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자아탐구 실제수행방법(1)

무한진인 2020. 2. 12. 10:13



스리 라마나는 자아탐구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나'라는 내면의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고, 가능한 한 그 느낌을 오랫동안 유지하라고 일렀다.

또한 다른 생각 때문에 집중력이 분산되면 '나라는 생각'을 알아 차리는 데에 마음을 집중하고, 마음이 산란해 질 때마다 다시 '나라는 생각'으로 되돌아가서 탐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이런 과정에 도움이 되는 여러 수행방편을 제시했다.

예컨대, 탐구자가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든지, '나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라고 자문해 보도록 했다.

이런 질문의 궁극적인 목적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위의 주체라고 여기는 '나'를 끊임없이 알아차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자기탐구 수행의 초기 단계에서는 '나'라는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하나의 생각 또는 지각의 형태를 띤 정신적인 행위가 된다. 하지만 수행이 진전되면서 차츰 주관적으로 경험되는 '나'라는 느낌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나라는 느낌'이 다른 생각이나 대상과 연결되어 스스로를 그 생각이나 대상이라고 여기는 '동일시'를 멈추면, 그 느낌마저도 사라진다. 이때 개체성에 대한 느낌이 일시적으로 정지되고 '존재에 대한 체험'만이 남게 된다.

이런 종류의 체험은 처음에는 드문드문 일어난다. 하지만 수행을 거듭함에 따라 그 상태에 이르거나, 그 상태를 유지하기가 점점 더 쉬워진다. 자기 탐구가 이 정도 수준에 이르면, 애쓰지 않고도 존재를 자각하게 되며 더 이상 개인의 노력이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왜냐하면 노력하던 '나'가 일시적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 단계에 도달해도 '나라는 생각'이 주기적으로 다시 나타나기 때문에, <나>를 깨달았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수행의 최고 단계인 것만은 분명하다.

수행을 하면서 '존재에 대한 체험'이 반복해서 일어나다 보면, '나'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습(바사나, 마음의 습성)이 차츰 약해지고 마침내는 소멸한다. 습의 구속력이 일정 수준 이하로 약해지면, <나>의 힘이 남아 있는 '습

들을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나'라는 생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이 상태가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는 궁극의 깨달음이다.

'나라는 생각'을 주시하거나 알아차리는 수행법은, 생각을 어딘가에 묶거나 고정시켜서 제어하는 대개의 수행법에 비해 조화로운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수행법은 특정 대상에 생각을 묶지도 않고, 생각을 억지도 누루지도 않으며, 그저 마음이 일어나는 근원에 대한 주의를 일깨우기만 하면 된다.

자기탐구의 수단이자 목적은 마음의 근원에 머무는 것이며, 실체가 아닌 것들에 대한 관심이나 이끌림을 거두어 들여서 유일한 실체를 알아차리는데 있다.

수행의 초기 단계에서는 들끓는 온갖 생각들로부터 '생각하는 자신'에게로 주의를 돌리는데 꽤나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일단 '나'라는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이 확실하게 자리 잡으면, 그 뒤부터는 더 이상의 노력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 이때부터는 행위의 과정이 아니라 존재의 과정이며, '존재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이 아니라 '애쓸 필요없이 존재하는' 과정이다.

원래부터 우리는 애쓰지 않고도 존재하는 실체로서 늘 현존하고 있으며, 그것을 스스로 늘 체험하고 있다.

하지만 몸과 마음처럼 실재하지 않는 것이 현존하는 척 가장을 하려면, 잠재의식차원에서 끊임없이 정신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므로 자기탐구 수행이 고차원적인 단계에 이르면, 노력을 하면 할수록 존재를 체험하는 데에 방해가 되며 오히려 노력을 그쳐야 존재를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궁극적으로 <나>는 어떤 행위를 한 결과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존재함으로써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스리 라마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명상하지 말고 존재하라"

"스스로가 누구인지 생각하지 말고, 존재하라"

"존재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 당신은 그냥 존재한다." 

자기 탐구를 마치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치르는 명상 수행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깨어 있는 동안, 어떤 일을 하든지 자기탐구는 계속되어야 한다. 스리 라마나는 일과 자기탐구가 절대 서로 상충하지 않으며, 실제로 조금만 해보면 어떤 상황에서도 쉼없이 할 수가 있게 된다고 강조했다.

물론 초보단계에서는 한시적으로나마 시간을 정해놓고 규칙적으로 하는 것도 좋을 거라고 말하기는 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앉아서 명상하는 방식은 결코 권하지 않았다. 또한 제자들이 세속의 생활을 정리하고 명상에만 전념하겠다고 나설 때면 언제나 만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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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께서는 <나>를 탐구함으로써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데, 이때 탐구란 어떤 성격을 띠는 것입니까?

: 당신은 마음이다. 또는 당신은 마음이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은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모든 생각의 배후를 관찰해보면 거기에는 '나'라는 생각이 공통적으로 밑바탕에 깔려 있다. 이 '나라는 생각'을 첫번째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나라는 생각'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그게 무엇인지 알아낼 때까지 질문해 보라. 이 의문에 강하게 사로잡히면,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 자기 탐구수행을 하면서 '나라는 생각'에 끈질기게 매달리고 있어보면, 이 생각 저 생각들이 일어났다가 금새 사라지곤 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도 아무런 답을 찾지 못합니다. 이런 상태로 계속 있는 게 자기탐구인가요?

: 사람들은 흔히 그런 실수를 한다. <나>를 진지하게 탐구하다 보면, '나라는 생각'은 사라지고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무엇인가 당신을 사로 잡는데, 그것은 탐구를 시작했던 그 '나'가 아니다. ​


: 그 다른 무언가는 도데체 무엇입니까?

: 그것은 진정한 '나'이며, '나'라는 것이 존재하는 의미다. 그것은 에고가 아니며, 지고한 존재 자체다.


: 자신에게 질문을 시작할 때 다른 생각은 물리쳐야만 한다는데, 생각이 끊임없이 밀려옵니다. 한 생각을 물리치면 금세 또 다른 생각이 나타나서, 이런 식으로는 아무리 생각들을 물리쳐도 도무지 끝이 안날 것 같습니다.

: 나는 생각들을 물리쳐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당신 자신, 곧 '나라는 생각'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보라. 그 한 생각에만 집중하다 보면, 다른 생각들은 저절로 물러나고 사라질 것이다.

: 그러면 생각들을 물리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까?

: 아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생각을 물리치는 훈련이 한 동안 필요할 수도 있다. 그리고 당신은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또 일어나니, 생각을 물리치는 일이 도무지 끝날 길이 없을 것 같다고 예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끝이 나게 되어 있다. 자기 탐구 수행의 고삐를 늦추지 않은 채,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물리치려는 노력을 계속해서 끈질기게 하다 보면, 자신의 내면으로 점점 더 깊히 들어가게 된다. 그런 수준에 이르면 굳이 생각을 물리치려고 애쓸 필요도 없어진다.


: 노력하거나 안간힘을 쓰며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고도 가능하다는 뜻입니까?

: 물론이다. 그뿐만 아니라, 일정 수준을 넘으면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다.


: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노력을 전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 당신의 현재 수준에서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수행이 더 깊어지면 어떤 노력도 할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자기 탐구를 통해 마음이 내면을 파고들어 '나라는 생각'의 근원으로 향하면 차츰차츰 저절로 습이 소멸된다.

그런데 <나>의 빛이 습에 비쳐 반사되는 현상이 곧 마음이다. 따라서 습이 사라지면 마음 또한 사라진다. 마음은 유일한 실체인 가슴(여기서는 진아본체를 가리킴)의 빛 속으로 녹아들고, 사라져 버린다.

이것이 구도자들이 알아야 할 핵심적인 내용이다. 구도자들은 모름지기 '나라는 생각'의 근원을 온 마음을 다해 일념으로 탐구해야 한다.


​                             -데이빗드 갓맨 편집,구승준 옮김 <있는 그대로> 한문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