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대도(大道)는 알기 쉽고, 행하기 쉽다는 것입니까?
[본문]
문 : "대도(大道)는 가까이 있습니까,멀리 있습니까?
答 : "마치 아지랑이와 같아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거울 속의 모습과 같아 또한 가까이 있지도 아니하고 멀리 있지도 아니하다. 허공에서 어지럽게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허공꽃(空華)와 같아 가까이 있지도 아니하고 멀리 있지도 않다. 가까이 있다고 하자니 시방(十方)에서 이를 구하여도 얻을 수 없다. 멀리 있다고 하자니 명료하고 뚜렷하게 바로 눈앞에 있다.
경론에 이른다 ' 가까이 있어도 볼 수 없는 것이 만물의 성품이다. 사물의 성품을 보는 것을 이름하여 득도(得道)라 한다. 사물의 심(物心)이란 사물의 성품이며, 사물의 상이 없다. 사물에 즉하여 사물이 없으니 이를 사물의 성품이라 한다. 이른바 형상이 있는 것들은 모두 사물이다. 자세히 살펴보아 사물의 성품을 봄이 진실하여 어긋남이 없다면 이를 진리를 봄(見諦)이라 하며, 또한 법(眞理)을 봄이라 한다. 가까이서도 볼 수 없는 것이 법(진리)의 상이다."
[본문]
지혜로운 자는 사물에 맡기고(任) 자신에 맡기지 않으니 취하고 버림이 없으며, 또한 거스름(違)과 따름(順)이 없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에 머무르고 사물에 맡기지 않으니 바로 취하고 버림이 있으며, 거스르고 따라감이 있다.
만약 능히 마음이 텅 비어 크게 거리킴없이 활짝 퍼져서 천하가 없게 된다면 바로 이것이 사물에 수시(隨時)로 맡기는 행이다. 사물에 수시로 맡기면 바로 쉬워지고, 사물에 거역하여 거스르면 어려워진다. 사물에 다가오고자 하면 그에 맡겨 거스르지 않는다. 사물에 가고자 하면 그대로 가도록 두어 쫓아가지 않는다. 지은 일이 지나가면 후회하지 아니하고, 일이 아직 이르지 않았으면 그대로 두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분이 도를 행하는 사람이다.
만약 능히 (사물에) 맡길 수 있으면 곧 천하를 맡길 수 있다. 득실(得失)이 '나'로 말미암지 않으니 만약 (사물에) 맡겨 거역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자재하여 (자유롭게) 거역하지 않는다면 어느 곳 어느 때 소요(逍遙)하지 않음이 있겠는가 !
[해설]
물이 흐르듯 함이 사물에 맡김이고, 좋다 싫다는 자신의 입장에 따라 현상을 거스르고(違) 좋다고 취착하여 따라감(順)이 곧 '나'에 맡김이다. 물은 지형에 따라 거스름 없이 유유히 흐른다. 물은 아예 '나'라는 견(見)이 없어 '나'에 맡김이 없다. 지형따라 흐르면서 그렇게 자신이 흘러간다는 생각도 없다. 현상(사물)을 거역하거나(違) 쫏아감(順)은 모두 그 현상에 이미 염착(染着)된 것이다. 그러한 걸림은 '나'가 있다는 견(見) 때문이다. 그러나 사물의 현상은 그대로 그러한 것일 뿐 그 득실을 생각할 자리가 따로 없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는 그 현상의 사물에 '나'의 지견을 개입(介入)시키고 자신의 입장에서 득실을 따져서 스스로 그 현상(사물)에 묶인다. 꽃이 노랗게 피었든 빨갛게 피었든 그 꽃이 그대로 그렇게 핀 것일 뿐이다.
천하를 맡을 수 있는 사람은 천하와 함께 하되 그 천하에 걸리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현전(現前)의 사(事)에 처하여 취함도 버림도 없고, 거역하려거나 따라가 취착하려 함을 떠나야 한다.
[본문]
문 : "어찌하여 대도가 매우 일기 쉽고, 매우 행하기 쉬운데 천하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행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까? 원컨대 개시(開示)하여 주십시오."
답 : " 이 말은 사실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높이 누워 방임(放任)하며 하나의 일도 짓지 않는 것을 도를 행함이라 한다. 하나의 사물도 봄이 없는 것을 도를 봄이라 한다. 하나의 사물도 지(知)함이 없는 것을 도를 닦음이라 한다. 하나의 일도 행함이 없는 것을 도를 행함이라 하며, 또한 알기 쉽고, 또한 행하기 쉬움이라 한다. "
[해설]
도란 행함없이 행함이다(無爲之爲). 본래심성(心性)이 이러하고 만물이 그러하다. 일체가 무엇을 한다고 함이 없다.
무엇을 견(見)함이 있다면 명상(名相)이라는 영상(影像)이 일어난 것일 뿐 실은 본성은 지(知)한다고 함도 없고, 견(見)한다고 함도 없다. 무엇을 행한다고 하면 조작함이 되어 유위(有爲)가 되어 버린다. 유위에는 하는 자로서의 '나'가 있고, 대상이 있으며, 하는 일이 있다. 이렇게 아견(我見)이 가리게 되고, 마음이 일어나 분별하게 되니 도가 드러나지 않아 알기 어렵고 행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나 행함을 떠나면 오히려 도가 훤히 드러난다. 그래서 알기 쉽고, 행하기 쉽게 된다고 하였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어서 무엇이 무엇을 한다고 함이 없었다. 무엇을 함으로써 불도(佛道)를 이루려 함은 아직 망상에 있는 것이다. 무슨 행을 한다고 하는 데서 떠나야 그 본래의 자리가 현현된다. 이에 대해서는 <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에 자세히 설해져 있다.
-달마대사 저, 담림 편집, 박건주 역주 <보리달마론>-