 그대로> 한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