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존재-의식-지복(sat-chit-ananda)

무한진인 2020. 2. 1. 10:04



라마나 마하리쉬에 따르면 "깊은 잠 속에서는 몸과 세계가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 자신의 존재인 '내가 있다'는 모든 사람들이 경험한다."  화면 즉 몸과 세계는 마음이 일어날 때만 일어나고, 마음이 존재하는 동안에만 존재하며, 마음이 저물면 사라진다. 그러니 마음과 별개의 어떤 세계가 있는가?  소우주가 곧 대우주이므로, 몸이 곧 세계이다.


몸이 없으면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몸에서 투사된다.

그래서 바가반은 (실재사십송 제5연에서)  "몸이 없이 세계를 본 사람이 있는가?" 라고 묻는다.

요컨대 세간 범부들의 논변은 "몸과 세계는 잠 속에서도 존재하는 반면, '나'라는 의식은 잠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가반의 판정은 정반대이다.

" 몸과 세계는 깊은 잠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반면, '내가 있다'는 의식은 모두가 경험한다."

그런데, 몸이 깊은 잠 속에서도 정말로 존재하는가?


왜냐하면 만일 몸이 깊은 잠 속에서 존재한다면 세계도 깊은 잠 속에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몸이 존재할 수 없는데, 어떻게 그것이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깊은 잠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가? 그리고 깊은 잠 속에서는 몸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세계가 깊은 잠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가?

따라서 깊은 잠 속에서는 몸과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스리 바가반의 판정을 이해하도록 노력하자.


우리가 어떤 사물이 존재한다고 말하면, 그 존재성은 의식과 결부되어야 한다.

즉 그 사물 자체가 자기 자신의 존재성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그 자신의 존재성을 알거나 자신의 존재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다른 어떤 사물의 증거나 도움을 필요로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존재와 존재함에 대한 앎(즉, 존재와 의식)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존재를 아는, 존재 그 자체가 아닌 어떤 의식도 없다네.

따라서 존재가 곧 의식이라네. " -우빠데사 운디야르 제23연.


그래서 존재가 없는 의식은 전혀 의식이 아니고, 마찬가지로 의식이 없는 존재는 전혀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잠을 잤다는 앎은 잠을 잘 때 우리가 존재했다는 증거이다.

우리가 잠을 잤는지 안 잤는지를 알기 위하여 남들에게 물어 보아야 하는가?

우리가 잠을 잤다는 앎을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 뿐이니, 바로 이 앎이 우리가 깊은 잠 속에서도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깊은 잠 속에서의 우리의 존재와 의식은 이처럼 부인할 수 없는데, 만일 몸과 세계도 그러한 부인을 할 수 없는 존재성과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왜 그것들(몸과 세계)이 깊은 잠 속에서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남들의 증언을 필요로 하는가?  깊은 잠을 자는 동안 몸과 세계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남들의 증언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것들의 존재는 자명하지 않음이 분명하지 않는가?


우리는 의식이 없는 존재는 전혀 존재가 아님을 증명했으므로, 그리고 깊은 잠 속에서 몸과 세계가 존재한다는 앎은 자명하지 않음으로, 우리는 그것들의 존재가 거짓이라고 적극적으로 주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깊은 잠 속에서는 몸과 세계거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리자.

이와 같이 누구도 잠 속에서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므로, 잠 속에서 우리 자신은 존재하고, 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가 받아들여야 한다.


구도자가 그 자신의 체험에 의해 '나는 몸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완전한 확신을 갖지 못하면 '나는 몸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몸에 대한 집착을 놓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아신, 스리 바가반은, 베단타의 진군나팔인 "몸은 내가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가 나다 (deham naham koham sokam) 를 선언하면서, 당신 자신은 은총의 말씀을 타밀어로 이렇게 말했다.


" 몸은 질그릇처럼 지각력이 없어 '나'라는 의식이 없고,

'나' 아닌 그 몸이 없는 깊은 잠 속에서도 우리의 존재는 (내가 있다로서) 매일 경험되네.

                                                                                                    -실재사십송보유-   

                           

- -  - -  < 중략> - - - -


이제 더 나아가 면밀히 살펴보면, 우리에게는 미세신보다 더 미세한 또 하나의 몸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 각자가 이것을 뒷받침하는 그 자신의 경험, 즉 꿈 없는 잠을 가지고 있다.

잠을 잘 때 우리에게는 조대신(육체)도 없고 미세신도 없다.

마음이 완전히 가라앉아 있으므로, 우리는 완전한 어둠 속에 잠겨 휴식하며 아무 것도 모른다.

마음이 이 어둠에서 다시 일어나면 꿈이나 생시의 상태가 된다.

우리가 깊은 잠에서 깨어날 때는 이와 같이 우리의 경험을 기억한다.

'나는 행복하게 잠을 잤고, 아무 꿈도 꾸지 않았다' 고,

즉 우리는 꿈조차도 없는, 외관상 어둠으로 보이는 그 상태 속에서도 우리가 존재했다는 것을 안다.

그 어두운 상태를 원인신(causal body)이라고 한다.

우리가 거기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을 아는 우리가 진정한 '나'이다.


깊은 잠 속에서 에고(집착의 형상을 한 마음)는 아주 미세한 원습의 형상으로 여전히 살아있다.

미세신과 조대신들이 일어나는 토대이자 원인이 바로 이 형상이며, 그래서 그것을 원인신이라고 한다.

죽음의 상태에서도 우리는 이 원인신 속에서 존재한다.

이 원인신은 조대신의 죽음에 의해 소멸되지 않는다.

이 원인신조차도 '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 상태조차 우리에게 낯설다는 것을 알면서 그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우리의 존재만이 실재하며, 거기서 우리가 취하는 그 형상(어둠 혹은 무지)은 우리일 수가 없다. 생시상태의 조대신(육신)은 비록 '나'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나는 이 몸이 아니다'라고 배척했고, 같은 이유로, 꿈 상태의 미세신도 '나가 아닌 것'으로 배척했듯이, 이제 깊은 잠의 이 원인신(어둠 또는 무지)도 ""나가 아닌 것"으로 배척하자.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오고 가는 하나의 형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몸 모두를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니다.' 로 확고히 제거하고 나서 남아 있는 그 지(知),

우리의 존재(sat)에 대한 의식(shit)이야말로 '나'이다.


우리는 이 세 가지 몸을 제거할 수 있는가? 분명히 그럴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의 껍질일 뿐이며, 우리에게 외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외부적인 것으로부터는 우리가 자신을 분리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 범위 내에 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외부적인 이 껍질들에서 우리 자신을 분리할 때에만  우리는 자신의 참된 성품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미 확립한 진리, 즉 우리의 참된 성품 그 자체가 행복이라는 진리에 따르면, 우리의 참된 성품을 아는 것 자체가 행복의 체험이다. 그래서 진아지의 체험은 바로 행복의 정점이다.

그것이 바로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 알게든 모르게든 무수한 노력을 통해 찾고 있는 궁극의 목표인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하는 탐구를 통해서 완전한 행복으로서의 우리의 실재에 대한 지(知)를 성취하는 것이 인류의 지고한 목표이다. 우리가 항상 이 존재-의식-지복(sat-chit-ananda) 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껍질들을 우리 자신으로 상상하여 우리 자신을 은폐하는 과오가 모든 불행의 유일한 원인인 것이다.


                                  -스리 사두 옴지음,대성번역  <스리 라마나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