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부동상(不動相)이라 합니까?
[본문]
문 : "무엇을 부동상(不動相)이라고 합니까?
답 : 유(有)를 얻을 수 없으니 동(動)할 것이 없고, 무(無)를 얻을 수 없으니 동하지 않을 것도 없다.
심(心)에 즉하여 무심(無心)이니 동할 심(心)이 없다.
상(相)에 즉하여 무상(無相)이니 동할 상(相)이 없다.
까닭에 부동상(不動相)이라 한다.
만약 이와 같이 증(證)한다면 이를 스스로 미치고 미혹된 것이라 한다.
이제까지 해(解)하지 못하였다가 해(解)한 때에는 해(解)할 것이 없다.
[해설]
여기서 설한 부동상(不動相)의 법문은 즉유(即有), 즉무(即無), 즉심(即心), 즉상(即相)에서 이루어지는 부동(不動)의 자리를 설한 것으로 올바른 법문이고, 이와 같이 증(證)함은 올바른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고 부동상을 유(有),무(無), 심(心),상(相)을 떠나 다른 데서 찾고자 하면 이것은 잘못된 길이다.
그런데 즉유, 즉무, 즉심,즉상에서 부동을 증하는 올바른 것을 여겨서는 "스스로 미치고 미혹된 것이라고 하였다." 왜 그러한가? 본래 텅비어 고요한 마음에 무엇을 증(證)한다 하고, 증함이 있으면 증하지 않을 때와는 다른 무엇이 나타난 것이 된다. 그러나 본래 무상(無相)이고, 무생(無生)이며, 본래무일무(本來無一無)인데 새로 무엇을 증함이 있겠는가. 아무리 올바른 증(證)이라 하더라도 증함에는 증한 상이 있게 되어 본래 무상이고 무생인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본래 그 부동의 자리를 떠난 바 없고, 항상 그 자리에 있는지라 그 자리에 들어도 든다 함이 없고, 그 자리에 항상 있어 그 자리가 인지(認知)되지도 않고, 지각(知覺)되지도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온통 그 자리일 뿐인 까닭에 그 자리가 여타의 상과 구별되어 나타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런데 그 자리를 증하였다 하면 그 자리 아닌 곳에서 그 자리를 새로 체험한 것이 된다.
새로 인지할 수 없고, 체험할 수 없는 것을 그렇게 한 것이니 망령이다.
증했다 하면 이미 그 마음이 있는 것이고 마음 일어난 것이니 마음이란 일어남 없다(心不起)는 뜻에 어긋나게 되어 또한 망(妄)이다. 그래서 무엇을 증(證)하였다 함은 그것이 옳은 증(證)이든 잘못된 증이든 이미 망(妄)이다.
무엇이든 새로 증할 바가 없는 것이다. 이미 증함없이 증한 자리에 온통 항상 함께 하는 까닭이다.
또한 본래 증할 것이 따로 없고, 증한 자가 따로 있지 않다.
무엇을 증하면 이미 여기에 능(能:見分)과 소(所; 相分)의 이분(二分)이 있게 되어 버린다.
그래서 꿈이라 하고 망(妄)이라 한다.
이렇게 올바른 중에도 걸림 없어야 마음을 잊음(忘心)이 되어 일체법에 자재(自在)한다
그래서 올바로 증(證) 되었다면 증했다고 함도 없다.
이것이 바로 즉심(即心), 망심(忘心), 즉사(即事)의 조사선(祖師禪)이다.
그래서 <유마경>에 이른다.
"천녀(天女)여! 너는 어떻게 성취하였기에 어찌해서 설명함이 이와 같은 것이냐?" 천녀가 말했다.
"저는 얻은 바 없고, 증득한 바 없는 까닭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얻음이 있고 증득함이 있다면 바로 불법(佛法)에서 증상만(增上慢)이 되기 때문입니다. "
여기에서 증득하였다고 하면 불법(佛法)에서 증상만이 된다고 하였다.
불법이란 본래 있는 것이어서 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닌데, 수행을 통해 새로 얻었다 하면 자신이 작(作)하였다는 것이 되어 증상만이 된다.
그래서 경에 이르길, 자신이 불(佛)이 되고자 함도 증상만이라고 하였다.
어찌 불(佛)을 작(作)할 수 있겠는가 ! 만약 불(佛)을 수행으로 작(作) 한다면 불(佛)은 피조물이 되고 자신은 불(佛)을 창조한 자가 되어 버린다. 그러니 이러함을 증상만이라 하는 것이다.
또한 본래 불(佛)이 아님이 없고, 본래 불(佛)인데 어찌 새로 불(佛)을 증득했다 함이 있겠는가.
불(佛) 뿐이거늘 불(佛)이라는 상이나 상념이 어찌 있겠는가 .
그래서 증(증)한 자리에 증했다 함이 없는 것이다.
한편 뒤에 이어지는 여러 법문에서는 여러 심묘한 뜻을 올바로 해(解)함을 망상이라 하고 있다.
이 또한 이 단락에서 설한 뜻과 같다. 올바로 해(解) 되었다면 해(解) 할 것이 사라졌으니 해(解) 할 바가 없다.
그 올바른 지해(知解)와 증(證)이 먼저 이루어지면 해(解) 하였다 함과 증득하였다 함도 없게 되니 이러한 행(行)과 증(證)이 되어야 조사선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비슷한 해(解)이고, 비슷한 증(證)일 뿐 진정한 것이 되지 못하여 그 상(相)을 벗어나지 못한다.
올바른 지해(知解)와 올바른 증(證)이 먼저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버려야 할 지해도 모르면서 사(事)로 희롱하며 조사선 한다고 하는 것은 단지 흉내에 지나지 않는다.
- 담림 편집, 박건주 역주 <보리달마론> 운주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