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과거선사들 가르침

영가현각스님이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무한진인 2020. 2. 25. 20:09



ㅇ, 현각스님 친구가 보낸 편지


영계에 도착한 이후 마음과 뜻이 편안하여 높고 낮은 산봉우리에 지팡이를 떨치면서 항상 노닐고 석실과 바위굴에 먼지 털고 조용히 앉아 정좌하고자 합니다. 

푸른 소나무와 맑은 웅덩이에 밝은 달이 저절로 생겨나고, 바람이 흰구름을 쓸어가면 천 리를 마음껏 바라봅니다.

이름 난 꽃과 향기로운 과일을 벌과 새가 머금고 오고 원숭이의 휘파람이 길게 울리면 멀고 가까운 곳에서 다 들으며 괭이자루로 베게 삼고 가는 풀로 방석을 삼습니다. 

세상이 험하고 너와 나를 다투는 것은 심지가 통달하지 못하기에 비로소 그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혹 시간이 나면,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ㅇ, 현각스님 답장


헤어진 이후 이제 수년이 지나 멀리서 마음으로 그리워하다 때론 또 근심이 되기도 하였는데, 홀연히 보내온 편지를 받고는 마침내 걱정이 없어졌습니다. 

모르겠는데, 편지 보내신 후 존체는 어떠하신지요?

'깨달음의 즐거움(法味)'으로 정신을 키우시니 마땅히 맑고 즐가우시리라 봅니다. 

저 현각이 잠시 시간을 내어 (그대의) 지당한 말씀을 삼가 읽어보니, 말로는 서술할 수가 없습니다. 


편지를 받고보니 절조를 지켜 그윽한 곳에 홀로 머무르며 인간세에 자취를 끊고 산골에 몸을 감추셨군요. 

친한 벗과도 왕래를 끊으시니 새와 짐승이 때때로 노는 것이 밤이 새도록 이어지며 날이 다하도록 적적하군요. 

보고 듣는 것이 모두 사라지고 마음의 허물이 고요해져 외로운 봉우리에 홀로 머물며 나무 아래 단정히 앉아 번뇌를 끊고 도를 음미하니, 진실로 그러함이 합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른 도는 고요하고 쓸쓸해서 비록 수행이 있어도 만나기 어렵지만, 삿된 무리는 시끄럽고 요란해서 익하지 않아도 친해지기 싶습니다. 

만약 이해가 현묘한 으뜸에 계합하고 수행이 참된 취지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윽한 곳에 거하되 졸렬함을 지니면서 스스로 '한 생애'라고 여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마땅히 선지식에게 널리 묻고 정성스러움을 가슴에 품으며, 합장하고 무릎꿇어 뜻과 용모를 단정히 하고, 새벽과 밤에도 피로를 잊고 시종 정성으로 우러르며, 몸과 입을 절제하고 태만을 없애며, 몸 껍대기를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지극한 도만을 닦는 사람이라야 정신을 맑게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릇 신묘한 것을 캐고 그윽한 것을 탐구하고자 하는 것은 진실로 쉽지 않습니다. 

이를 선택할 때에는 얇은 어름을 밟듯이 반드시 눈과 귀를 기울여서 그윽한 음을 만들고, 감정의 먼지를 숙연하게 하여 그윽한 이치를 감상하며, 말을 잊고 뜻을 음미해야 합니다. 

허물을 씻고 미묘함을 음미하고, 저녁에 생각하고 아침에 묻되 털끝만큼도 외람되지 않아야 합니다. 

이와 같으면 산골에 몸을 숨기고 생각을 고요하게 하며 무리와 왕래를 끊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혹 마음의 길이 아직 통하지 않아서 사물을 보는 것이 막힘이 되는데도 시끄러움을 피하고 고요함을 구하고자 한다면, 세상이 끝나도 그 방도는 있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울창한 긴 숲은 높이 솟아있고 새와 짐승은 소나무와 대나무 숲 꼭대기에서 울어대며, 물과 돌은 가파르고 바람부는 가지는 소슬하며, 넝쿨을 얽혀 있고 구름과 안개는 끼어 있으며, 계절 따라 만물은 쇠퇴하고 번영하며 아침저녁으로 어둡고 밝으니, 이런 것들이 어찌 시끄럽고 복잡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견해의 미혹이 오히려 얽혀 있어서 길에 부딪치는 곳마다 막힐 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이때문에 우선 도를 알고 난후에 산에 기거해야 합니다. 

만약 아직 도를 알기도 전에 먼저 산에 기거한다면, 단지 그 산을 보기만 할 뿐 그 도는 반드시 잊을 것입니다. 

만약 아직 산에 거하지 않았는데도 먼저 도를 안다면, 단지 그 도를 보기만 할 뿐 그 산은 반드시 잊을 것입니다. 

산을 잊으면 도의 성품이 정신을 바쁘게 하지만, 도를 잊으면 산의 형상이 눈을 어지럽힙니다. 

그러므로 도를 보고 산을 잊으면 인간 세상도 고요하지만, 산을 보고 도를 잊으면 산속이 바로 시끄러운 곳입니다. 


5온(蘊)이 무아(無我)임을 반드시 능히 요달할 것이니, 내가 없는데 누가 인간 세상에 머무르겠습니까? 

만약 5온과 6입(入)이 공(空)과 같음을 안다면, 공의 모임이 어찌 산골과 다르겠습니까?

만약 3독(毒)이 아직 버려지지 않아 6진(塵)이 아직 어지럽다면, 몸과 마음이 저절로 서로 모순될 텐데 (그것이) 인간 세상의 시끄러움이나 산의 적적함과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또 무릇 도(道)의 성품은 텅 비어서 만물이 본래 그 허물이 되지 않습니다. 

진실한 자비는 평등하니 소리와 색이 어찌 도가 아니겠습니까? 

단지 견해가 도치되어 미혹이 생김으로 인해 마침내 윤회가 이루어질 뿐입니다. 


만약 경계가 유(有)가 아니라는 것을 능히 요달하면, 눈에 부딪치는 것 중 도량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요달함도 본래 무(無)라는 것을 알면, 반연하지 않고도 비춥니다. 

원융한 법계에 이해와 미혹이 어찌 다르겠습니까? 

중생(含靈)에 의해 자비를 가려내고, 상념에 즉해 지혜를 밝힙니다. 


지혜가 생기면 법에 상응하여 두루 비추니, 경계를 떠나 어떻게 관찰할 수 있겠습니까?

자비가 일어나면 근기에 합치하여 모두 거두어들이니, 중생을 어기고 어떻게 제도할 수 있겠습니까?

중생을 남김없이 제도해야 자비가 크고, 경(境)을 모두 비추어야 지혜가 원만합니다.

지혜가 원만하면 시끄러움과 고요함을 동일하게 관찰하고, 자비가 크면 원수와 친구를 널리 구제합니다. 

이와 같다면 어찌 산과 계곡에 오래 기거함을 빌리겠습니까? 

처한 곳에 따라 인연에 맡길 뿐입니다.


하물며 법마다 비어 원융하고 마음마다 고요하게 멸해, 본래 스스로 유(有)가 아닌데 누가 억지로 무(無)를 말하겠습니까? 어찌 시끄럽게 떠듦을 시끄럽다고 할 수 있고, 어찌 적정을 고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사물과 내가 그윽히 하나라는 것을 안다면, 저것과 이것이 도량 아닌 곳이 없으니, 다시 어찌 인간 세상에서는 시끄러움과 복잡함을 따르고 산골에서는 적막함을 펼치겠습니까?


이때문에 움직임을 버리고 고요함을 구하는 것은 형틀칼은 싫어하고 수갑을 좋아하는 것이며, 

원수를 멀리하고 친구를 구하는 것은 감옥을 싫어하고 새장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만약 시끄러운 곳에서도 고요함을 생각할 수 있다면, 시장의 가게도 편안한 자리가 아닌 곳이 없습니다. 

역경계를 걷어다 순경계로 바꾸면 원수나 빚쟁이도 본래 친한 친구가 됩니다. 


이와 같다면 겁탈이나 훼방이나 모욕이 어찌 나의 본래 스승이 아닌 적이 있겠습니까? 

부름과 외침, 시끄러움과 번뇌가 적멸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묘한 도(道)는 무형이지만 만 가지 모습이 그 이치에 아그러지지 않고, 진여(眞如)는 적멸이지만 뭇 울림이 그 근원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미혹하면 견해가 도치되어 의혹이 생기며, 깨우치면 거슬림(違)과 수순함(順)이 있을 곳이 없습니다. 


고요함이 있지 않지만 인연이 모이면 능히 생겨나고, 높은 산이 없지 않지만 인연이 흩어지면 능히 멸합니다. 

멸(滅)이 이미 멸이 아닌데 무엇으로 멸을 멸하겠습니까? 

생(生)이 이미 생이 아닌데 무엇으로 생을 생기게 하겠습니까? 

생과 멸이 이미 허(虛)하므로 실상이 항상 머뭅니다. 


이 때문에 선정의 물이 도도해지면 어떤 망념의 먼지인들 씻지 못하겠습니까? 

지혜의 빛이 밝아지면 어떤 미혹의 안개인들 걷지 못하겠습니까? 

어그러지면 6취(趣)를 순환하게 하고, 이해하면 3도(道)를 멀리 벗어나게 됩니다. 

이와 같은데 어찌 지혜의 배를 타고 법(法)의 바다에서 노닐지 않고,

산골에서 부러진 굴대의 수레를 타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사물의 종류가 어지럽게 많지만 그 본성이 본래 하나라는 것,

산령한 근원이 고요하지만 비추지 않고도  안다는 것을 압니다.

실상은 천성적으로 진실이고 신령한 지혜는 만든 것이 아닌데도,

인간이 미혹하면 잃었다고 말하고 인간이 깨우치면 얻었다고 말합니다.

얻고 잃음이 인간에 달려 있을 뿐 움직임이나 고요함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비유하자면 배를 타는 것도 알지 못하면서, 그 물이 굽이치는 것을 원망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현묘한 으뜸을 능히 신묘하게 알아서 빈 마음이 깊히 계합하면,

움직이든 고요하든 항상 법(法)이고, 말하든 침묵하든 항상 법이어서,

고요하여 돌아갈 곳이 있어 편안함에 간극이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으면 산골에서 소요할 수도 있고 교외와 마을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있습니다. 

모습과 행동을 멋대로 해도 마음은 고요하게 머무를 것입니다. 


편안함이 안에서 그치고 한가로움이 밖으로 퍼지면,

그 몸은 구속된 듯해도 그 마음은 태연해 보입니다.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지만 그윽한 영혼을 법계에 잠기게 합니다. 

이와 같으면 근기에 따라 느낌이 있지만 당연히 정해진 기준은 없을 것입니다. 


서신이라 이렇게 간략히 적습니다만, 나머지는 또 무엇을 말씀드리겠습니까? 

만약 뜻의 친구가 아니라면 어찌 감히 경솔히 접근하겠습니까? 

그윽하고 고요한 여가에 잠시 사량해봅니다. 


내가 필히 합당치 못한 것을 함부로 말했을 테니, 

읽고나서는 종이땔감으로나 쓰십시오. 

이민줄입니다. 친구 현각이 올립니다. 


                                                 - 한자경 지음 <선종영가집강해>불광출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